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조선인 학교의 도립화(2)
도쿄도는 경상비는 내었어도 校舍·시설 개선비는 내려고 하지 않았다. 도립으로 된 것은 통제하기 위해서였고, 조선인 학교의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다음으로 조선인 교직원에 대한 차별 대우가 관철되었다. 조선인 교사는 전임강사 이상은 될 수 없고, 그것도 단규령(團規令)에 따른다고 칭해서 교사 정원의 1/4로 그 숫자가 제한되었다.
그러나 민족교육을 충실히 하는 데는 이것으로 부족하니까 다른 조선인 교사는 모두 시간강사로 근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도립 조선인 학교 15개 학교의 교원 구성은 1952년 11월 당시 교장―일본인 13명(분교장 겸무 1 및 중·고교장 겸무 1), 교유(敎諭)―일본인 63명, 전임강사―일본인 5명, 조선인 32명, 시간강사―조선인 54명인 것같이 분명히 민족 차별의 양상을 보여 왔다.
당연히 급여에도 격차가 있었지만, 조선인 학교의 일본인 교사는 특별히 3호봉 높게 급여를 받아 왔으므로 한일 교사 간에 임금 차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소위 조선인 교사는 박봉으로 견디면서 민족교육에 정력을 쏟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다가 학생들의 정원제 엄수라는 규정이 가해졌다. 1950년 당시에 정해진 학급 수를 고정하여 그 후 학생의 증가는 있었어도 학급 수의 증설, 그에 따른 교사 정원의 증원은 인정치 않았다.
이를 위해 예를 들면, 400명 8학급으로 발족한 도립 제1 조선인 소학교에서는 2년 후 학생이 500명으로 늘어났어도 8학급 편성은 그대로였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그래도 좋은 상태였고, 도쿄도의 태도가 고압화(高壓化)한 1954년경에는 도립 조선인 중학교의 정원은 250명이므로 그것에 맞추어서 지원자 550명 중 300명을 잘라내지 않으면 시업(始業)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도쿄도에서 통고했다.
학생 수에 따라서 학급 수를 정해 온 것이 학급편성의 원칙이지만, 일본인 학교는 이를 적용하면서 같은 도립의 조선인 학교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이를 파괴해 왔다. 도쿄도는 일본인의 아이들과 조선인의 아이들 사이에 배울 권리나 기회를 차별하였다고 해도 좋다.
●민족교육 지속의 주체
이상과 같이 도립 조선인 학교에 대한 동화교육 추진의 조직망과 교육 조건에 대한 민족적 피차별이라는 이중의 제약과 차별이 이루어졌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일본 측의 행정과 재정에 맞추는 그 바탕 위에서 교육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중의 차별 중에서도 동화교육의 차별이 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거기에서 외부로부터 가지고 들어온 동화교육에 항거한 민족교육을 어떻게 유지·창조할 수 있었을까? 도립 조선인 학교는 재일조선인에 의해서 이 시대에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존재한 것이다. 그렇게 한 교육의 주체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 기초적인 조건은 조선인 교사 집단을 확보했다는 것이고, 조선인 교사 집단이 실질적인 교육 활동의 주체로서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장·교사는 일본인, 전임강사·시간강사는 조선인이라는 차별적인 교원의 구성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교원 조직은 제도상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성격에 그치고, 실제로는 조선인의 ‘교장’·조선인의 학급담임·교원 조직을 구성하여 그것을 축으로 교육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인 교사 집단이 있어서 비로소 조선인 학생의 집단학습을 배태하는 이점이 생겨났다.
학생집단만의 존재로서는 민족교육의 유지는 바랄 수 없고, 오히려 교육 자체의 붕괴로 연결되어 갔다. 사실 오카야마(岡山)의 랜시마(連島)분교, 시모노세키(下關)의 타이헤이(太坪)분교의 경우 교사는 전부 일본인이고, 학생은 전부 조선인이라는 관계였는데 거기에는 교사와 학생이 적대 관계로 되어 있었다.
랜시마분교에서는 직원실에는 유리창, 난로가 있는데, 교실에는 유리창 한 장 없고, 북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서 수업을 하고 있었고, 교사는 조선어를 ‘선어(鮮語)’라 부르면서 학생들이 유리창을 파괴하는 것은 나쁘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양상이었다.
복도 벽에는 “폭력 교사 아지노(味野), 다카비(高日), 하라다(原田)를 추방하라!”, “경관은 학교에 들이지 마라!”는 전단이 학생 손에 의해 붙여졌다. 타이헤이분교의 경우에도 학부형회는 정치 활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해서 교장이 이를 만들지 않았다.
부근에 도난 사고가 발생하면 학교에 진정이 들어오고, 교사는 그것을 경찰에 연락하여 수업 중에도 상관없이 사건을 조사하는 일을 밥 먹듯이 했다.
1952년 겨울 이들 학교를 본 카츠다 모리카즈(勝田守一), 오타 다카시(太田堯)는 “교내가 너무 추워서 감옥 같다”라고 평하였다.
이 양 분교의 경우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학생의 대립은 일반화한 것은 아니고, 차별 의식에 사로잡힌 일본인 교사 집단과 민족교육을 제일로 생각하는 조선인 학생집단을 기계적으로 연결한 것이 필연적인 교육의 붕괴가 생기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책임은 일본인 교사 측으로 돌려졌다. 하지만 본 항의 문맥으로 본다고 하면, 조선인 교사 집단의 부재라고 하는 것이 조선인 학생집단의 교육을 파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 유무가 양 분교와 도립 조선인 학교 사이에 교육의 질을 분화시켜 왔다.
도립 조선인 학교는 지금까지 자주 학교로서 교사 집단의 손으로 운영되었으므로 도립화에 의해서 조선인 교사의 정원이 줄었고, 신분이 변경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각 교사집단이 와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 폐쇄 반대 운동을 도립화라는 불리한 상황으로 돌려 집단으로서 긴장도를 한층 더 높였다. 이것은 우선 도교위(都敎委)에서 임명한 일본인 교장을 임의로 조선인 ‘교장’으로 결정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학교 운영의 내실을 갖추어 갔다.
1950년 가을 가지이(梶井) 씨가 도립 제1 조선인 소학교[荒川]에 면접시험을 보고자 찾아 왔다. 그런데 한 젊은 조선인 교사가 나와서 “일본의 교장 선생님은 외출하셨지만, 조선인 교장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교장이 있다는 상징적인 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중에서 조선인 ‘교장’이 재학생의 교육을 실제로 주재한 입장으로 볼 수 있고, 일본인 교장은 그에 비해서 손님의 입장이고, 학교 일보다는 오히려 교위(敎委)를 상대하는 얼굴마담 같은 존재였다.
마찬가지의 상황이 일본인 교사와 사이에서도 발생하였다. 동화교육을 지향하는 교위의 교원 배치는 학생 교육의 실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민족 교과의 시간은 물론, 학급 경영, 학생 지도, 학부모와의 협력 등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조선인 교사의 활동이 필요했다.
“교육 용어는 원칙적으로 일본어라면 아무리 속박하려고 해도 조선인의 말은 조선어다. 자기들의 모국어로 토론하는 학급회의도, 일본인 교사가 담당해서 그 토론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라고 당시의 일본인 교사 자신이 지적한 것처럼 민족교육이 교내에서 살아 있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교 담임도 겉으로는 일본인 교사였지만, 조선인 교사와 한 조로 해서 실제는 일본인 교사의 손에서 벗어나서 조선인 교사가 맡았다. 학생 교육의 현실은 조선인 교사의 증원을 필요한 것이지만, 조선인의 전임(강사)은 정원의 1/4 이내라는 것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으므로 그 이상의 필요한 조선인 교사는 모두 시간강사로 해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도교위에 계속 반복해서 증원을 요구하여 간신히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조선인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와 거의 같은 수의 조선인 강사들이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조선인 강사는 교과 지도·학급 경영에서부터 가정 방문에 이르기까지 전임 교사 이상으로 많은 일을 했다. 수업 시간 수만 보아도 도립 제7 조선인 소학교[品川]에는 5명의 일본인 교사가 1인 평균 주당 10시간인데 비해 5명의 조선인 강사는 주당 20시간을 훨씬 넘게 맡았다.
그것만이 아니고, 3시가 되면, “자, 퇴근합시다”라는 일본인 교장의 말을 신호로 일본인 교사는 일제히 퇴근하는 습관이었다고 한다. 도립 조선인 중·고교의 경우도 일본인 교사는 주당 많아야 7, 8시간, 적은 자는 2시간이었다. 즉 실제의 교육 노동의 면에서는 일본인 강사와 조선인 교사라는 관계가 생겨났다.
이처럼 신분적으로는 강사이고, 따라서 저임금을 받았으나, 시간과 노동을 학교에 집중한 헌신적인 조선인 교사들의 집단 활동, 그 자체가 오히려 교내의 동화교육 조직과 기능을 공동화(空洞化)시켰고, 민족교육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기초였다.
조선인 강사의 담당 시간에는 조선어를 교수 용어로 하여 사용하였고, 또 민족 교과의 시간 수를 확대해서 도교위의 동화교육 교육과정을 대폭 축소한 것이 되었다.
도립 조선인 학교에서 동화교육과 민족교육의 상극은 이상과 같이 이중의 교원 조직으로 해서 현재화(顯在化)했지만, 거기에서 조선인 교사 집단이 교육 활동의 실제적인 주체가 되었다.
이들에 의해서 동화교육의 침투를 최소한 저지하여 민족교육을 이루어져 간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인 학부모 집단이 직접, 간접으로 교사의 활동을 지탱해 갔다.
조선인 강사로 생활을 해도 도쿄도에서 받는 시간강사 급료만으로는 최저 생활비의 반도 충당되지 않으므로 그 부족분은 PTA 회비에서 보충해 주었다. 그러니까 PTA 회비는 일본인 학교에 비해서 많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일본인보다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부득이하게 내는 조선인 학부모들의 생활을 더욱더 괴롭게 하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경제적 이유에 의한 퇴학생을 만들어 내는 곤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경제적인 곤란을 견디면서 조선인 교사를 뒷받침해 준 것도 “우리는 지금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민족에게 책임을 지고 싶다. 우리 몸에서 인간성이 사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라는 피 동화의 체험을 가진 부모님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학부모도 교사도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통적이었다. 이와 같은 굳은 결의를 가진 조선인 학부모가 PTA를 집단으로 하여 결집·존속될 수 있었던 것도 도립 조선인 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지속시킬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도립 조선 고교 PTA 회장의 말이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맺고 있다.
“민족교육을 빼고서는 조선인의 교육은 없다. 젊은이들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나는 긍지와 희망 속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법을 오랜 노예 생활 속에서 배웠다 배웠다”라고 하는 말로 맺고 있다.
미국 침략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조국 조선 인민의 자세에 자극되어 그 형태는 달라도 같은 침략(동화교육 체제)을 받는 자로 그것은 한층 더 불굴의 결의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교사와 학부모의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에, 바로 학생집단도 조선인으로서 학습하고, 살 수 있는 태도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다.
말하자면, 도립 조선인 학교에서 조선인 교사·학부모·학생으로 이루어진 조선인 교육집단이 실체적으로 유지되었고, 그것이 광복 후에 형성된 민족교육의 전통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쉬는 유기체가 되었다. 그것이 동화교육 체제하에서 민족교육을 지속시킬 수 있던 주체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