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이충호
이충호

 

[동양일보]●일본의 민주주의 교육운동의 새로운 국면(2)

일본인을 대표로 내세운 반대 운동과 이 이상으로 박력을 가진 조선인 부모·학생의 항의 활동을 받고, 도쿄도(東京都)는 1953년 신학기부터 사립 이관을 일시 연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시사 통신 ‘內外敎育版’에는 후에 “都의 경우 실제 문제로서 사학 이관 반대의 파상 공격적 데모에 몹시 애먹고 있다”고 보도된 것이었다(1953년 6월 30일).

문부성도 또 앞서 언급한 준비 중의 통달을 그대로 낸다는 것을 단념, 공립 조선인 학교 사립화의 측면은 덮어두고, 취학 의무 폐지를 축으로 해서 통달을 재구성하기로 했다.



●교육 연구 운동과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1)

도립 조선인 학교의 당사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움직임이라 하여 이 시기에 비로소 재일조선인 교육과 일본 국민의 민주주의 운동이 시민 수준으로 맺었다고 하는 사실의 기초로는 일본 측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적 조류가 일어났던 까닭이었다.

1950년대 전반은 ‘一面講和·再軍備 개시’라고 하는 상황이 진척되어 가는 중에서 일본 국민이 다시 미국에 대한 일본의 종속성을 강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지금까지는 반동 정부 비판이 중심이었지만, ‘강화’ 전후부터 미국 제국주의를 ‘해방군’이 아니고, ‘점령군’으로 간파하게 되어서 그것에 대한 비판이 일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을 부르짖고, 일본 교육의 위기가 논해지고, 평화의 옹호·민족의 독립이 시대의 제일주의적인 과제로 되어 온 것이다. 즉 일본 자기 민족 독립이 침식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이 확산하였고, 민족의 문제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문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은 입장은 민족교육의 파손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인식을 매개로 하는 점에서는 일본 교육도 재일조선인 교육도 같은 것이고, 이것은 일본 종속이라고 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있다고 하는 인식을 유도해 내는 토양으로 되었다.

1953년 1월 교연집(敎硏集)에 나온 가미사키(神崎淸) 씨가 “조선 민족의 교육 문제도 우리들의 교육 문제도 같은 운명적 입장에서 채택된 지금에서야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社會타임즈’ 1953년 2월 2일) 시대의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다.

자기 민족과 교육의 종속성에 자각을 매개로 해서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이해를 성립시켜 간다고 하는 것이지만, 이 시기에 이는 일본 국민이 재일조선인 교육에 접근하고 지배하는 방법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민족적 피해를 체험하고 재일조선인들이 호소하는 데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 결과 민족적 가해 행위를 반성해 가게 되었다고 하는 인식의 경로를 더듬게 되었다.

또 그와 같은 인식의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고, 사립 이관 반대의 문제가 대중운동의 한 과제로서 일본 국민의 첨단 부분으로 보였다.

이와 같은 성질의 사립 이관 반대 운동 중에서 일본 교육의 위기에 재일조선인 교육의 위기를 결부시킨 발상법을 갖는 교육 연구자나 교사가 생겨났고, 이 사람들의 운동을 간과하지 않는 역할을 다했다.

이 활동을 통해서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가 일본의 교육 연구 운동의 문제로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이것은 또 당사자인 조교조(朝敎組) 및 PTA 연합회에 의해 일어났고, 명색뿐인 불과 몇 안 되는 연구자와 교사에 의한 선학적인 착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를 민족교육의 문제로 억누르고, 교육론으로 해서 이것을 포착해 가는 시점이 민간교육 운동의 내부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의미로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교육 연구자가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이것에 관계되는 발언을 하게 된 것은 사립 이관 반대 운동에 참가한 데에서부터의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츠다(勝田守一) 씨와 오타(大田堯) 씨는 1952년 10월 교육 연구자로서는 처음으로 전국 각지의 조선인 학교를 조사하고, ‘조선인 자녀교육의 실태’에 대해서 문화인 회의 등에서 보고했다(이는 보고서로는 정리되어 있지 않음).

또 야가와(矢川德光) 씨는 ‘일본 교육의 반성’과 관계시켰고, 고쿠분(國分一太郞) 씨는 ‘말의 교육’이라는 시점에 각각 재일조선인 교육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같은 이름의 논고가 ‘평화와 교육’ 1952년 11월호에 수록).

아무래도 도립 조선인 학교 당사자와의 교류를 통해서 문제의 상황을 알리고, 그 위에서 착목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다카바시(高橋瞋一) 씨가 말한 바와 같이 “일본 국민은 민족의 위기를 느끼고 있지 못한다는 것, 자신의 민족문제를 모르고서 다른 민족의 문제는 알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을 반성한 위에서 민족 해방을 위한 교육에 대한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일본은 “국민 전체가 각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조선인은 오랫동안 식민지의 비경(悲境) 가운데서 길러져 온 경험은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주목해 가게 된다. 이와 같은 지적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그 이면에 잠재해 있는 동화교육의 현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교육 연구자는 동화교육의 반 교육성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예를 들면, 가츠다(勝田) 씨의 조사 가운데 “가장 의문이 되어 있는” 것으로서 일본인 학교에서 배우는 조선인 자녀들의 문제를 들고, “즉 어떠한 형태로 그러한 아이들이 소위 일본의 형식적인 국민 교육 중에서 취급되고 있는가, 어떠한 형태로 아이들의 감정이 왜곡되어 있고, 성장이 어떤 식으로 저해되고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를 우리는 연구해 갈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고, 그것을 분명히 하는 것은 역으로 자주적인 민족교육의 중요함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어져 가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좌담회, ‘일본 교육의 위기와 재일조선인 교육의 현상’ <평화와 교육> 1953년 9월호.).



야가와(矢川) 씨도 같은 좌담회에서 재일조선인의 아이들에게 “일본의 지금까지 정책이 인간적인 감정이나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까지도 빼앗아 버렸다”는 것을 반성하고 있다. 이처럼 동화교육의 가해성에 대해서 교육자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연구과제로써 “객관화하고 확실히 밝히는”(勝田) 계속적인 연구 노력은 그 후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찍이 볼 수 없는 교육론적인 접근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를 시사 문제로 다루는 수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단, 야시가와(矢川德光) 씨가 <일본 교육의 위기>라는 책을 발표했는데(1953년 3월), 그중에서 ‘민족교육의 방향’을 확정한 위에서 ‘조선 교육의 지도(地圖)’의 학습을 뺄 수 없다고 해서 그 소개를 시도한 업적이 돋보일 정도였다.



●교육 연구 운동과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2-1)

사립 이관 반대 운동은 이처럼 교육 연구 의식에 새로운 시점을 형성시킨 동인으로 되었지만, 동시에 일교조(日敎組)의 교연(敎硏) 운동 중에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를 끌어들여 정착시킨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제2회 교연대회(敎硏大會 1953년 1월, 고지(高知)현에서)에 의한 조교조(朝敎組) 대표의 보고는 그 중요한 지표였다.

조교조(朝敎組)는 재일조선인 교육의 실정을 알리는 선전 활동에 정력적으로 몰두해 왔지만, 사립 이관 문제가 교육 문제인 점에서 무엇보다도 전국의 교사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敎硏대회를 그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조교조는 가지이(梶井) 씨를 보고자로 해서 수도 및 전국의 ‘교연(敎硏)대회’에 보냈지만, 같은 조교조의 일원으로서 조선인 교사도 여기에 참가한 사정을 일본인 교사에게 호소했다.

그때의 중심적인 문제 제기의 방법에 대한 의식은 가지이(梶井) 씨의 보고에서 ‘평화 교육의 일환으로서의 재일조선인 교육의 실태와 그 양상’에 의하면 재일조선인에 대한 ‘나쁜 의미의 관심’이 충만해 있는 현재, “재일조선인 60만이라고 하는 조선인과 일본인 대중이 서로 어떠한 이해도 없이 반목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들의 진로를 평화로 향해 갈 것인가 어떨 것인가 하는 문제에 큰 관련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재일조선인 문제를 일본의 진로에 관한 문제와 연계시켜서 생각해 보고 싶다고 호소한 점이었다.

소위 일본인 교사에게는 재일조선인 교육을 볼 수 있는 문제로 끌어올리고 싶다는 희망이었다.

‘교연(敎硏)집회’에서는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를 ‘평화와 생산을 위한 교육’ 분과회에서 토론했지만, 사립 이관이 사회문제화 되어 있던 도교연(都敎硏)에 참가한 교사조차 “거의 모두가 재일조선인의 실태에 대해서 몰랐다”(梶井, 앞의 책)고 듣고 있는 정도이고, 그것은 전국 교연(敎硏)에서도 같았다.

그런 점이 전국적으로는 “조선인이었다는 것이 극히 두려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다”는 교사가 아직 많았고, 교연(敎硏)에 참가한 조선인 교사와 이야기해서 “참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들이네”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는 듯한 실정조차 보였다.

이처럼 재일조선인 교육을 볼 수 없는 일반적인 현상 가운데서 전국 敎硏에서의 발언자는 朝敎組의 문제 제기와 보고 외에는 교토·야마구치·아이치·오사카(京都·山口·愛知·大阪) 등 조선인 공립 분교나 민족학급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부응 없이, 조선인 학생의 실정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의 교사에게 한했다.

이들의 보고를 통해서 볼 때 2개의 문제로 대별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 하나는 재일조선인 학생이 받는 피차별 교육의 현실이었다. (1) 생활의 곤란에서 생긴 불 취학, 장기 결석이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있어서는 극히 많고, (2) 빈곤과 차별로 인한 것들이 학생들을 비행으로 끌고 가기 쉬운 것이다. (3) 민족적 의식이 완전히 파괴되고 있다. (4) 조선인 차별을 위한 진학·취직이 곤란하다고 하는 여러 가지 점이 지적되었다.

두 번째로는 거기에 포함되어서 ‘강화’ 후의 정책 동향에 대한 비판이었다. 의무 교육권의 상실을 이유로 공립 조선인 학교의 폐지와 일본인 학교에서 조선인 학생을 추방이 정부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교육이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지적되었다.

요컨대 재일조선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 있는 그대로 생활과 정책이 제출되고, 조선인 자녀가 부정적인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보고되었다.

그러나 토론은 생활 사실보다도 정책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집중되었고, 토론은 그중에서도 공비(公費)에 의한 조선인 교육에 대한 보장의 옳은 것인지 그런 것인지로 집약되었다. 그것은 당시 운동의 과제와 인식의 역량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일본인 교사가 재일조선인 교육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당시의 敎硏에서는 제1의 과제였지만, 그것을 볼 수 있게 된 시각은 권력에 의한 억압과 어떻게 싸울까 하는 운동론의 수준에서 요구되고, 조선인 학생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하는 교육 실천의 수준까지 미치지 못했다.

당시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에 관계하여 유일하게 돌출된 집단적 역량을 갖추어 온 것은 朝敎組이고, 朝敎組는 권력에 의한 공립 조선인 학교를 폐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저지하는가를 운동 상의 최대의 임무로 해 왔다. 그러므로, 토론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렇게 기울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일본인 학교에 있는 조선인 학생을 지도할 실천적인 자세는 아직 시도되지 않았고, 그 대책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어도 실천의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 단계였다. 조선인 학생의 생활을 파악할 역량을 일본인 교사는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따라서 그 장면에서의 문제 제기는 기대할 수 없었다.

朝敎組의 일본인 교사도 조선인 학교에서의 교육의 중요함에 대해서는 자각하고 있어도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들의 지도 문제까지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운동적인 문제에 매여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 학교에서 일상적인 실천으로까지는 시야에 들어오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권력에 의한 조선인 학교의 파괴·동화교육의 강제에 관한 사실 인지(認知)는 재일조선인 교육을 돌아볼 때 제1의 적으로도 찾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인식이므로, 이 점이 논의되고 이 시각에서 조선인 교육을 보게 된 것은 누군가가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관문을 통과하는 법은 시대 조류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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