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테마정원·책마당·창의학교로 특화해야”

보은 정이품송공원
보은 정이품송공원 내 조형물
인적없이 썰렁한 정이품송공원

[동양일보]●보은 정이품송공원

글 변광섭 로컬콘텐츠 큐레이터·청주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콘텐츠, 볼거리, 흥미 3無… 예산낭비 비난 자초

-역사문화·자연환경 담은 체류형 관광자원화 필요



자수간요(字雖簡要), 전환무궁(轉換無窮). 간결하고 요약 가능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말이다. 한글의 창제원리와 쓰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인데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훈민정음 우수성은 크게 네 가지다.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나날이 쓰기 편하도록”하겠다는 것이다. 한문은 우리의 문자도 아니거니와 배우고 쓰는데 어려움이 많다. 둘째는 쉽고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음성구조로 자음을 만들었고 천지의 이치인 음양오행을 담았다. 셋째는 하늘(天)·땅(地)·사람(人)이라는 우주원리로 모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음과 모음의 상호관계 및 작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환과 응용범위가 넓다.

크리에이터 이어령 선생도 한글이야말로 지구상 유일의 우주를 품은 글자이며 생성문자라고 했다. 천지인의 우주원리를 담았기 때문이다. ㅣ의 수직은 인간이고, ㅡ의 수평은 땅이며, ●은 하늘이다. 한글은 에틱(etic)이 아니라 이믹(emic)이다. 모든 글자는 서로 얽혀진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동시에 그 글자들은 발음할 때의 혀 모양을 상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한글은 한자와 달리 공간적 분절이라는 독특한 문자의 변별 특징으로 모든 문자를 구조화하고 있다. 한문이나 알파벳 등의 다른 문자와 달리 공간의 방향성에 따라 문자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자를 써 놓고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면 ‘어’가 되고 ‘우’가 되며 ‘아’가 된다.

한글은 지구상 최고의 디자인이다. 디터람스의 <디자인 십계명> 첫 번째가 간결성인데 세종대왕은 이미 570년 전에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간결하게 만들었다. 28개의 글자, 그 간결성은 응용과 변형, 통합과 생성을 통해 무수한 글자가 만들어진다. 상형제지(象刑制之).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뜻인데 한글 창제의 디자인 요소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 형상은 다름 아닌 우주이고 자연이다.

정인지 등 당시의 학자들도 한글을 최고의 문자라고 했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음양과 오행일 뿐이라는 음양오행 사상을 강조하면서 한글이 바로 천지인의 사상이 담겨 있음을 웅변했다. 학자들은 “무릇 생명을 지닌 무리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 이 음양을 두고 어디로 가랴”며 창제원리를 이야기 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으니 사람의 목소리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간결하고 자유롭고 확장성이 풍부하다는 원리를 강조했다.

보은군이 2018년에 정이품송 바로 옆의 달천강변에 3만㎡ 규모의 훈민정음마당을 조성했다. 세조와 정이품송,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으로 알려진 신미대사를 주요 테마로 역사와 문화를 연계하겠다며 정이품송 조형물, 신미대사 업적과 동상, 한글 이야기 등을 담았다. 보은군은 준공 당시 정이품송과 법주사 등의 자원과 연계한 문화관광 자원이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보은군의 이 같은 전략은 빗나갔다. 한글창제 과정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신미대사 동상 등의 조형물도 조악하다. 드넓은 공간에 조경도 엉성하니 주먹구구식 행정과 예산낭비라는 지적이다. 오가는 사람들조차 생뚱맞다며 혀를 차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준공 일 년 만에 훈민정음마당은 정이품송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제안한다. 이곳을 한글테마 정원으로 가꾸자. 기왕에 조성되었으니 기존의 시설은 살리되 한글을 테마로 한 다양한 설치미술과 미디어아트 등의 예술로 특화하면 좋겠다. 세종대왕과 신미대사의 한글 이야기, 세조와 정이품송의 스토리텔링을 다양한 예술작품에 담자는 것이다. 한글을 테마로 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강익중 씨와 안상수체로 유명한 타이포그라픽 전문가인 안상수 씨가 충북출신 아니던가. 이 두 사람의 디자인과 설치미술의 꼴라보를 처음으로 선보이면 어떨까. 지역의 아티스트와 국민참여 프로젝트가 함께 진행되면 좋겠다.

이와 함께 이곳을 책의 정원으로 가꾸면 좋겠다. 문학, 역사, 철학, 미술, 건축, 여행, 아동 등 장르별 국내외의 책으로 정원을 꾸미자는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 출판사인 민음사를 이끌었던 고 박맹호 선생의 고향이 이곳 보은이다. 민음사를 비롯해 국내의 내로라하는 출판사와 지식인들의 참여가 가능하다.

이 곳에서 창의학교를 운영하자. 세종대왕은 한글창제를 비롯해 20여 개의 노벨상 수상에 버금가는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그 창조정신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 문학,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청소년 등이 탐구 및 체험의 장이어야 한다. 법주사, 말티고개 휴양림 등 주변의 자원과 연계한 지붕없는 학교를 특화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를 위해서는 경직된 행정의 혁신이 필요하다. 전문가의 기획과 체계적인 운영시스템이 전제되어야 한다. 용기와 진심, 그리고 창의와 혁신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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