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연 병무청 차장
[동양일보]“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편전은 왕이 편히 쉬는 곳이라며 편전 밖에서 사초를 기록할 것을 명한 조선 태종에게 사관(史官) 민인생이 한 말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관은 오직 사실만을 기록하기 위해 ‘직필(直筆)의 원칙’을 지켰다. 당시 7~9품의 하위직이던 사관들이 임금의 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역사를 지켜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역사는 없다. 그러나 진실한 역사에는 언제나 힘이 있다.
부끄러운 역사를 통해 반면교사의 자세를 가지게 되는가 하면, 위기 극복의 역사를 스승 삼아 어려움을 헤쳐나갈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사초를 기록한 사관들이 지켜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선조들이 미래 세대에 전하는 피땀어린 가르침이기도 하다.
사관들이 ‘직필’을 소명으로 삼았던 것은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역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병무청은 올해 창설 50주년을 맞아 『병무청 50년사』를 발간하여 지난날의 공(功)과 과(過)를 돌아보았다. 병무청의 역사는 위기 극복의 연대기이자, 공평무사한 병무행정을 향한 끝없는 마라톤이었다.
사실 병무청은 그 시작부터 위기 속에서 피어난 조직이었다.
1960년대 말 병역비리가 다수 발생하면서 국가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는 병무행정에 심대한 위기가 찾아왔고, 이에 정부는 1970년 8월 20일 병무청을 창설하여 공정하고 전문적인 병무행정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후 병무청은 병역면탈을 근절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병무사범 단속을 강화하고 처벌 규정을 강화하였으며, 사회지도층의 병역이행을 중점 관리하였다. 하지만 1998년 질병을 가장한 병역면제가 다수 적발되어 국민에게 다시 한 번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뼈아픈 위기는 혁신의 발판이 되었다.
징병검사전담의사 제도를 도입하여 책임성을 확보했으며, 중앙신체검사소를 신설하여 병역처분 2심 제도를 확립했다. 또 검사 전 과정을 전산화해 인터넷으로 공개하는‘징병검사 신(新)시스템’을 구축하여 투명성을 강화하였다. 이후 특별사법경찰제도, 디지털포렌식 수사기법 등을 통해 나날이 지능화되는 병역면탈 범죄에도 적극 대응하고 있다.
인구절벽, 4차 산업혁명, 코로나19와 같은 병역환경의 변화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를 안고 병무청의 문을 세차게 두드릴 것이다.
그러나 병무청에는 최고의 스승이 있다. 바로 지난 50년의 역사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혁신을 거듭했던 병무청의 역사를 스승 삼아, 성장을 위해서라면 고통스러운 변화일지라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누군가 이러한 뜻에 거스른다면, 언제든 당당히 이야기하리라.
“병무청 위에는 국민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