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일본인 교사의 분화(2)
객관적으로는 일본인 교사도 동일한 가해자로서 조선인학교에 들어왔다.
그러나 일단 학교에 부임하여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교사에게 가하는 비판(동화교육)을 성실히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가, 가해자의 자리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교사가 될 것인가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 가해자로 남는 자는 조선인의 민족교육을 계속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앞서서 그것에 반발하고 도중에 탈락, 혹은 비난하는 말을 계속 던졌다. 한편 가해자에서 교사로 옮긴 자는 같은 현실에서 민족교육의 본질을 배우고 일본 정부의 억압 정책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을 결단하고, 일본 정부의 비교육적인 처사에 대해 공격하여 계속 맞싸웠다.
일본인 교사는 가해자와 교사 두 종류로 분화되어, 전자는 조선을 적대시하는 자이고, 후자는 조·일연대로 그 입장을 정했다. 후자는 조선인 교육에 눈뜨게 됨으로써, 이는 일본 교원 사상(史上) 동화교육을 비판하는 敎師 群像을 새롭게 형성한 선구적인 창조자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의 상황이 아이지(愛知)현의 공립분교(松實賴一의 여러 기록)와 오사카의 이마니시리(西今里)의 중학교에서도 보였다.
●동화교육과 민족교육의 모순 지속
도립 조선인학교의 내부에 조선인 교육집단을 유지하고, 아울러 일본인의 조합원 교사와의 협력 관계를 형성한 결과, 거기에서 동화교육 조직을 공동화(空洞化)시켜가면서 민족교육의 대폭적인 실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실시는 여전히 동화교육 강요에서 오는 여러 가지 장애와 맞부딪히면서 추진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있는 조선인 교육집단은 언제나 ‘인간으로서 가능한 최고도의 긴장을 요구’해 왔다.
‘학생에게도 조선인 교사에게도 교육의 장에서 필수 불가결한 경제적·정신적인 안정은 얻을 수 없다’ 그 압박에 고민하면서 가르치고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 조선인 교원은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수기에서 교육을 불안정하게 한 원인을 4가지로 간추려서 들고 있다.
첫째는 일본에서 조선인학교의 경우 ‘어려운 교육 사업을 아무런 경험도 없는 비전문가들이 국가적 사회적 지도 없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가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미·일 지배자에 의해 조국과의 교류가 끊어진 데 있다.
둘째는 이들 지배자에 의한 민족교육 억압 정책이 교육의 안정을 방해하였다. 일본의 위정자가 민족교육을 ‘적대시하고, 권력자에게 말하여 이를 파괴하는 일에 종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육 사업을 수행해 가는 것 이상으로 그 교육을 지키기 위해 대부분의 정력을 쏟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재일조선인 생활의 기반이 파괴되고 있는 점’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공부보다 어떻게 해서 통학 정기권을 살 수 있으면 좋을 것인가가 고민이고, 교사는 ‘빌린 돈을 갚는 것’이 고민되었다.
네 번째는 ‘한국전쟁의 일본에 의한 반영(反映)’으로 정치적 탄압과 불합리한 강제 송환의 위협을 밤낮으로 시달렸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조건 가운데서 이루어진 교육 활동이 교사나 학생도,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 최고도의 긴장을 요구하였지만, 이와 같은 조건이야말로 참된 인간을 만들고, 진실한 인간으로 된다는 희망과 확신만이 우리를 지탱해 준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적극적으로 살고자 하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교사들의 고민은 또,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공유되고 있었다.
도립 조선인학교의 학생은 분명히 민족교육을 받는 만큼 분명 다른 일본인학교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들보다 많은 은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혜택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큰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고통의 중심에는 앞에서 언급한 피압박의 정치에 굴하지 않는 것에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일본인’으로 있는 것과 ‘조선인’으로 사는 것과의 모순에서 매일 부닥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두 개의 가치체계의 일상에서 학생들 살아가고 있었다. 즉, 2개의 언어와 문화가 상극하는 한가운데서 학습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 사회에서의 생활과 학교생활과의 격리 위에 학교에서도 이중 교육 체계가 병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립 조선인학교의 학생이 안고 있는 가장 큰 교육 내용적인 모순과 고통은 일본어로 생각하고 느낀 내적 성장 과정을 얼마나 깨뜨리고, 조선어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가에 있었다. 동화교육과 민족교육의 저항은 정치의 차원에서 늘 표면화되었지만, 개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언어와 사고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어떤 조선인 교사는 ‘계획적인 교수 진행이 될 수 없다’라는 원인으로서 ‘교수 용어=조선어에 대한 이해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귀에 들어온 모국어를 일단 일본어로 바꾸어서 이해하는 학생들이 많은 점’을 들고 이것이 학생들에게도 학습에 ‘큰 짐’으로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모순은 초등학교일수록 크고, 또 중·고의 경우에는 일본인 학교에서 편·입학해 들어온 학생일수록 컸다. 전부 조사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전체적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1954년 가을의 아라카와(荒川)구와 고토(江東)구의 도립 조선인 초등학교 아동을 조사한 보고에 의하면, 고토구의 제2 조선인 소학교 아동 187명 전원이 ‘일본 태생’이고, 아라카와구의 경우에는 593명 중에서 95%의 아동이 ‘일본 태생’이다.
이 사례와 재일조선인 역사를 아울러 살펴보면, 도립 조선인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 유아기부터 일본어를 사용하면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일본어가 모국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녀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계속하여 조선어를 교수 용어로 해서 여러 교과를 가르친 교사들도 고생했지만, 외국어로서 조선어를 배우고, 일본어를 매체로 해서 조선어를 사용하는 단계를 거쳐, 조선어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모국어 통달단계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고통도 교사의 고통에 못지않았다.
어느 학생이건 조선어를 배운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린 일본어는 조금도 없어지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조선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래도 일본어 사용이 더 편리하여 언제나 의식 속 한구석에서 일본어와 조선어가 싸웠다. 매일 매시 매초가 이와 같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바로 이 단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거기에는 항상 ‘애국주의 사상의 첫걸음은 국어 상용이다’라고 하는 의식과 ‘일본에 살고 있으므로 일본어가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더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서 합리화시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는 스스로 반성하고, 그런 가운데서 모국어에 통달하는 노력을 뒷받침하였다.
일본어와 일본어에 의한 사고를 조선어와 조선어에 의한 사고로 변혁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생이 민족교육이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이었지만, 그것만 해결되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보람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화교육이라는 망으로 덮어씌워 진 도립 조선인학교에서는 문제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 교사의 수업과 비교해서 시간 수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하나, 일본어에 의한 일본인 교사의 수업이 행해져 왔다.
이것은 2중 언어, 2중의 사고체계, 2중의 지적체계가 학교 내에서 병존한 것이고, 학생의 학습 혼란을 가중시킨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한 예를 들면, 영어를 담당한 일본인 교사는 “조선인 자녀가 자국어도 일본어도 그 어학을 완전히 심리적으로 익히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초 위에서는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하며 영어의 이해 도가 낮고 틀리기 쉬운 사정을 보고하고 있다(수기, ‘英語科’에서)
또 대학 진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하는 일본어 담당교사는 “모국어를 학습해야 하므로 부담이 지나치게 무거워 반드시 고문(古文)만이 아니라 일본어(日本語) 문(文)에 대한 학력이 일본 학생보다 일반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라고 보면서도 “정규 과목으로 되어 있는 이상, 또한 향후 진학을 생각하는 학생에게 중요한 과목인 일본어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수기, ‘朝鮮人 高校 敎師로서 힘든 점’).
이것들은 고교 교사의 의견이 있지만, 초·중등학교에서도 조선인 교사에 의한 교육과 일본인 교사에 의한 교육이 병존하고 있다. 그 상징적인 예는 시간표 구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소학교에서 조선어 8시간, 일본어 3시간(4년생 이상의 경우)이라고 하는 이중 언어적인 구성이 있고, 중학교에 가면 거기에 영어가 첨가된다(조선어 5시간, 일본어 2시간, 영어 4시간).
이와 같은 이중 교육의 병존은 학생의 학습 부담을 무겁게 할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성장발달도 늦게 하고, 더욱이 민족교육의 관점에서건 동화교육의 관점에서건 현상적으로는 모두 학력 저하의 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인 학생의 생활 실태(1)
도립 조선인학교의 학생에게는 이상과 같은 민족적 형성의 도상에서 내재한 본질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학습 노력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었다. 그 하나만도 대단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그것을 방해하는 요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생활고로 인하여 학습에 전념할 수 없고, 더욱이 학습의 기회를 잃게 되는 주요한 요인으로 되었다.
조선인 고교의 한 조선인 교사는 “시간적·경제적인 궁핍으로 예습·복습을 할 수 없다. 원거리 학생들이 많고, 1시간, 2시간의 통학 시간을 요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또 경제적 빈곤으로 장사하고, 아르바이트, 가업을 돕는 자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집에서 차분하게 학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기, ‘학습·생활 지도상의 곤란’).
이와 같이 고교생 대부분은 집에 돌아와서 가정 학습 대신 일하는 학생이 대부분이었지만, 또 중·고생의 반수가 도시락을 싸 올 수 없었다. 교과서도 살 수 없는 학생은 각 반에 ¼에서 ⅓이나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매 학기 퇴학생 수는 증가하는 추세여서, 도립 조선인 중학교의 예를 보면 2학기 동안 수백 명의 퇴학생과 100명 이상의 장기 결석 학생이 나왔다. 이로 인해 학생·부모 중에서는 야간 중학교 설치를 희망하는 소리가 높았다.
이러한 열악한 학습환경은 차별에 의한 생활의 빈곤에 기인한 것으로 1952년에 도립 조선인 중·고교생 1500명의 가정생활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 8할이 실업 또는 반실업 상태였다.
게다가 도립 조선인학교에서는 이처럼 생활이 가난한데도 불구하고 교육경비는 한층 더 많이 든다는 구조는 어쩔 수 없었다. 조선인 시간강사의 부족한 급여를 메우기 위해 PTA 회비를 상대적으로 높여야 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 밖에도 예를 들면 통학비의 부담이 큰 것을 들 수 있다. 도립 중·고교에는 도쿄 거주 학생(전 학생의 64%)은 물론이고, 관동지방에서 통학하는 학생(17%)과 멀리 홋카이도(4명)에서 후쿠오카(25명)까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학생들이 하숙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고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으려면, 당시에는 이 학교에 다니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 중·고교생은 정기권 통학 자였으나(200원에서 500원 사이가 많음), 생활고로 인하여 그 정기권을 사지 못하여, 장기 결석·퇴학하는 학생도 많았다.
당시 조선 고교생이었던 박수남(朴壽南)은 퇴학하여 날품팔이하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PTA 회비를 4개월분 체납한 사실을 알리면서 “결석자가 전반적으로 눈에 띄게 점점 늘고 있다. G 군도 겨울 방학 동안 하루 두 끼의 식사로 견디면서 빠찡코집에서 아르바이트해 온 돈으로 겨우 참고서 3권을 손에 넣은 것을 1개월도 지나지 않아 반값으로 싸게 넘기고”라고 기록했다. 결국 퇴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 정기권을 살 수 없어서 1주일 내내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K군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빈곤한 생활로 인해 교육환경이 파괴되는 상황은 소학생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언급한 조교조(朝敎組)의 ‘학부모 실태조사’는 가정환경에 대해 “가족은 평균 5.9명, 대개 다다미 4.5~6장 짜리의 좁은 방에서 살고 있다. 물론 책상도 의자도 없다. 위생 환경도 극히 열악한 실정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가정에서의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한 원인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취업 차별로 인해 “하나같이 마을 공장이나 노가다, 행상, 장옷(被服)점, 막걸릿집 등이 많고 그래도 그런 일도 불안정하고 임금이 적어 오래갈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사람이 11회나 하던 일을 바꾸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와 같이 이직의 과정을 거쳐 현재도 고토구의 제2 조선인 소학교의 학부모들의 경우, 생활보호 대상자가 53%(187명 중 100명)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라카와(荒川) 지역 학부모들 직업도 동네의 고무공장의 경영자·종업원 등이 24%(601명 중 146명), 생활보호 대상자 21%(129명)를 차지한다. 이와 같은 피차별의 상태로 억압되어 있었다.
그러한 결과 12개 초등학교에서 급식비를 내지 못한 아동이 각 학교에 6할 이상이었고, 급식을 중단한 학교도 나왔다. 또 매월 100원에서 200원씩을 거둔 PTA 회비도 1951년에는 그달에 낸 자는 약 반수이고, 1952년에는 그것이 약 2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경제적 빈곤은 도립 조선인학교의 교육·학습 조건의 궁핍으로 연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