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사립으로 이관하는 반대 운동(2)

앞서 서술한 ‘교육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및 PTA 연합회의 항의 성명 ‘조선인 교육 탄압에 단호히 반대하자’(1952년 7월)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사립 이관은 민족교육의 뿌리를 끊는다는 현상에 대한 인식에서이고, 따라서 위기의식이 팽배해진 것이었다. 재일조선인 교육은 1948년 아래의 학교 탄압, 1951, 1952년 경찰이 강제로 들어가서 조사, 매스컴에 의해 보도되고, 반일 교육 선전이라는 것같이 지금까지 상당히 계속 억압되었다.

이와 같은 피억압의 체험과 정치 환경은 직감적으로 사립 이관이 1948년 이래의 ‘조선인 학교 탄압정책의 계속이다’라는 견해를 재일조선인이 가지고 있었다. 도립이란 틀을 푸는 것에 의해서 경찰의 개입이 더 쉽게 되고, 재정적으로도 고통받게 된다.

또 ‘사립 이관으로 된 것은 직접 학교에 정치적 압력과 경제적 압력으로 학교를 폐쇄하는 전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들의 모든 희망, 즉, 사는 길과 교육에의 길은 막혀 갈 뿐이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사립 이관 정책은 재일조선인의 역사적·사회적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해서 새삼스럽게 일본인 측이 취할 수밖에 없는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처우의 관점을 제시하고, 그 도덕성의 확립을 찾았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이고, 교육에 서도 ‘교육상으로는 민족교육의 권리를 30여 년간 완전히 박탈해 온 것이고, 그것은 조선인 자녀들을 인간으로서 조선인으로서 성장하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로운 영향을 끼쳐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후에도 계속되어 행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를 뒤돌아보면 “일본 정부는 두 번째 말로는 강화 발효를 구실로 하지만, 만일 강화 발효 때문에 일본이 독립 국가로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면, 더욱더 적극적으로 조선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갖고, 그 교육을 원조하고 보호하며, 그렇게 함에 따라서 과거의 비행에 대한 책임을 보상해야 한다”고 일본의 반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덧붙여서 “평화적인 일본의 민중과 지식인의 도의심”에 대해서도 “조선인 문제의 원만한 해결의 열쇠는 과거 반세기에 걸친 역사 단계를 일본 정부 스스로 반성하여, 참으로 도의적인 대책 수립과 그 실시는 무력적인 탄압으로는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을 단언한다”고 호소했던 것이었다.

셋째로 도의를 기준으로 한 조선인 교육정책으로서 공비(公費)에 의한 민족교육의 보장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로 나타냈다. 과거의 비행을 보상하고 ‘민주국가의 상식에 따라 일본 정부는 조선인 자녀들의 책임을 지고, 교육비를 부담하고 학교경영의 형태는 국립, 또는 공립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조선인 자녀들의 성장을 육성하기 위해서 현재까지 조선인 학교가 해 온 일체의 제한을 철폐’하고, 민족교육의 자유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때 당시 중국 및 북한에 설치되어 있던 일본인 학교의 운영 방식을 참고해서 그것과 같은 방침을 일본 정부도 채택하도록 추신이 가해졌다.



●평양 일본인 학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에 잔류해 있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은 어떻게 처우 되었던가? 일본과는 반대로 민족교육의 권리를 완전히 보장시키고, 정부 예산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을 지금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렸다. 남한의 대표 김구의 수행 신문기자로서 평양으로 간 서광제(徐光霽)는 <북조선 기행>을 그 후에 정리했는데, 그 1절에 ‘평양의 일본인 학교’라는 견문이 실려 있다. 그 항을 옮겨 본다.



인민위원회의의 첫날은 오후 6시경 폐회했는데, 그로부터 돌아가는 시간 합동 신문의 S형과 함께 평양시 황금리(黃金里)에 있는 ‘평양 일본인 학교’를 방문했다. 나는 평양에 일본인 학교가 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역 부근에 아는 사람을 찾는 도중 우연히 ‘평양 일본인 학교’라는 간판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학교의 책임자는 없고, 부책임자 端實治(45세) 씨를 만나 우리는 남조선에서 온 신문기자가 일본인 학교라는 간판이 있어 실상을 알고 싶어서 방문했다고 했다. 그분은 우리가 남북 연석회의에 관련해서 온 것을 직감적으로 안 것 같다. 端實治 씨는 오사카시에 자택이 있고, 가족은 모두 오사카에 살고 있다. 조선에 건너와서 10년이나 되었는데, 광복 전에는 평양 목공 회사에 토목 기술자였다.

이 학교는 일본인 교직원 11명, 학생은 중학생 19명, 인민학교(소학교) 40명으로 1946년 12월 26일에 창립되었다. 학교의 재정은 북조선 인민위원회 재정국에서 부담하고 있지만, 금년도 예산만도 223만7000원이었다고 한다.

이 학교에 수용된 일본 아동은 모두 일본인 기술자의 자녀이고, 아직 여기서는 약 40명 정도의 일본인 기술자들이 남아 있는데, 월급은 5천 원 정도이고, 북조선 기술자와 동일하게 최고의 급료가 지급되고 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착실한 분으로 모 대학의 공과를 졸업한 학자다운 면이 있지만, 실례가 될까 봐 출신 학교까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일본인으로 평양에 남아서 살고, 길에서나 또는 조선인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등의 경우 차별을 받기도 하고, 모욕을 받기도 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어보면, 조금도 그런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분은 조선 인민의 자치 능력이 우수한 것과 북조선의 거대한 산업 부문의 부흥에 경탄하고, 조선인 노동자의 애국적 정열에 머리가 숙어진다고 말했다. 8․9세밖에 안 되는 어린 일본 아동 10여 명의 ‘사요나라(안녕)’라고 티 없고 죄도 없는 선량한 그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교문을 나왔다.



민주주의는 일본과 북조선 어느 나라에서 참으로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민주주의 교육운동의 새로운 국면

사립 이관=조선인 학교 쇠망이라는 판단에 서서 사립 이관을 저지시킴과 동시에 나아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밟는 도의적인 정책의 수립, 그 구체화로서 공비(公費)에 의한 민족교육의 보장을 주장해서 조교조(朝敎組)와 PTA 연합회는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朝日協會(이 시점에서는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공동단체였다)의 조력을 얻어, 먼저 ‘문화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7월 3일 제1회 ‘朝日 문화인 간담회’를 개최, ‘安倍能成’, ‘神近市子’, ‘福島要一’ 등 20명 가까이 참가를 얻어,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3가지 주장을 제시함과 동시에 운동 추진을 위한 조직을 특별히 설정할 것에 대한 의견을 모았다.

이때 특히 “사립 이관 문제에 대해서 만약 재일조선인 특히 조일(朝日)의 역사적 관계에 서서 윤리적 도덕적 입장에서 반대한다면, 일본인으로서 원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아베요시나리安倍能成)고 강조되었다.

그와 동시에 덧붙여 그 상황을 민족문제로 파악되지 않는 일본의 허약성을 반성하고, 반동화(反動化)가 재일조선인에게 덮친 후에는 다음에는 일본인 습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은 일본인 자신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이 제기되었다.”(동 간담회의 기록 ‘재일조선인 교육을 말함’<평화와 교육> 1952년 8월호)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이 간과해 온 것을 반성하고, 이것을 일본의 문제로 본 방향성이 사상의 차원으로 싹텄다고 말할 수 있다.

계속하여 9월 5일 제2회 ‘朝日 문화인 간담회’를 열고, ‘前回’의 합의를 확인하면서 다시 ‘공립 조선인 학교 사립 이관 반대 서명 운동’을 행할 것을 결정했다. 재일조선인 교육을 생각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문화인’ 조직의 성립은 이 모임이 효시로 되었지만, 운동론적으로는 이 모임의 결성으로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를 일본 국민 가운데 빠져든 근거가 설정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간담회를 간판으로 해서 조교조(朝敎組)와 PTA 연합회가 일찍 일하는 것으로 되어 서명 운동의 준비를 추진하고, 그 발전 가운데서 ‘지키는 모임’의 조직화가 꾀하여졌다. 이 사이에 조교조(朝敎組)는 상부 조직인 도교련(都校連)에 ‘조선인 학교 사립 이관 반대 동의(動議)’가 8월 말에 가결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인 자녀에 대해 일본의 교직원 조합 측에서 손을 뻗친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격려였다’<민족의 아들>고 한다.



서명 운동은 10월 10일 그 취지서 ‘조선인 자녀들의 교육을 지키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지고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上原專祿·旗田巍·許南麒·李珍珪’ 등 110명의 조일(朝日) 지식인을 발기인으로 한 취지서에는 ‘정부가 재일조선인에 대한 피억압의 역사를 적고, 계속하여 동화교육의 역사와 현상을 보이고’, 참다운 해결은 ‘조선인의 생활 안정, 사람의 권리를 준다고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학교를 사립화하는 일은 폐교로 이끌기 위한 시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하여 사립 이관 반대를 호소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렇게 한 재일조선인 처우의 전환 속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로 보아서 한편으로는 ‘학자, 문화인’을 대상으로 1953년 초기까지도 전국 약 600명의 서명을 모은 것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주로 조선인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두 등에서 ‘대중 서명’을 전개하여 1952년에 약 32만 명의 서명을 받아 냈다.

이러한 서명 운동 가운데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서 조선인 교육 옹호의 총합적인 운동을 위해서 1952년 11월에 ‘조선인 자녀들의 교육을 지키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모임으로서의 실질적 활동을 전개하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조선인 교육을 지키기 위한 최초의 시민 조직의 성립으로서 기억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가 일본 사회와 그 국민의 시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를 옹호하는 최초의 운동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도립 조선인 학교의 당사자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고, 일본인 측의 주체에 기초해서 자주적으로 권장해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일본 측의 대부분은 이해를 표명했고, 서명해서 원조해 주려고 하는 타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또 양적으로 보아도 아직 좁은 범위의 일본인에게 말해 온 것에 지나지 않지 않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처음의 움직임이 있는 것만으로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당사자의 수고는 보통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 문제는 일본인에게는 남의 일로 보이니까, 문서를 유출하면 사람이나 서명이 수집되고 있다고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고, 하나하나를 집회에 나아가서 구두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다가 말을 걸어오는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이 뿌리 깊게 깔려 있으므로 일의 사정을 처음부터 정중히 설명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편견을 없애고, 그 사정의 의미를 알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발로 걸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주는 운동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일단을 조교조(朝敎組)의 회원인 와타나베(渡邊威) 씨의 경험을 들어 보기로 하자(‘아이들을 지키는 회에 나온 날’ <평화와 교육> 1952년 11월호.).

와타나베 씨는 ‘아동을 지키는 모임’의 집회에서 이 문제를 어필했다. 그리고 질문을 받는다. 질문의 내용은 정부의 선전에 영향을 받고 있다. (1)사립화는 형식적 법률논에서 말하면 어쩔 수 없고 (2)정부·자치단체는 조선인 교육의 재정까지 돌봐 주지 않아도 좋다. (3)빠찡코라도 맡은 조선인도 있으니까 사립으로도 할 수 있고 (4)생활 보장을 받는 조선인이 많은데, 이것은 세금을 지나치게 지출한다는 질문이 거듭되는 의견이고, 이것은 어느 집회에 나가도 일본인으로부터 공통으로 나오는 질문이었다.

와타나베 씨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답하면서 “감정적인 것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무거운 기분으로 “거의 이 문제에 대해서 들은 것도, 또 정식으로 생각해 본 것도 처음인 것이다. (중략) 일본 아동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양식과 양심과 민주적 정신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 일이 조선인의 문제가 되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치 무엇인가 위험한 문제에 접한 듯한 우려를 느끼는 듯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 끈질기게 받은 답 중에서 수긍해 주는 사람을 보고, 또 기도하는 듯한 마음을 갖고서 “조선인의 아이들이 일본인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다는 상태가 일본인의 마음 가운데서 아주 당연하고 본능적으로 긍정되도록 해서 비로소 일본인 그 자체가 참으로 민주적으로 되는 듯했다. (중략)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양해하겠지. 아이들을 지키는 입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아이라도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일이다”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사립 이관 반대 운동은 이처럼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활동에서 운동으로서의 형태로까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어쨌든 이와 같이 해서 사립 이관 반대 운동은 그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옹호를 주제로 한 대중운동이 일본의 민주주의 교육운동의 역사 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을 의미했다.

사립 이관 반대 운동은 이 의미로 새로운 운동 단계를 연 역사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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