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교육 연구 운동과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2-2)
교연(敎硏)집회의 내용을 정리한 것에 의하면, 재일조선인 학생의 생활 모습을 보고 받고, 그 교육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하에서 민족의 역사와 말을 배울 수 없고, 기초학력이 저하된 상태로 방치하여, 식민지적 퇴폐와 자포자기가 필연화된 현상이었다. 그 영향이 부전자전으로 전해져서 오늘에 미치고 있다”는 문제이고, 이것에 대한 ‘우리(일본인)의 책임과 반성’이 촉구되고 있다.
하지만 강조할 점은 오히려 재일조선인 교육은 민족 해방 교육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오늘 우리를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하에 두고, 우리들의 사랑하는 학생 아동이 판판 문화(매춘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절실한 문제로 생각이 미치게 되면 (중략) 동시에 피압박 민족의 해방,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의 문제로서 우리(일본인들)가 목표로 하는 평화와 독립의 문제와의 관련해서 깊은 공감 하에 채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놓여 있다(日敎組編 <일본 교육> 제2집, 1953년, 469~70쪽.).
조교조(朝敎組)에 참가한 일본인 교사는 그 감상을 이렇게 파악하고, 그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代田昇, <敎硏大會傍聽記> ‘朝敎組뉴스’ 1953년 2월). 일본은 식민지이고, 그 “민족의 문화, 전통, 역사는 아이들로부터 망각되고, 민족의식은 상실되어 갔다.
그 대신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문화에 몸을 내가 맡기고 있는 전 일본의 현상은 양식 있는 일교조(日敎組) 50만의 대표자들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오늘날 일본의 실상은 분명 과거의 조선인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선인이 맞닥뜨리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과 완전히 같은 입장에”에 서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인식에 다다른 결과,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교사 사이에는 “전 세계의 민족 해방· 인류 해방의 입장에 서서, 함께 고통받는 형제로서의 친밀감이 급격히 높아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함께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의 문제”인 것으로 보고, 거기에 대한 ‘공감’을 연결고리로 하여, 분과회에서 일본인 교사는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를 파악해 갔다.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이것을 ‘민족 해방의 입장’에서 취급해야 한다는 방향이 세워지고, 그 바탕에서 “조선인 자신들이 바라는 방향, 즉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을 인정한다”는 원칙이 확인되었다.
민족교육 원칙의 옹호를 확인했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 따라서 볼 때, 이는 바로 공립 조선인 학교를 수호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점에 관해서 이미 조교조(朝敎組)에서는 운동 상의 긴급 과제로서 “공비(公費)에 의한 조선인 교육의 보장”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것은 일본인 교사에게 비로소 부딪힌 새로운 개념이었으므로 국제적 관습은 있는가, 법률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등등의 이념이 나왔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박탈하고 역사와 현재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것에 의해서 새삼스럽게, “우리들의 책임과 반성”을 되씹는 것이 되었고, 조선인 학교 문제를 민족 해방의 일방적 과제로서 보는 것만은 불충분했다. “특수한 역사적 과제를 가진 문제”로서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에 따라 조교조(朝敎組)의 제안대로 “공립학교를 설립해서 그들의 자녀를(조선인으로서―인용자 보) 교육하는 것의 필요성”이 분과회의 결의로서 결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