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조 카페 컨설턴트·다락방의 불빛 대표
[동양일보]1988년,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의 일이다.
당시 19살이던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원두커피를 경험하게 된다.
음악 좋아하는 형들 몇몇과 함께 초대받아간 집에서였는데, 각자 즐겨듣는 LP를 몇 장씩 챙겨서 간 자리였다. 우리를 초대했던 분은 당시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였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30대 중반이라고 하면 지금은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상당히 어른스러웠고 그렇게 여유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모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오디오 앞에 모여 앉아 구경하고 있었는데, 오디오 본체는 당시 보기 힘든 외제앰프에 스피커도 JBL사의 L-100이라는 모델이었다.
우리는 인켈이나, 롯데 마니아 등의 오디오를 사용하고 있었던 터라 주인장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나오는 소리가 매우 궁금했지만, 예의를 차리느라 눈으로만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모님이 예쁜 찻잔에 담긴 원두커피와 과일, 비스킷 등을 내어 왔는데, 참 푸짐하면서도 정갈해 보였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필자는 형이나 누나가 없던 관계로 아직 원두커피를 마셔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약간 심심하면서도 구수하고 커피 향과 함께 탄내도 살짝 나는 그 음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스타벅스 1호점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것이 1997년이니까 1988년이면 상당히 일찍 원두커피를 경험한 것이 아니겠냐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형이나 누나가 있는 친구들은 시내의 개인 커피전문점에서 이미 원두커피를 마셔본 친구들도 꽤 있었던 터였다.
1997년 스타벅스 1호점의 아메리카노 가격이 2500원이었는데, 당시 시급이 1400원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고 100원~200원이면 자판기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원두커피는 좀 사치스러운 음료였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필자가 가지고 갔던 Eagles의 Hotel California를 처음으로 턴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그 유명한 기타 전주.
‘과연 이것이 내가 알던 그 노래란 말인가?’ 너무나 다른 소리의 세계...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오디오의 세계에 빠져 지내고 있지만, 후회는 없다.
우리를 초대했던 그분은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때 초대를 받았던 우리들은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커피와 오디오의 세계를 탐닉하며 지내고 있다.
살아가면서 결정적 순간이라는 게 몇 번 있다고 생각하는데, 필자에게 33년 전 그날도 그런 날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들 중에 한 명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언젠가 호텔 캘리포니아에 가서 꼭 커피를 마셔보겠노라고...
그 형은 아직 캘리포니아를 가지 못했다.
어쩌면 영영 캘리포니아에 가지 못할 수도 있고, 또 갔는데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 형이 언젠가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커피를 마시겠다는 그 꿈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