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에 대해서/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鈴鹿醫療科學大學)
[동양일보]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일본에 존엄 개념은 있는가?” 한국에 계시는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에게서 스마트폰으로 이렇게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날(2020년 11월 3일)은 마침 가을의 훈장수여자 발표의 날이었다.
‘존엄’과 관련해서 기억의 밑바닥에서 뇌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반세기 전, B29 폭격기에 의한 도쿄대공습(1945년 3월 10일)을 강행한 미국 군인에게 일본정부가 파렴치하게 훈장을 수한 일이다. 사망자의 ‘존엄’을 국가 스스로 모독한다는 믿기지 않는 어리석은 짓으로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차별 폭격을 지휘하고 도쿄를 초토화시키고, 일반시민 10만여 명을 태워 죽인 공군사령관 커티스 르메이(Curtis E. Lemay)에게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은 전후 항공자위대 육성에 공적이 있었다고, 1964년에 서품 최고급의 훈 일등 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수여했다. 되도록 수많은 일본인을 죽일 수 있도록 일본 가옥용으로 특수 가공한 소이탄(燒夷彈)을 사용해서, 노인이나 아동이나 할 것 없이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잔학하기 짝이 없는 책임자에게, 최고급 국가훈장을 준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기나라 국민의 ‘목숨’은 미국에 아부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안했던 것이다. 제2차대전 후에 유대인이 유대인 멸종정책을 주도한 힘러(Heinrich L. Himmler)에게, 중국인이 난징대학살의 책임자인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에게, 그 후의 공헌을 이유로 희생자 측에서 훈장을 준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사망자의 ‘존엄’과도 관련된 이 중대한 도착(倒錯)· 배신행위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표면적으로는 불문에 부쳐지고 있다. 여기에는 패전국의 전승국· 미국에 대한 촌탁, 비굴한 추종으로 왜소화시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몇 십 년 동안 일본정부는 20세기말 미국과 영국 주도로 추진되어 와서 오늘에 이르는 신자유주의· 경제지상주의를 재빨리 추종하고, 약자를 잘라버리는 정책으로 격차사회를 출현시켰다. 코로나19 사태에서는 세계적으로 약자 특히 고령자와 빈곤층의 사망률이 높지만 경제 최우선의 일본정부에는 르메이 서훈 이래의 전통인지 국민의 ‘목숨’을 경제의 희생으로 삼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제지상주의 사회에서는 ‘목숨’은 경제의 하위개념일 뿐이다. 인간의 ‘존엄’은 무엇보다 먼저 ‘목숨’과의 관계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범죄자의 ‘목숨’을 빼앗는 생명형 ‘사형’은 선진국에서 사형 제도를 존치(存置)하는 나라는 일본과 미국의 일부의 주뿐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사형폐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독일의 본대학에서 법학박사가 된 호세 롬파르트(José Llompalt) 조치대학(上智大學) 교수는 사형폐지 논자이면서 인간의 ‘목숨’은 인간의 ‘존엄’만큼의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다. 현행제도에 사형제도와 정당방위(이것이 인정된 경우 사람을 죽여도 범죄로 취급되지 않는다)가 존재하듯이, ‘생명’은 무조건적으로 존중될 수 없다고 한다. “존엄을 가지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존엄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존엄과 국가의 권력人間の尊厳と国家の権力> 1990). ‘존엄’을 최상위에 두고 ‘생명’을 하위개념으로 보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적어도 메이지시대 이전의 “꽃은 벚꽃,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에도시대 사무라이 사회에서는 무사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은 ‘명예’라고 등가치이었다. “이름을 더 아껴라”는 생각으로 ‘목숨’에 대한 집착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반면에 당시 많이 알려진 센류(川柳)에 이르기를 “앞잡이를 할미가 앞질러도 조용하네” “다이묘(大名)를 둘로 가르는 산파”라는 것이 있다. 다이묘 행차를 가로막기만 하면, 서민은 즉각 참살(斬捨御免)을 당해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히캬쿠(飛脚; 우편물 배달자)와 또 하나, 산파(子安婆; 조산원)는 다이묘 행차의 앞잡이의 눈앞을 가로질러도, 다이묘 행차가 이어지는 도중에 비집고 지나가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에도시대 봉건사회는 무사의 ‘깨끗한 죽음’을 찬양한 한편, ‘목숨’의 탄생에 관여하는 일을 하는 인간을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대법원 판사를 역임하고 사형폐지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이며, 롬파르트 교수와도 친교가 있었던 형법학자인 단도 시게미쓰(團藤重光)는 사형에 대해, ‘인간의 존엄’을 거부하고 ‘생명권’을 제한하는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사형은 인간 누구나 가지는 ‘인간적 재생의 가능성’, ‘무한의 인격형성 가능성’을 영원히 빼앗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인간의 존엄 개념에 비추어도 수치스러운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국민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사형제도의 존폐에 관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형용인 의견이 항상 다수를 차지한다. 최근의 내각부(內閣府) 여론조사(2015년 11월 실시)에서도, 사형반대 의견이 9.7%인데 반하여, 용인 의견이 80.3%라는 수치도 있었다. “죽음을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여긴다.”고 호언한 무사사회의 흔적, 혹은 국민대중이 소박한 정의감의 표출로 보아야 할 것인가?
사형제도의 영구존치를 주창하는 행형사(行刑史)의 제1인자인 시게마쓰 가즈요시(重松一義)는 ‘인간의 존엄’의 입장에서 그것을 담보하는 ‘영원한 증명’이 바로 사형제도라고 하는 단도와는 정반대인 결론을 끌어낸다. 사형제도는 “오직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스스로를 짐승과 구별하는 자랑스러운 영구불변의 제도”이며, “누름돌이자 스스로의 경계함, 인류의 예지”이며, 또한 ‘인간의 존엄’의 표시이다. 신처럼 원숙하지 못하고, 적절한 자기제어능력도 결여한 현재 인류에게 사형제도는 인류에게만 부과된, 인간의 자율성을 묻는 영원한 과제”, “인간의 진가(眞價)를 묻는 것”으로, “항성과 같이 영구히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사형제도 영구필요론死刑制度永久必要論> 1995).
똑같이 ‘인간의 존엄’의 입장에 서면서 단도가 ‘목숨’을 중시하는 데 대해, 시게마쓰는 ‘죽음’에 중점을 둔다. 여론조사 결과에 나타난 국민의 사형찬성의 감정도 시게마쓰와 마찬가지로, 범죄자의 ‘목숨’이 아니라 ‘죽음’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인간의 존엄’은 그러나 ‘죽음’이 아니라 ‘목숨’에 초점을 맞춰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사형폐지논자로 단도가 자주 언급하는 한 사람으로 알베르 까뮈가 있다. 까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아버지가 목도한 공개처형 견학 후의 모습을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여러 번 썼다. 고용주 일가 5명을 잔혹한 수단으로 학살한 극악인의 처형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들어가고 일어나서는 몇 번이나 구토했다. 그렇게 오전 내내 “구토하고 구토했다”고 한다. <이방인>이나 유작이 된 미완의 자전적 소설인 <최초의 인간>등 세 작품에 같은 내용을 쓴 데서 보아 사실일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강제로 단절되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의 “구토하고 구토했다”는 행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목숨’에 대한 인간만이 가지는 특수한 반응이다. 과연 모든 생물 속에서 이러한 행동을 인간 이외의 무엇이 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유해한 자(비정한 고리대 노파)와 선량한 자(그녀의 여동생)를 동시에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가 연인 소냐에게 살인을 고백한다. “나는 할머니를 죽인 게 아니야! 나는 단숨에, 영구히, 자기를 죽여 버린 거야! 이제 질렸어! 나를 내버려 줘!” 몸을 가르듯한 절망감.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비도한 폭력으로 빼앗은 까닭에 인간이라는 “존엄을 선천적으로 지닌 존재자”에서 “존엄을 스스로 던져버린 인비인(人非人)”이라는 사람 아닌 존재로 전락되고, 절망과 끝이 없는 허무감에 시달리는 극심한 고뇌와 정신의 착란. 인간의 ‘목숨’을 강제로 파괴· 박탈한 자에게 내려진 궁극의 ‘벌’이 바로 그것이었다.
소설에서 말해진 그들의 반응은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불리는 것인데, 현행 재판원(裁判員)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일반시민에도 똑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아도, 인간에게 고유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 존재하고 있다는 둘도 없는 가치, 그 대상이 되는 개념이 ‘인간의 존엄’이라고 한다면, ‘존엄’ 개념의 근저에 두어야 할 것은 ‘목숨’이다. 인간으로 생을 받게 되고, 존재의 우연성, 불가역적이고 교체 불가능하고, 딱 한 번만의 ‘목숨’에 대한 존엄 없이는 ‘인간의 존엄’따윈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피처로 활약한 에가와 스구루(江川卓)는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 어렸을 때 아껴 키우던 닭이 나중에 식육용으로 잡아먹혀버렸다. 이때의 충격으로 “평생 닭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맹자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소리(죽임을 당할 때의 슬픈 울음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한다. 그래서 군자는 부엌간을 멀리한다.”(양혜왕梁惠王 상上). 동물의 생명박탈에 대한 생리적 충격과 거부반응, 하물며 인간의 ‘목숨’에 있어서랴!
2.26 사건(1936년 일본 육군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반란사건-옮긴이)으로 인하여 육군 장교의 아버지를 통해 친교를 맺었던 많은 청년장교가 형사하는 것을 보게 된 시인 사이토 후미(齋藤史)는 유명한 노래를 읊었다. “죽음 측에서 초명하면 더욱 빛날 새빨간 생(生)이 아닌가.” 생물 일반은 삶이라는 입구에서 들어가고 죽음이라는 출구로 나아간 반대는 없다. 그러나 출구(죽음 측)에서 입구(삶 측)를 되돌아볼 때, 거기에는 입구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치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것은 밝게 빛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목숨’이다. 저명한 조산사인 우치다 미치코(內田美智子) 씨에 의하면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다. ‘태어나지 않음’이다(2014년 11월 7일 아사히신문 조간). ‘인간의 존엄’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우발성(偶發性), 곧 138억년의 역사가 새겨진 대우주의 최고걸작인 ‘목숨’을 받아서, 그 존엄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인간─ 여기에 의논의 기본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목숨’을 스스로 멸망시키는 자살은 부정된다. “자살하는 사람은 무력한 정신의 소지자이며, 자기 본성과 모순되는 외부의 원인에 의해 철저하게 꺾인 사람이다.”(<에티카>, Ⅳ 정리 18). 스피노자의 말은 ‘목숨’의 진실과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은 오늘날의 ‘안락사’와 ‘존엄사’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인 ‘안락사’는 일본에서는 합법화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소극적 안락사(담당의사의 판단, 가족의 동의에 따른 의료행위의 중지)는 인정되어가고 있다. 자기결정에 의한 ‘존엄’ 있는 죽음, 곧 자신의 의사로 연명조치를 중지시키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맞이하는 ‘존엄사’도 환자 본인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권리’로 합법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근대 특유의 ‘생명지상주의’에 의해 무조건 연명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행위, 예를 들면 스파게티 증후군으로 야유를 받는 위루술(胃瘻術; 위에 직접 튜브를 놓고 영양을 주입시켜서 연명하는 치료법) 등에 대한 의문· 비판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일본에서도 칸트적인 존엄 개념에 의거하고, 세계의 추세에 보조를 맞춰서 안락사, 존엄사가 합법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의 ‘목숨’은 결코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人間-세상살이)으로서의 인간은 가족· 친구· 아는 사람· 직장 동료· 기타 여러 가지 관계자와 ‘목숨’을 공유하고, 게다가 예전에 존재하던 무수한 선조들의 ‘목숨’을 계승하고 있다는 2중의 ‘관계성’ 속에서, 삶을 얻어서 생명활동을 영위한다. 모든 생물에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경우는 이러한 ‘관계성’의 정도· 상호 의존도가 다른 생물보다 더더욱 견고한 것과 동시에 강대하고 특수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존엄사· 안락사는 근대의 서양적인 존엄개념, 칸트적인 자율· 자기결정 개념으로는 당연한 권리로 여겨진다. 과연 그럴까? 자살을 포함하여 이것들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 예뻐해 주신 할아버님과 할머님, 친하게 사귀어준 친구와 지인─ 그들은 과연 그것을 허락하고 허용하고 기뻐해 주겠는가? 더욱이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결코 소생할 수도 없고, 황천(黃泉)에서 주무시고 천상(天上)에서 지켜봐 주시는 조상님들이라면, 스스로 ‘목숨’을 단념하는 단려(短慮)함을 꾸짖으면서, 제발 되도록 ‘목숨’을 다해 달라, ‘목숨’을 포기하지 말라고 간절히 바라고 말을 걸어주려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