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주무관

강찬모   문학평론가/문학박사
강찬모 문학평론가/문학박사

 

[동양일보]83년 전(1937) 오늘, ‘9월 18일’은 포석 조명희가 소련 KGB에 의해 체포 결국 죽음(1938. 5.11)에 이르게 된 비극적인 날이다. 이 날이 평범한 날의 하루일 수 없는 이유는 포석이 한국 문학사에 차지하는 독보적 위상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환기하고자 포석 조명희문학관에 근무하는 강찬모 박사가 보내온 글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역사에서 ‘만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정’이란 늘 결과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또 다른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정을 한다. 아니 해본다. 가정을 통해 상상한 현재의 모습은 현실과 다른 판이한 편차에서 오는 유쾌한 즐거움이 있는 까닭이다. 이렇듯 가정은 미완으로 끝난 현재의 불완전함을 상상의 영역에서나마 실현하고픈 인간의 미지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만약과 가정이라고 하여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무한대의 공상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예정된 일이거나 실현 가능했던 것에 한해서 펼칠 수 있는 상상의 나래이다. 예컨대 임금이 될 수 있는 가정은 실제 권력의 주변에 있을 때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지 걸인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만약이란 부사(副詞)가 확장 가능한 상상은 이처럼 실현 가능했으나 미완으로 남은 현실에만 날개를 달아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포석 조명희는 한국 근현대문학의 선구자이다. 문학사에서 공인된 세 가지 최초( 첫 희곡집 <김영일의 사>1923, 첫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1924)의 미증유의 성취를 이룬 대작가이다. 28년 일제하 첫 망명 작가도 그가 걸어 간 길이다. 영광의 몫이 어찌 무혈입성으로 이루어지는 길일까. 최초는 문학사에서 영광인 동시에 목숨을 담보하거나 던지고서야 얻을 수 있는 형극의 길이다. 포석은 한국 문학사의 제단에 기꺼이 자신의 영육을 바쳐 문학을 통하여 이민족의 압제에 신음하는 내 땅의 동족을 구하고 더 넓은 사해동포(四海同胞)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신의 생을 걸었던 사내 중에 사내였다. 여기에 더하여 두 가지 최초가 보태진다. ‘강’(‘낙동강’, 1927)을 표제로 한 첫 소설과 연해주에서 발행한 고려인 문예지(‘노력자의 조국’)의 주필로 해외 첫 ‘망명문단’ 형성을 주도해 많은 제자를 키워낸 일이다.

포석이 간 길은 한국 문학사가 다시 쓰이는 길이었다. 마포나루를 떠나 연해주에 첫발을 내 딛는 순간부터 한국 문학사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문학사의 이정표가 세워졌다. 국내에 있을 때는 손으로 쓴 글이 문학사의 지형을 바꿨다면 망명 후 그가 쓴 문학사는 오로지 그의 발걸음을 통해 역사를 바꾼 순간들이었다. 그러니까 포석의 러시아(구소련)에서의 문학은 손으로 쓴 문학이 아니라 발로 써내려간 문학을 통하여 문화의 영토를 확장한 일이었다. 억조창생(億兆蒼生)중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역사가 되는 사람이 예사 운명을 타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묘한 숙명이며 누구나 원한다고 되는 길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포석은 동포들의 민족혼 고취와 함께 현지 원주민(러시아)들의 삶에도 사회주의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개방적 세계주의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포석은 진정한 의미의 ‘한류(韓流)’ 1세대인 셈이다.

무겁지만 역사적 소명에 의지해 디뎌왔던 포석의 발걸음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우수리스크를 지나 하바롭스크에서 그 파란만장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937년 9월 18일 추석을 하루 앞둔 토요일 새벽,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너무나 허망하게 그의 발걸음이 끝났다. 38년 5월 11일(만 44년)이 고단했던 그의 육신이 공식적으로 영면에 든 날이지만 9월 18일이 박제가 된 몸이므로 그가 자취를 남기며 걸어왔던 역사가 된 삶이 사실상 증발해 버린 슬픈 날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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