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일본인 교사의 분화
조선인학교 도립화 방침에 따라 그곳도 신임 일본인 교사가 파견되었다. 그곳에는 권력에 의해 근절되지 않는 조선인 교육집단이 존속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인 교육집단은 권력과 구별되는 인민의 자세를 일본 국민에게 갈망하고, 먼저 같은 장소에서 일할 일본인 교사 양상에 대해서 엄격한 주문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PTA(학교운영위원) 회장은 “인간을 기르는 당신들 교육자에게는 우리와 같은 체험이 없어도 그러한 것(민족의 긍지와 희망 가운데서 인간은 인간으로 된다―인용자 주) 정도는 알 따름이다 (머리가 법규로 가득한―인용자 보). 관리에게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당신은 교육자의 자격이 없어”라고 일본인 교장에게 추궁했다.
관리자(권력)와 교사의 준별을 일본인 교사에게 기대하고, 교사라고 하면 조선인에게서 동화교육을 배제한 민족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이유가 납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점에서 먼저 일본인 교사에게 일을 하게 한 것은 같은 교육자의 입장에 선 조선인 교사였다.
1949년 말부터 1950년 3월에 걸쳐서 부임한 일본인 교사에게 민족교육의 도리를 얼마나 열심히 설득하였기 때문에 그동안 대부분의 수업을 뒤로 미루어야 할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4월부터 교단에 선 일본인 교사로부터 날마다 그 영향을 받은 학생들에게도 직접 공작에 나섰다. 그것은 일본 교사 당사자로서 그것은 필연적인 사항이었다. 이렇게 해서 도립 조선인학교 시대를 통해, 이 학교에서 일하는 일본인 교사의 교육 자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조선인 측에서 끊임없이 힐문 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서 일본 교사는 민족교육을 계속 비난한 자와 그것을 이해한 자로 나누어지고, 그들은 이에 의한 행동을 취해 가게 되었다.
1949년 말부터 1950년 봄의 신학기에 걸쳐서 도립 조선인학교에 부임한 일본인 교사들은 도내 공립학교 취직하기 위한 발판으로 취임한 자가 많았고, 그들의 대부분은 “조선인 자녀들의 교육에 특별한 의욕이나 신념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모두 재일조선인 자녀들을 일본인으로 하여 교육한 것을 자연적으로 인식해 온 교사이고, 그것이 또 당시 일본인 교사 전반의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처지에서 보면, 도립화와 함께 조선인학교는 일본 국가에 기준으로 되었고, 일본인 교사는 동화의 앞잡이로 파견된 듯이 보였다.
“선생님, 우리는요 일본인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모두 우리 학교를 부수어 버린 문부성이나 교육위원회의 스파이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요”라고 하는 이야기는 가지이(梶井)선생이 한 학생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이 교내에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거기에서 일본인 교사가 소위 ‘규탄’이라고 이름을 붙인 학생으로부터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재일조선인 학생 중에서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을 발견하라고 강요당한 것이다.
지도주사(장학사)로부터 “일본어로 일본 글자를 가르쳐라”라고 이야기를 들어온 일본인 교사들은 이 학교에서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을 희망하는 이질적인 교육 세계에 부딪히고, 이에 부응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화교육에 대한 저항이 학생 집단으로부터 직면하게 된 것은 식민지를 제외한 일본 국내의 교원사에 있어서 역사상으로는 첫 경험이었다. 일본인 교사는 재일조선인 자녀들에게 있어서 ‘스파이’는 아니고, ‘교사라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하는 문제를 자각적인 생각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다.
학생들의 추궁은 앞장에서 소개한 시로타(代田) 씨의 경우와 같이 과거와 현재의 동화교육에 대해서 일본인 교사가 가진 견해에 대한 시비를 밝힌 것이었다. 그것도 깊이 파고들면 “선생님, 조선어를 알지 못하면서 진정으로 조선인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공통된 질문으로 집약된다. 학생들이 “이름을 본명으로 불러 주십시오”라는 요구도 그 제1보의 표현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는 자주 학교 폐쇄 직후의 사태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정부 비판이나 교사를 비난하는 말로서 그 진의가 표현된 것이었다. 이시카와(石川) 씨가 전한 바에 의하면 “선생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이 학교에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모가 세운 학교를 마음대로 공립으로 바꾸어서 수업을 일본어로 하도록 명령해도 “우리는 조선인입니다. 왜 조선어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선생님은 도청의 방침에 찬성하는 것입니까?”라든가, “일본의 선생님을 근무하게 하려고 조선의 선생님을 많이 그만두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인 선생님을 내쫓은 것입니다”라든가 그 외에 교실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나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일본인 교사들에게 들이대었던 것이다.(石川, 교실의 한구석에서 <평화와 교육> 1952년 12월호)
일본 교사에게는 이와 같이 학생으로부터 정면에서 집단으로 비판된 것은 예상도 못 한 것이었고, 또 지금까지 체험한 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사는 감정적으로 반발하고, 방과 후 종종 자신들만의 모임을 하고 결속을 다졌다.
그것에 의한 사항은 정치적 교육 본질을 주시한 것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와 같은 도립 조선고등학교(朝高)의 한 일본인 교사는 미공개된 수기 중에서 학생의 ‘반일분위기(反日 色)’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외 없이 어느 학급에서도 학생들은 선생에게 부임의 포부 등을 따지듯이 질문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라도 하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호되게 몰아쳐 더 이상의 말을 못 하게 만들어 입을 막는다. 이 규탄에 대해서 일본인 교사로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골치 아픈 것이었다. 결국, 처음 부임한 교사들은 공동의 고민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대책을 상담하게 되고, 십 수명이 모여 하나가 되어 서로 비호해 주게 되었다”고 이 일본인 선생은 특히 강경한 어조로 “학생에게 이와 같은 일을 그대로 묵인하게 되면, 도량이나 시야가 좁은 인간을 만든 것이 된다”라고 “조선인 측에서의 반성”을 촉구했다.
학생들의 비판을 교사 ‘규탄’으로 느끼고, 동화교육 고발을 반일 의식으로 받아들여, 조선인 학생들을 정치 주의적인 학생으로 간주하였다. 학생 전체의 민족적·정치적인 편견을 심화시키는 이러한 경향은 도립 시대를 거쳐서 일본인 교사의 일방적인 것으로 포착해 버린 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교사의 처지에서 보면, “다소 영합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본인 교사들이 나왔다. 소위 ‘규탄’을 “우리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교육에 대한 성실함을 확인하려는 학생들의 더욱 엄한 저항”으로 받아들이고, “조선인 교육이라는 것을 이해하자”라는 다른 대응의 방법이 생겼다.
학생들의 추궁은 조선인으로서 생존을 건 것이다. 교육적 진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편견에서 벗어난 견해의 태동이었다. 가지이(梶井) 씨의 경우, “조선어도 못 하는 주제에 어떻게 조선인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며칠이나 머리에서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나 자신은 과연 이 학교에서 교사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머리에 꽉 차 있었지만, 생각한 나머지 겨우 도달한 결론은 학생의 요구는 올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학생의 요구를 채워 주지 못한다면 미련 없이 손을 떼는 방법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조선어 학습을 비롯한 과학의 교안도 조선어로 번역해서 학생에게 필기하게 하면서 조선어를 습득하는 노력을 다했다. 이러한 것에 의해서 가지이 씨에게는 학생의 움직임이 신변에 느껴지게 되고, “지금 자신은 외국인 교육을 하는 것이다”라는 의식이 싹텄다.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을 알게 하여 그 아는 것을 통해서 이후 동화교육의 가해성(加害性)을 인식해 온 과정이 그 후에 보였다.
이와 같이 학생 집단으로부터의 비판은 일본인 교사와의 사이에서는 조선인 재학생의 교육을 동화교육의 대상으로 계속 보아 온 층과 외국인 교육으로 간주한 그룹과의 분화를 만들어 냈다. 분화된 일본인 교사와의 사이에서 대립이 생겨났고, 서로 다른 조선인학교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조선인 학생 관이 형성되어 인계되었다.
예를 들면 같은 교사의 사랑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변하지 않은 교사의 처지에서는 “교사가 학생에 대해서 아무리 애정을 갖고 사랑으로 접근해도 학생 편에서 볼 때 무엇인가 일본인 교사에게는 차별적인 태도가 보이는 것이 보통이고, 일본인 교사로서는 매우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고 학생으로부터의 고립을 한탄했다. 이것을 “대개 일본인을 백안시(白眼視)”한 조선인의 경향으로 탓한 것으로 보았다(앞의 수기에서).
한편 가지이 씨는 고양이라고 별명이 붙어서, 아이들과 친근하게 되었다. 그가 조선어를 배운 것도, “내에게는 학생들이 언어 문제로 나를 규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단 조선인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무엇이 최소한의 양심을 표하는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는 내 눈앞에서 모국어를 빼앗긴 사람들이 지금 그 공백을 되찾기 위해서 피가 스미는 듯한 자세로 노력하는 모습을, 그 국어를 강탈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한 교사로서 침묵하면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라고 하는 이유이고, 그것이 교사로서 그의 양심 있는 표현이었다.
재일조선인 자녀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민족교육이 갖는 교육적인 가치를 알게 된 일본인 교사들은 조선인 교육집단과 새로운 협력 관계를 만들어 내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선생들은 우리들의 일을 좀 더 알고 싶어 한다. 조선어는 알지 못해도 이름 정도는 조선어로 읽을 수 있도록 하시오”라고 하는 조선인 교사의 호소하는 대답으로, 조선어나 재일조선인들의 인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 한일 관계의 역사적 진실을 배우고 민족 평등의 견지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것과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민족교육 추구의 현실을 연결해가는 과정에서 재일조선인 교육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인식을 해나갔다.
그리고 바라는 교육내용으로 (1)교수 용어는 조선어여야 할 것 (2)조선어에 의한 교과서의 작성과 자유로운 사용 (3)교과 중에서 조선어를 가장 중요시할 것 (4)모국의 역사와 세계사의 학습 (5)사회와 지리에서 조선을 학습 (6)예술교육, 과학교육, 평화교육의 추진 등 내실을 갖춘 구상을 하였다. 분명히 정부의 동화교육 정책과 대립한 교육 인식이다.
이러한 재일조선인 교육의 자주성에 대한 존중의 자각은 오히려 이들 일본인 교사의 노력과 조선인 교사의 활동을 최대한으로 보장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립 조선인학교 교직원 조합의 결성(1950년 12월)은 그 중요한 성과였다.
조선인 강사도 포함된 이 조합은 조선인의 활동이 비 합법화된 한국전쟁 시대에 “전국에서 유일의 조선인 교사들의 합법적인 투쟁의 장”이 되고, 민족교육의 보장과 충실을 목표로 해서 한일 교사가 함께 손을 잡고 싸우는 조직으로 되었다. 도립 조선인학교의 존폐가 문제가 되고 나서부터는 중핵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 이들 조합원 교사들은 전국교연집회에 재일조선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일본의 교원 운동 및 교육 연구 운동과 재일조선인 교육을 연결하는 단서를 열게 되었다.
이에 반해서 다른 한편으로 일본인 교사는 동화주의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학생들에 대해서는 “조선인은 열등 민족이다”라든가, “조선인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라는 발언을 하여 학생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그 후에 두 명의 교사는 “조선에 대한 과거의 식민지 교육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해서 학생들로부터 추방 운동이 있었다.
이들 교사는 또 “조합에 들어가면 전근이 될 수 없음”이라고 하는 장학사나 교장으로부터의 압력에 못 이겨 조합을 탈퇴함과 동시에 학생들은 그 비판을 수업 방기로 답했다(1952년 10월, 조합 탈퇴=수업 방기 12명, 조합 잔류 14명).
이러한 교사들은 “조선인학교에서 김일성의 초상화를 걸고 매일 공산주의 교육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장단을 맞출 수 없다”라는 명분을 내걸고, 권력이 조선인학교를 비난하는 스파이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 교사들의 분화는 처음부터 학생 집단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측의 비판을 받고 생겨난 것인데, 일본인 교사들에 대해 또 하나 고려하지 해야 할 점은 도교위(都敎委)와 그 밖의 존재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가지이 씨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은 건드리면 시끄럽지만, 그것은 잠깐의 고통이다. 1, 2년 지나면 다른 공립학교로 옮겨 준다. 어차피 저 학교는 여기서 2, 3년의 운명이니까”라고 장학사에게 이야기를 듣고 부임, 언제나 관리자로부터 조선인 교사에게 협력하면 다른 공립학교로 전근될 수 없다고 주의받는 상황에 일본인 교사들은 처해 있었다.
따라서 빨리 조선인학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원하는 교사일수록 이와 같은 관계를 이용하는 압력에 굴복하기 쉬웠다. 조합에 대해서도 교장이 일본인 교사만 모인 회합에서 “조합도 좋지만, 그들에게 이용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오”라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합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신변상 안전하게 된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욱이 경찰도 조선인학교 정문 형사를 두고 미행하거나 귀를 기울이고 끊임없이 조선학교의 동향,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교사의 협력 상황을 탐색하였기 때문에 그 시선에 신경질적일 정도로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지이 씨도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교육장이나 경찰서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을 교장에게 전해 들은 경험이 있다.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는 다른 일본인 학교의 교사 이상으로 직접적 또는 일상적으로 정부의 권력 기관으로부터 감시와 압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은 항상 민감하게 인식하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인 측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러한 권력 기관으로부터의 간섭에 맞서, 예를 들면 타교로 전근과 같은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첫째로 하는 한 학생들의 비판을 피하고, 권력의 의향에 영합하던가 무사안일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길밖에는 없었다. 민족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동화교육에 대한 비판 정신을 갖출 수 있는가는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첫째로 둘 것인가 어떨 것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