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일본동아시아실학연구회)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

오오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오오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동양일보]21세기 세계는 수명의 비약적인 연장으로 일본을 선두주자로 해서─한국이 급속하게 뒤를 쫓고 30년 후에는 일본을 앞질러 세계 제1위가 될 전망이지만─ ‘초고령사회’라는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현대 일본에서는 ‘장수’는 바람직한 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선으로 칭찬받고 있다. 불로(不老)에 대한 소원도 사회를 뒤덮고 있지만, 과연 장수가 무조건 긍정되고 기뻐할 만한 것일까?─ 300년 전, 영국의 작가 스위프트가 쓴 풍자·공상소설의 걸작인 <걸리버 여행기>(1726)에 나오는 불사인간의 이야기(제3편 제9장 ‘럭낵 도항기’)는 마치 인류를 기다리는 불길한 미래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 든다.

걸리버가 일본을 향하는 도중에 들른 것은 큰 섬나라인 럭낵(Luggnagg)국이었다. 거기에는 스트럴드브럭(Struldbrugg)이라 불리는 불사인간(不死人間)이 있었다. 그들은 우연적으로 이따금 출생하는데 그 숫자는 매우 적고 남녀 모두 1500명 정도이다. 죽지 않으면 학문도 다할 수 있고, 재산도 만들 수 있으며, 인격과 식견은 무한히 향상할 것이다-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걸리버는 크게 기뻐하고 부럽게 여겼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을 섬사람들 모두가 싫어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다 노인으로 불사인간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은 젊은 청춘과 건강한 육체의 영속(불로)이 아니라, 늙고 비참하고 추한 육체의 영생(노추)이었다. 나이든 그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매우 질투심이 강하고, 80세쯤 되면 “노인에게 있는 모든 어리석음과 위태로움을 폭로”한다.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탐욕스럽고 언짢고, 푸념이 많고 말이 많아지고, 질투가 심하며 치사한 욕망뿐이다. 온갖 업무에서 배제되고 사회적 신용도 전무하다. 대인관계도 삐걱거려서 “인간 본래가 따뜻한 애정을 알 수 없게 된다.”

90세에 달하면 이빨과 머리카락이 빠지고 미각도 기억력도 없어지며, 온 나라에서 혐오를 받는 불쌍하고 추악한 존재가 된다. 참으로 현대의 노인성 치매증과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현대에 사는 노인들이 스트럴드브럭처럼 기나긴 노후를 주체 못하고, 젊은이들의 경멸과 혐오의 눈길 속에서 오래 사는 비참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의 막판에서 노년의 추악함과 비참함을 회피하는 길, 나이 든 인간의 삶, 나이듦의 의미 탐구야말로 세계 최첨단을 가는 ‘노인대국’인 일본, 그리고 그것을 급격하게 뒤쫓는 한국,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중대하고도 긴요한 과제일 것이다.

현대일본의 고령자들은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풍요롭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한편 일본의 노인들은 대부분 인구감소와 저출산 고령화, 불평등에 의한 분단격차사회로 밝은 미래의 꿈을 그리기 어려운 세계 속에서 매일 특별히 할 일 없이 ‘일요일’ 상태인 채로 간호노인이나 치매증노인이 되기를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인생100년 시대’를 살아가게 된다.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규제완화정책의 추진에 의해 고용이 불안정한 대량의 비정규고용(계약사원/·파견사원/·알바생활자)을 낳고, 현대세계의 경제사회화에 적응하지 못한 니트(NEET; 독신의 청년무업자)나 은둔형 외톨이(social withdrawal)의 급증, 생애미혼율의 급상승(2030년 추정으로 남성 30%)등이다. 이것들을 생각해도 이대로 가면 어느새 21세기의 일본에서 고령기의 고독사‧ 고립사가 1000만 명 규모에 오를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고령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사‧ 고립사와 같은 ‘외로운 죽음’에만 그치지 않는다. NHK는 “연금만으로는 살 수 없다”, “연금생활은 사소한 계기로 붕괴되다”고 하면서, ‘노후파산-장수라는 악몽’(2014년 9월)을 방송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너무 긴 노후는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른바 ‘생지옥’으로 변한다. 몸 상태가 악화된 고령자가 자택에서 살지 못하고 집을 쫓겨나 병원이나 노인시설을 옮겨가면서 ‘죽을 곳’을 찾아다니는 ‘노인표류사회’의 출현(NHK 2016년 4월 방송), 혹은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노후 없는 사회’(아사히신문에 의한 조어)와 같이, 여유로운 노후의 소멸도 또한 현대일본의 슬픈 현실이다. 옛날에는 ‘장수’는 축복받을 일이었으나 지금은 양상이 매우 달라지고 있다.

페미니즘의 원조이자 사르트르의 반려로도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 시몬 드 보봐르는 1970년에 간행한 노인론의 명작인 (노년; 일본어판 ‘老い’, 朝吹三吉 역, 人文書院, 1972)에서 “늙음은 우리 문명 전체의 좌절을 노출시킨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적어도 일본에서는 장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반세기 전에 이렇게 노년기를 이야기한 일본인은 아마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이 그 최후의 15년 내지 20년 동안에 이제 한 개의 폐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문명의 좌절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노년기에 인간이 계속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있기 위해서는 사회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노후의 고독이나 연금‧ 주택 등을 배려한 ‘노년대책’ 따위는 노인문제에 대해 아무런 근본적인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바꾸는 것, 그거밖에 없다.” 노출된 “문명 전체의 좌절”에서 “노인의 처지를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 전체를 다시 뜯어고쳐야 되고, 인간 서로의 모든 관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인간은 그의 인생 마지막 시기를 빈손으로, 그리고 고독 속에서 맞이해야 할 것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늙음을 슬픔 혹은 분개로 맞이한다. 늙음은 죽음보다도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삶과 대립시켜야 할 것은 죽음보다도 늙음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삶’의 대립물은 ‘죽음’이 아니라 ‘늙음’이라고 말한다. 보봐르는 노인에 대하여 자기변혁을 요구함과 동시에 ‘종활’(終活; ‘인생의 종말을 향한 활동’의 준말로 사후의 장례식, 유언, 상속의 준비, 소지품 정리 등을 생전에 해두는 것─옮긴이 주)이라고 해서 자기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정열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으로 노인은 인생의 가치를 계속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늙고 싶은 사람은 없다.

(Every man desires to live long; but no man would be old.)

“Thoughts on Various Subjects, Moral and Diverting” 1706

이렇게 말한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스위프트는 노쇠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노년을 최대의 인간악으로 생각해서, 노경이 들어서도 산책과 승마로 평소 신체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트럴드브럭의 노추(老醜)와 노참(老慘)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혐오한 스위프트는, 그러나 70세 전후에서 육체가 심하게 쇠약해지고 마침내 완전히 치매에 걸려 몸과 마음 모두 붕괴했다. 스트럴드브럭 이상의 끔찍하고 비참한 노후(최후)였다고 알려진다. 그의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다른 세대를 밀어내면서 해마다 계속 증가하는 고령자들은(일본 총무성의 추계에 따르면 2040년에 총 인구에 차지하는 65세 이상의 비율은 35.3%) 포스트 코로나의 ‘인생100년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려되는 것은 제일선을 물러나도 건강하고 활기찬 고령자들이 집단으로 자기들의 권리를 큰소리로 외치거나, 혹은 스스로의 ‘강함’을 맹신하거나, 과거의 꿈을 다시 되찾기 위한 노인지배(gerontocracy)를 하는 등 연장자의 교만함이 표출된 행위로 젊은 세대는 볼 것이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건강한 세대-장래세대가 고령자에게 돌리는 격렬한 혐오의 분출이라는 큰 불행 혹은 심각한 세대 간의 갈등·대립의 둘 중 하나다.

동아일보의 젊은 여성 기자(하정민)는 2021년 1월 6일의 지면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령인 79세의 대통령이 탄생한 것으로 고령층이 사회전반을 장악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라는 용어가 최근에 미국의 신문지면을 창식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위구심을 표명했다.

“고령화와 평균수명의 연장이 초래한 문제는 젊은 세대에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하고 고령자의 권익을 보호하며 노인빈곤을 해결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시니어 폴리틱스(senior politics)’가 사라지고, 극소수의 기득권 고령자들의 과제만이 과도하게 대표되는 모습이 드러나는 데 있다. 고령자 중심의 권력구조는 그 특성상 세대갈등과 격차의 심각화, 국가경쟁력의 약화 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세기에 세계 전체가 ‘초고령사회’를-일본‧이탈리아‧포르투갈‧핀란드 등 7개국(2019년)이고, 2060년에는 100개국에 달할 전망임-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신형 코로나가 세계와 전 세계 사람들을 크게 동요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사태에 직면한 오늘날, 지구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경제성장‧경제우선주의의 문명과는 다른, 혹은 그것을 포월(包越)하는 새로운 철학의 모색이 시작되고 있다. 문명사회의 큰 전환점에 즈음하여 노동과 육아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시간을 풍부하게 가진 고령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 후보 중 하나는 다시 이 시대, 이 세계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인생체험에서 얻은 지혜의 힘도 빌어서 금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자기 마음에게 다시 묻는 것, 즉 ‘철학하기’가 아닐까? ‘철학하기’를 통해 자기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열어가는 힘의 일부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 마지막을 장식하는 꽃길이 될 것이다.

1997년에 “노인은 죽어 달라, 나라를 위하여”(老人は死んでください国のため)라는 센류(川柳)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고령자의 의료비·간호 비용 등 복지비용 상승이 현역세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해, 젊은 세대의 불만이 쌓이는 것은 당연하다.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의 추계에 의하면 65세 이상의 고령화 비율은 2019년에 28.4%(한국 14.9%), 2060년에 37.7%(한국 39.8%)로 한국이 일본을 앞질러 세계 으뜸으로 뛰어오르고, 2065년에는 38.4%(한국 46.1%)로 말해지는 상태로 고령화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 형편이다.

한편 합계특수출생률(1명의 여성이 한평생에 몇 명의 아이를 낳는지를 나타님)은 2019년에 1.36이었으나 한국은 2018년에 0.98로 선진국에서 처음으로 1 이하가 되고, 2019년에는 0.92로 저출산 고령화라는 점에서는 일본보다 더 상회하고 있다.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고령자만 늘어나는 현실은 살기 좋은 세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018년에 한국에서 개최된 ‘노년철학’ 회의에서 한국의 학자가 ‘반출생주의’(Anti-natalism)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논의한 적이 있었다. 이것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대학 철학교수인 데이비드 베너타(David Benatar)의 저작인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2006)이다. 일본에서는 2017년에 일본어판이 나왔지만 거의 화제가 되지 않았다. ‘반출생주의’라는 말을 일본인의 대부분은 모른다. 저출산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한국에 비해 일본의 위기감은 희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의 이면에 있는 것은 “노인만의 이런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고통스럽다. 아이들은 미래가 없는 이런 사회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노인저주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세계는 이대로 방치하면 저절로 파멸된다. 그것을 구하는 기적이 인간의 출생(natality)이며, 이것이 바로 세계에 대한 신앙과 희망이 된다.”(<인간의 조건>, 1958)라고 말했는데, 고령자는 이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서 여생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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