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금철 수필가

 
신금철 수필가
신금철 수필가

 

[동양일보]‘욕심보다 더한 불길이 없고/성냄보다 더한 독이 없으며/몸뚱이보다 더한 짐이 없고/고요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법구경

통도사 입구의 돌에 새겨진 글귀에 고개를 조아린다. 묵주를 꺼내 들었다. 절에서 묵주기도를 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부처님께선 너그러운 분이시니 이해해주시리라 어설픈 애교를 부렸다. 건강한 몸으로 그곳까지 발걸음 할 수 있음에 감사 기도를 먼저 올렸다. 힘든 상황에 처한 분들에게도 행복한 하루를 공평하게 나누어 달라는 기도도 올렸다. 법구경의 말씀처럼 욕심을 버리고, 차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고요를 즐기기 위해 기도 안에서 부처님과 하느님을 함께 만났다.

한 시간 남짓 기도하며 ‘무풍한송로’를 지나 법당을 비켜 조붓한 길로 들어섰다. 대숲을 스치는 숨 가쁜 바람 소리, 찬바람의 배웅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나는 청련한 물소리, 가끔 나와 기도를 함께해주는 천사의 새소리, 모두가 자연의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잰다. 통도사 대웅전 남쪽 정상에 있는 탑전(塔殿)에서 들리는 청아한 목탁 소리다. 나는 홀린 듯 돌계단을 올라 탑전 앞에 섰다. 탑전은 통일 신라 시대에 ‘사자목오층석탑’을 예배하기 위해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문 앞에는 여자의 회색 운동화와 스님의 털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단청이 소박한 건물 벽에는 파리 한 마리가 날기를 멈추고 벽에 숨죽여 붙어 있고 바람도, 대숲의 몸 비비는 소리도 목탁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도 그들의 멈춤에 동참했다.

노스님의 불경과 함께 여인의 울음이 목탁소리에 실려 문밖으로 새어나왔다. 불경의 의미는 모르지만 간간이 들리는 여인의 울음소리는 슬픔을 품었다.

몇 해 전 불의의 사고로 운명한 지인의 천도재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목탁소리가 그토록 애잔하게 들렸던 건 그때가 처음이다. 여인의 울음소리와 목탁소리가 슬픈 음악처럼 애처롭다. 여인도 누군가의 극락왕생을 위한 간절한 기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다. 목탁 소리에 그녀의 슬픔이 바람을 타고 승화되기 바라며 화살기도를 바쳤다.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울음소리는 천상에 오르신 내 부모님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갑이별로 이승에서 누리지 못했던 복락을 누리시길 빌며 두 손을 모았다.

고요가 좋다.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소음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때 묻은 낭설浪說들을 잠시 잊은 채 원초적인 바람소리, 순수한 나뭇잎들의 속삭임, 번뇌를 떨쳐내는 목탁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세상의 자그러운 소리에 지칠 때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 조용한 사찰에서 때 묻은 마음을 씻는다. 이런 공간에도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왁자글한 세속의 소리가 조금씩 스며드는 공해가 염려된다.

이제 청력聽力이 약해져 자꾸 되묻는 때가 많다. 그러나 아직은 큰 불편 없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 또한, 자연의 소리에 취해 걸음을 멈출 수 있는 감성이 메마르지 않아 행복하다. 소리를 통하여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낄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동안 내 마음을 오염시켰던 소리를 정화淨化시키고 통도사에서 만난 아름다운 소리를 내 몸 깊숙이 저장하여 가끔 꺼내 음악처럼 듣고 싶다.

쇄락한 바람이 온몸을 스친다. 오늘따라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의 메숲진 바람 소리와 ‘또로록 또로록’ 울리는 스님의 목탁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때 묻지 않은 산사의 소리에 취해 욕심도 성냄도 버리고 고조곤히 잠심潛心에 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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