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배달합니다”… 구순九旬 노인의 ‘행복찾기’

 

[동양일보 김성호 기자]"배려의 생활은 환경의 압력에서 힘을 얻고, 상식을 그 인도자로 삼으며, 행로의 불측을 각오하면서 항시 염려를 동반자로 하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신 212분 가운데 딱 한분의 외국인, 한국인의 영원한 벗 캐나다 출신 선교사이자 의사인 스코필드 박사의 인생관 즉, 가르침이다.

약자에겐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일제시대 3·1 만세 운동 당시 한반도의 처절했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 박사의 삶은 제2의 청년기로 20년간 진천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동양일보 배달로 심신을 단련해 온 신찬균(90·진천군 진천읍 성석행복주택아파트 103동) 전 예비역 대령의 인생 지렛대다.

서울 선린상고 재학시절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북진 6사단 7연대 선봉에 서서 압록강에 다다랐고, 당시 지휘관이던 임무택 대령에게 보고한 뒤 흐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전설의 인물이다.

이 일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안았고, 6개월간의 광주보병학교 훈련 뒤 11사단 20연대 12중대 소대장으로 임관한 그는 월남전까지 참전한 후 1979년 10월31일 30사단 90연대장을 끝으로 육군대령 전역한 진정한 대한민국의 애국자요, 역사다.

"충성~~~,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신문입니다~~~~"

매일 새벽 1시30분에 일어나 2시부터 동양일보를 배달하기 시작해 6시에 마무리 한다는 그.

"군인정신을 가다듬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신문배달만한 직업이 없어요. 하하하"

그의 '생거진천' 정착기는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 인생엔 두 번의 탈출이 있어요. 제 고향이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면 거차리인데 어느 날 어머니가 부르시더니 공산주의(북한) 사회에서는 네가 공부할 수 없으니 형들을 찾아 서울로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형님 두분과 여동생 한명은 당시 서울에 살고 있었거든요. "

16살 소년은 그길로 짐을 싸 서울로 첫 번째 탈출을 했다. 부모님과 형님 한분, 여동생 한명은 여전히 북한에 남겨둔 채 죽음을 각오하고 38선을 넘었고, 이후 52년간 서울 살이를 했다.

70살이 되던 해엔 서울 살이까지 과감히 정리했다. 한국전쟁 당시 주둔(광혜원)하며 전투를 치른 진천군으로 두번째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매제가 진천에서 동양일보를 배달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제가 맡게 됐죠. 가슴 아프게도 (매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달리했거든요. 이후 20년을 동양일보와 함께 하고 있어요. 또 진천푸드뱅크 고문으로 활동하며 이웃도 돌보고 있죠"

육군중위 시절 배화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정현숙(88) 여사와 결혼한 그는 슬하에 2남1녀를 뒀고, 장성한 자식의 보살핌을 뒤로 한 채 가장의 역할은 여전히 진행형임을 고집한다.

"저는 나이 90이지만 일터도 있고, 수입도 있어요. 아마 제가 우리나라 최고령 고수입자일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칠 수 없죠. 이젠 세계 최고령자 기록을 세우고 싶습니다. 동양일보와 함께 125세까지 야생마처럼 달릴 겁니다. 지금 아픈데가 하나도 없고 몸 상태가 아주 좋거든요. 하하하"

그는 내년부터는 새로운 꿈을 하나 더 꾸고 있다.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드라마를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대학이나 직장, 그리고 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90년간 살아오며 느끼고 깨달은 삶의 흔적과 내공을 강의해 보고 싶어요. 이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줘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답니다."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러시아어와 중국어도 수준급인 신 할아버지는 여생을 장학 사업까지 꿈꾸며 달리고 있다. 글·사진/진천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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