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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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갈가리 찢긴 조선인학교 체계(2)

도쿄의 경우, 그간의 사정을 들어보면, 도쿄도(都)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사립조선인학교의 약 3500명에 달하는 학생을 공립학교에 재수용하는 것은 ⓵2부 수업을 압박하고 ⓶조선인 아동·학생의 입학에 따른 학부모 간의 감정적 대립 ⓷생활 곤궁 자의 증가에 따르는 교육상의 폐해와 같은 문제를 안게 된다.

따라서 도 교육국은 일반 학부모의 전학 문제 등에 대한 움직임을 중시하여 문부성·점령군·도쿄 군정부의 계속되는 권고에 고민스러워하면서도 도쿄도 독자의 최선책을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이 바로 도립조선학교라는 분리학교 형식이었다.

또 이것과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도립 조선고교의 일본인 교장은 발족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공립학교로 분산 입학시키라는 말을 듣고,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학교 측에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확고한 공산주의 사상을 일본 아동 학생들 사이에 퍼뜨리게 되면 큰일이라며 난리를 치는 사람들도 나왔다. 그러한 피해망상적인 사고는 빼고서라도 동일한 교육을 받아 왔다면야 조선인학교 3학년생을 일본학교 3학년생으로 횡적으로 편입시킬 수 있겠지만, 교과목과 내용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아무리 각의의 결정 사항이라도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자는 고육책‘으로서 도립 독립학교 형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당시 교육위원회·교사·학부모는 각각의 입장에서 조선인 학생의 전학을 귀찮게 생각하였다.

그것이 분리학교로서의 공립 조선인학교 안을 만들어 내는 유력한 요인이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배경하에 만들어진 공립 조선인학교가 전전 형의 분리학교로 되돌아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민족학교의 색채를 강화시켜 나갈 것인지는 오로지 재일조선인 측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후에 오카야마·야마구치의 2개 교는 전자, 다른 학교들은 후자로 나누어졌다.

한편, 셋째 유형으로는 일본인 학교 안에 민족학급을 특설한 형식을 들 수 있다. 그 수는 1952년 4월 현재 전국의 13개 부현에 77학급을 헤아린다. 모두 공립 일본인 학교에 분산 전·입학시킨 후 조선인으로서의 교욱을 부분적으로 부가하는 교위 측의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재일조선인 측이 할 수 없이 타협하여 성립된 것이다.

이 유형은 다시 두 가지 형태로 분별된다, 하나는 시가(滋賀 : 18학급)의 형태이다. 조선인 학급이 편성되고, 전속 교실에서 오전부터 조선인 교사가 민족교육을 하였다. 이것은 공립조선인학교의 학급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육과정에 제약이 가해진 데다가 일본인 집단 속에서 피차별 소수 집단이라는 상황을 연출하여 동화교육의 침투 정도는 더 강하였다.

그래도 이것은 다른 또 하나의 형태인 과외 시간에만 민족학급을 두는 방식과 비교하면 훨씬 더 나은 것이었다. 이바라키(11학급), 교토(8학급)를 비롯하여 가나가와, 사이타마, 지바, 아이치, 기후, 오카야마, 오사카, 효고, 후쿠오카, 야마가타 등에서 부설된 민족학급은 일본인 학생과의 혼성학급에서 정규수업을 마치고, 방과 후 조선인 학생들만 별도로 남아 한두 시간씩 민족교육을 받는 과외수업 방식이었다.

오사카의 ‘北鶴橋소학교’의 경우 조선인 교사가 이 민족학급을 담당하였는데, ‘민족학급이 시작된 당초에는 전용 교실도 없어, 강당을 나누어 수백 명씩 되는 아동을 가르쳤으며’, 거기에다가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했으므로, 교사 측도 ‘말도 못 하는 고생’을 해야 했다(김용해).

이러한 경험 때문에 민족학급은 5, 6학년생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는데, 학생 측에서 보았을 때도 이중 수업이라는 과중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인 학생의 차별 눈을 피하고자 혹은 의욕 상실 등의 이유가 겹쳐서 탈락하는 자가 많아졌다.

특히 과외수업으로서의 민족학급이 조금이라도 교육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학교가 전체적으로 민족교육의 의미를 인정하고 이를 보장하는 체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담당 교사인 조선인 교사만의 문제로 한정되고, 민족학급을 지레로 삼는 조선인 학생의 존재 방식을 재검토해 보려는 의욕적인 자세는 없었다.

오사카에서 오랫동안 민족교육 강사로 일한 김용해씨는 그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인 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망사항을 내놓았다.

첫째, 조선의 역사·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잘 알아 달라. ‘바르게 교육하기 위해서는 알지 못하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실한 문제’를 재일조선인 학생이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 민족학급 강사를 일이 일단 터지고 난 후 사후처리나 하는 존재로 취급하지 말라, 조선인 아동에게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경우, 도저히 손 쓸 수 없게 되어서야 상담을 받는 그런 상황을 지양하고, 언제나 원활하게 상호 연락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셋째, 민족학급의 시간을 존중해 달라. 정규수업을 파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시간 조정 때문에 민족학급의 시작 시각을 뒤로 물리기도 하고, 학교행사나 학년 행사 때문에 쉽게 망쳐지기도 하고 선생님의 심부름 때문에 수업시간에 지각하는 학생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선생님을 향한 요망’은 바꾸어 말하면, 분명 일본인 학교와 일본인 교사들이 민족학급을 경시하고 정규 수업시간에 조선인 학생 지도·조선에 관한 수업을 태만시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음을 고발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자신이 조선인임을 ‘부끄러워하며’ 민족학급에 나오는 것을 꺼리는 마음이 생겨났다. 일본인 학교에 특설된 민족학급은 공통으로 대개 이처럼 성가신 이단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교육 활동의 유기적인 일환으로 편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5학년에 올라가 조선인만 모아서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가르쳐주는 민족학급이라는 교실에 들어갔다.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6학년이 되자 조선인이란 어떤 민족인가를 알았다. 지금이라면, ‘나는 조선인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으므로 민족학급의 교사는 열심히 가르쳤다. 또 이 밖에 아이들의 전면 동화를 우려한 조선인 학부모의 손으로 자주적으로 몇 곳에 야간 강습회가 설치되어, 조선어 등을 가르치게 되었다”

1952년 4월 현재, 교토(9), 기후(5), 그 밖에 오카야마, 야마구치, 효고, 야마가타 등에서 모두 21개 소가 자주 학교·공립분교·민족학급이 없는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영도 어렵고, 아이들도 다니기 힘든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이상과 같이 학교 폐쇄령, 부현교위 차원의 교섭이 있은 후, 1949년 11~12월 단계에서 조선인학교 체제는 갈가리 찢겨지고, 민족교육의 형태는 자주 학교나 공립학교로서의 조선인학교, 일본인 학교 안의 민족학급의 3가지 형태로 분화해 나갔다.

그리고 이 중에서 어느 쪽에도 속할 기회를 얻지 못한 재일조선인 학생은 완전히 일본인과 전혀 구별되지 않은 교육을 일본인 학교에서 받은 것이 틀림없다.

이 전면 동화교육을 편의상 제4의 교육 유형으로 구분해 두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비합법적인 존재가 된 자주 학교의 재학 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재일조선인 학생은 일본의 공립학교 체제 속에 포섭되었다.

1947년 봄 이후 정책으로서 추구되어 온 재일조선인 학생의 취학 의무제는 1949년 가을 조선인학교 폐쇄와 그 일부 학교의 공립화, 학생의 일본인 학교로의 전학 조치를 통해서 제도로서 완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법으로만이 아니라 제도상으로도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권리는 박탈되었다.


●일본인 학교로 분산 전학

민족학급은 물론이고, 공립 조선인학교에서 행해지는 교육도 학생들에게는 이질적인 민족교육을 이중적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조선인의 형성을 위한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이 정도의 교육을 매우 불충분하며 오히려 거기에서 소외된 교육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민족학급은 일본인으로 되는 교육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조선인이라는 자각을 심어 주는 정도에 그쳐 조선인으로서의 실질을 형성하는 교육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하며 일본인과 비슷하게 성장해 가는 전면 동화의 길에 비하면,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획득하고 그 실질을 형성하기 위한 길의 입구에 설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질적으로 다른 작용을 하고 있었다.

자주 학교 재학 자만이 아니라 이처럼 이중 교육의 일환으로서 조선인 교육을 받는 학생까지 포함한다면, 1952년 4월 현재 민족교육을 받는 조선인 소·중·고교생의 총수는 1만7000명 남짓에 불과했다.

1948년 4월의 자주 학교 재학자 수만도 5만 명, 한신 교육사건 이후 1949년 4월 3만 5천 명에 비하면 학생 수의 감소는 현저하다. 특히 자주 학교 재학자 수에 한하면, 공립 조선인학교 재학자 7600명(단 1952년 1월 말 문부성 통계)을 빼고 민족학급 학습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자주 학교 1교당 평균 100명 전후로 본다면(예를 들면, 시즈오카의 조선인 소학교 78명, 가나가와의 조선인 중학교 221명, 오사카 및 효고의 조선인 고교 공히 50명), 그 수는 5000명 전후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1949년 가을의 조선인학교 폐쇄조치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가는 이와 같은 학생 수의 감소 측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통계상으로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 없어 그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숫자만 인용한 것인데, 1951․52년경에는 재일조선인 재학자 중 민족교육(앞의 세 유형 중 하나)에 접할 수 있는 학생은 전체의 약 2할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51년 4월 현재 문부성 통계(‘학교 기본조사 보고서’ 1961년도 판)에 의하면, 조선인 학생의 재학자 수는 소학교 7만273명, 중학교 1만5403명, 고교 2842명, 계 8만8524명으로 되어 있다.

단 여기에는 자주 학교 재학자 및 미취학 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해당 학령층의 실제 숫자는 더 많다. 이것과 자주 학교를 포함한 민족교육의 수강자 수(이 수는 1952년 4월 현재, 소학교 1만4204명, 중학교 2903명, 고교 571명)를 대조해 보면, 소·중·고 모든 단계에서 그 비율은 20% 미만으로 떨어진다.

나아가 시점을 다소 바꾸어 보면, 문부성 통계 8만8000명이라는 조선인 학생 수는 일본이 공립학교 체제에 편입되어 전면 동화든 이중 교육이든 동화교육을 받는 조선인 학생 수이다. 이에 대해 자주 학교 재학자는 추정컨대 약 4000~5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숫자는 조선 고교생 98명, 조선 중학생 1100명이므로 공립고등학교 재학자 2800명, 공립중학교 재학자 1만 5000명과 비교하면 각각 3%, 6%의 비율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학생들 간에는 대략 두 가지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그 하나는 재일조선인 학생의 95% 전후가 일본의 공립학교 체제 내에 편입되어 버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재일조선인 학생의 80% 이상이 전면적인 동화교육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 밖에 학령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취학하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이 같은 학생의 취학상황에서도 조선인학교 폐쇄령이 파괴적인 위력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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