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카페 컨설턴트

[동양일보]지난한 주, 많은 분이 필자에게 본인이 커피를 내려 마실 때 어느 정도의 원두를 사용하는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중에서 어떤 한 분은 자신도 커피를 연하게 마시는데 베토벤처럼 커피 한 잔을 추출할 때 60알로 마시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세어봐야겠다고 말씀도 하셨다.

커피를 추출할 때 고노 드리퍼만을 사용하시는 한 지인분은 자신은 평소 한 잔을 추출하기 위해 50~60g 정도를 사용하고 있다며, ‘베토벤이 마시던 60알의 커피를 생각해보면 엄청난 사치를 하는 것’이라며 웃으셨고, 자연스럽게 역시 엄청난 커피 마니아였던 바흐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바흐는 아이제나흐라는 문화적이지만 자그마한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1723년 그의 나이 38살에 드디어 활기 넘치는 자유도시 라이프치히에 있던 성 토마스교회의 음악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게 된다.

독일 라이프치히에 처음으로 커피 하우스가 생긴 것은 1685년, 바흐가 세상에 태어난 해와 같다. 처음에는 아라비아의 포도주라고 불리며 상류층만의 사치로 여겨졌지만, 수십 년이 지나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직장생활을 할 무렵에는 그 인기가 폭발하면서 거리 곳곳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그렇다고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커피가 지금처럼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지 가격은 상당히 비싸서 공장 노동자의 하루 일당으로 모두 커피를 산다고 해도 커피 원두 20g을 간신히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온종일 일해서 번 돈으로 커피 한 잔밖에 살 수 없는 정도였으니, 당시의 커피 가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흐가 교회와 학교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10년 넘게 커피하우스에서 일한 것도, 어찌 보면 비싼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직장에서 받는 급여만으로는 스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부양하면서 비싼 커피를 매일 마시기는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커피하우스에도 어떤 형태로든 이익을 주었어야 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바흐가 활동하던 당시 라이프치히에서는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대유행이었는데, 일종의 사교장 역할을 하다 보니 때로는 작은 규모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바흐의 ‘커피 칸타타’ 역시 커피하우스에서 공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일종의 커피 홍보를 위한 작은 희극이었으니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CM송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그곳에서 커피문화를 접한 뒤로 약 300여 년이 흘렀다.

오늘날 우리는 큰 부담 없이 거의 매일 커피를 마시며 지낸다.

그런데 300여 년 전만 해도 음악의 아버지, 대 작곡가 바흐조차도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즐겨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커피 한 잔 마시는 일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칸타타’라는 단어는 ‘노래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악기로 연주한다는 의미의 ‘소나타’와 대비되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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