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

오오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오오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동양일보]4월 1일, 일본정부의 자문기관인 신형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대책분과회 오미 시게루(尾身茂)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젊은이들이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가운데, 노래방 등에서 많이 모여서 코로나 클러스터(집단감염)를 발생시키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65세 이상 75세까지의 건강한 고령층)에게 쓴 소리를 냈다.

그들·그녀들이 감염에 한 원인이자 감염 ‘감소 저해’의 배경이라는 지적이었다. 늙어서 건강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상황을 생각해서 행동하라고 하는 마치 어린이 타이르듯 한 훈계이었다.

이 세대는 전후(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에 태어났고,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구가하며, 노후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는 세대다. 현대일본의 고령자들을 보면 풍요롭고 자유로운 노후를 만끽하는 한편, 현실적·개인적·이기적인 ‘삶’에 대한-취미와 건강, 가족의 행복, 장수와 여생을 즐기는 법, 재산축적과 자산 관리 등-의욕·흥미에 한정되고 있다.

지금부터 150년 이상 전에 마르크스는 “내가 죽은 뒤에 홍수여 오너라!”(Après moi le déluge!)라는 말이 모든 자본가 및 자본가국민의 슬로건이라고 갈파했다.(<자본론>, Ⅰ-3-8).일본에서는 ‘뒤에는 들이 되든지 산이 되든지’라는 속담 이외에도 가수 아오에 미나(靑江三奈)는 ‘뒤는 몽롱하게, 뒤는 몽롱하게’라고 요염하게 노래 불렀고(‘황홀의 블루스’, 1966), 역시 가수인 사가라 나오미(佐良直美)도 ‘좋잖아요. 지금이 좋으면’이라 불렀다.(‘좋잖아요. 행복하면’, 1969)

<자본론> 제Ⅰ부는 1867년에 간행되었는데 한 세기 반이 지난 현재에도 이와 같은 ‘지금이 좋으면 뒷일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라는 자본주의 특유의 태도를 현대인도 확실히 이어받았다.

이것이 현대세계의 정신적 글로벌 스탠다드(국제표준)이자 현대문명의 기본적인 태도다. 이렇지 않으면 2018년에 당시 15세의 고교생 그레타 툰베리가 COP24(유엔기후변화협약국회의)라는 세계의 누구나 주목하는 큰 무대에서 연설하면서 “당신들 어른은 경제성장밖에 염두에 없다.

세계적인 온난화를 초래하고 지구환경을 파괴하며 우리들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며 격렬한 분노와 항의의 목소리를 올릴 리가 없다.

고령자는 개인적인 ‘삶’만에 얽매이지 말고, 널리 사회·세계에 눈을 돌라고 남은 인생과 미래사회의 모습에 대해 ‘철학’하는 것,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 볼 수 있는 철학=‘관조theōria’가 새삼 요청되자, 현대문명은 남성 장년 중심의 구미식 ‘강함’ 1극 지배의 세계관에 지탱되고 있다. 이 배경에 있는 사상적인 요인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종교: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인간의 자연지배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함. 신은 인간에 대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라고 명하셨다. (<구약성서> 창세기)

② 철학: 데카르트적 2원론(Cartesian paradigm)⇒인간의 자연지배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 데카르트·뉴턴 패러다임(Cartesian-Newtonian paradigm)

③ 문학: 파우스트적 충동·자아⇒신자유주의형 글로벌리즘의 기본정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표현된 항상 행동하고 의지하는 정신, 전진. 앞으로, 앞으로 끝임 없이 전진하고 확대하기를 지향한다.



한편, 동아시아의 세계관에 특유한 것은 ‘기(氣)’의 철학, 즉 ‘음양사상’-양과 음이라는 대립된 두 가지 기운의 존재·조화가 바로 만물의 생성·변화·질서의 기본이라는 생각-이다.

‘양’의 기운은 남성적인 ‘하늘·빛·밝음·굳셈·불·여름·낮·삶·남성·겉·동물·팽창·전진’ 그리고 ‘능동·공격·활발함·해방·이익’과 같이 ‘강한’ 기운이라고 한다면, ‘음’의 기운은 ‘땅·암혹・어둠·부드러움·물·겨울·밤·죽음·여성·속·식물·수축·후퇴’ ‘수동·방어·침체·억제·손실’ 등 여성적인 ‘약한’의 기운이다.

상반된 음양 두 기운은 항상 상호의존·상호제한·상호전환·상반상성이라는 상관·상보·상상(相待)하는 관계에 있다. 라틴어의 ‘Contraria sunt Complementa’(대립된 양자는 서로를 보완한다)와 마찬가지로 음·양 두 기운은 서로가 서로를 거절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서로가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두 기운 중에서 반쪽이 결여될 때, 거기에는 불가피적이고 심각한 모순, 거대한 갈등·부조화가 생긴다.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양자역학의 시조인 닐스 보어(1885-1962)는 덴마크 최고의 ‘엘리펀트 훈장’을 수여받았을 때 자기 문장을 만들면서 그 중앙의 ‘음양태극도’ 위쪽을 뒤덮듯이 ‘CONTRARIA SUNT COMPLEMENTA’라고 새겨놓은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이 우주의 성립을 해명하는 데에 불가결한 학문으로 여겨지는데, 음양사상은 우주생성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겠다. 만물이 보편적인 원칙과 정의 아래에서 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한민족의 의지가 표상된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도 음양 2기론에 유래한다.

유태 그리스도교적인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자타의 분리·대립을 시인하는 데카르트적 패러다임(Cartesian paradigm)이라는 일종의 오만함을 내재시킨 서양근대는 남성적인 ‘양’ 기운이 배타적으로 1극지배하는 ‘강함’의 문명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천진난만하게 또 열렬히 추구한 일본의 근대화(자본주의화·공업화·도시화·개인주의화·합리화·조직화·관리화·정보화)한 끝에 생긴 것은 미국의 사회학자인 로버트 K. 머턴이 말하는 ‘잠재적 역기능’(latent dysfunction, 참여자·행위자가 의도하지도 않고 예상하지도 않았던 부정적인 효과·작용)으로 세계사에도 유례없는 인구 급감과 ‘노인대국’, 인류 최초의 ‘초고령사회’(65세 인구가 총 인구에 21%를 초과한 사회. 일본은 2007년에 돌입했다)이었다. ‘양’ 기운의 압도적인 1극지배의 밝음과 풍요로움의 이면에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초고령사회’라는 경사스러우면서 무조건 기뻐할 수도 없는, 어떤 의미로 부자연스러운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

양 기운에 대한 음 기운을 현대문명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을 향해 심신이 쇠약해가는 고령자, 그리고 심신적·경제적 취약함 때문에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연소자(그런 의미에서 병자와 장애인, 은둔형 외톨이, 미혼모, 저임금으로 일하는 비정규 직원들도 여기에 포함)일 것이다. 양의 기운, ‘강함’이 지배하는 현대문명에 대해 음의 기운 ‘약함’이라는 대립축, 즉 ‘약함’이라는 새로운 가치축을 일으켜 세울 필요가 있다. 현대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죽어갈 노인(생식 활동을 마친 후의 인간)의 존재의의를 굳이 말하면 ‘넓은 의미의 생식활동’ 즉 그것은 ‘다음세대가 살기 좋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다음세대를 위하여 일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 평생의 친구인 한나 아렌트와 함께 하이데거에게 배우다가, 뒤에 나치스에 가담한 하이데거와 결별한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1903-1993)가 외친 ‘세대간 윤리’(Inter-Generation Ethics)와 겹친다. 현대세대는 미래세대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책임을 진다. 환경을 파괴하거나 자원을 고갈시키는 행위는 미래세대에 대한 가해행위다.

요나스는 <책임이라는 원리─과학기술문명을 위한 윤리학적 시도->(원저 1979년; 일본어판 <責任という原理─科学技術文明のための倫理学の試み-> 加藤尚武 역, 東信堂, 2000)에서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 아니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은 ‘미래의 인류존속’을 위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만약 죽음이 없어진다면 생식도 없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식은 생명의 죽음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노인만의 것이 되고, 젊은이는 없게 될 것이다. 이제 서로 아는 사람들만의 세계에서 예전에는 없었던 사람에게 놀랄 일도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고 하는 무정한 섭리 속에는 아마 다음과 같은 지혜가 포함되고 있다. 즉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젊은이의 순진함, 솔직함, 그리고 열의 안에 있는 영원히 새로운 약속을 우리에게 해준다. 그것과 더불어 타자성(他者性) 그 자체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온다. 이 타자성의 유입을 대신하는 것은, 경험이 늘어나고 그 축적이 증대하는 것의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 경험이 축적해도 세계를 처음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유례없는 특권을 되찾아주지 않는다. 플라톤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한 ‘놀람’을, 어린이가 가진 호기심을 다시 체험시켜주지는 않는다. 어린이의 호기심은 어른의 지적충동으로 이행할 때까지 살아남는 일은 아주 드물고, 어른이 되고 나면 마비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는 것’은 ‘끊임없이 다시 끝나는 것’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다.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는 것’은 인류에게 희망이며 지루한 일상사에 침몰하는 것에서 인류를 보호해주는 호기이자 인류가 생명의 자발성을 지키는 호기일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처럼 “당신의 의지의 격률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가 아니라, 신시대의 정언명법은 “당신의 행위가 초래하는 인과적 결과가 지구상에서 참으로 인간의 이름에 걸맞은 생명이 영속하는 것과 서로 어울리도록 행동하라”가 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지구상에서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을 위험에 노출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자식’으로서 ‘자연의 지속, 자연의 재생산에 대한 의무’, ‘장래의 인류 생존에 대한 의무’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자가 자신의 장수와 건강, 명예와 재산, 혹은 지나치게 칭찬되는 ‘종활’ 따위에 흔들리고, 개인적인 이익과 소원에 얽매여서 거기에만 머물고 에너지를 쏟는다면 너무나 한심하다. 장래세대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 즉 ‘효(孝)’-생명연쇄성(Generativity)-의 활동에 만년의 에너지의 몇 할(割)이라도 쏟아야 할 것이다.

유학의 ‘효(孝)’는 늙을 ‘노’(耂 =老; 죽음을 향하는 존재/죽음)와 아들 ‘자’(子; 삶을 향하는 존재/삶)로 상사의 방향이 서로 반대되는 ‘음양상반(陰陽相反)’의 일체화, 다른 세대의 ‘약한’ 자끼리의 결합, 즉 ‘음양동근(陰陽同根)’을 나타낸 문자이다.

그것은 미국의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제네라티비티’(Generativity)과 더불어 변증법의 창시자로 지목되는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전544-전484년)가 말한 ‘파린토로포스 하모니’(palintropos harmonie, 서로 상반된 쪽으로 작용되는 힘의 조화·일체화)와 같은 뜻이다. 본체와 시위라는 대립되는 것이 서로 끌어당김으로써 제 일을 하게 된다. 마치 활이나 하프처럼 말이다.

“대립하는 것이 화합하고 협동(協同)하는 것이며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생기고, 만물은 투쟁에 의해 생긴다.”

삶과 죽음, 삶과 늙음, 늙은이와 젊은이라는 상반된 것들이 서로 반대쪽으로 끌어당기는 것(파린토노스palintonos)이라는 ‘파린토노스 하모니’(palintonos harmonie)가 되지 말아야 된다. 그렇지 않고 서로 반대로 일하는 것(파린토로포스palintropos)이라는 ‘파린토로포스 하모니’(palintropos harmonie) 즉 상반된 것들끼리의 상호작용, 서로 반대쪽으로 일하는 것들에 의한 조화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니딕트는 미국에서는 장년기가 ‘최대의 자유와 제멋’을 누리는 사회인 것과 정반대로, 일본은 아기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와 제멋’을 허용하는 반면에 장년기 남녀에게 ‘최대의 속박’을 주는 사회라고 진단했다.

가톨릭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의 <구일문화비교>(<歐日文化比較>, 1585) 이래, 일본인의 생활양식과 풍속이 구미사회의 그것과는 ‘정반대’라는 관찰은 아주 많고, 메이지시대 초기에 일본에 온 영국인 바질 H. 체임벌린은 그것을 ‘Topsy-turvydom’(거꾸로)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日本事物誌>, 1890)



일본인의 생활곡선은 미국의 생활곡선과 딱 반대(opposite fashion to do)이다. 그것은 밑바닥이 얕은 큰 U자형 곡선이며, 아기와 노인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제멋이 허용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구속이 늘어가고 딱 결혼 전후 무렵에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가장 적어진다. 이 밑바닥은 장년기를 통해 몇 십 년 동안 계속되지만, 곡선은 그 후 다시 점차 올라가고 60세를 지난 사람은 어린아이와 거의 똑같이 부끄러움이나 세상의 소문에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미국에서 우리는 이 곡선이 거꾸로 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장년기가 자유와 자발성의 정점이 된다. 일본인은 가장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시기에 이른 남녀에게 최대의 속박을 주는데, 이것은 결코 이러한 속박이 평생 동안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년기와 노년기는 ‘자유로운 영역’이다. (<국화와 칼>, 원저 1946; 일본어판 長谷川松治 역, 社会思想社, 1972)



일본과 미국의 노소와 장년기를 비교하면서 미국에서는 최대의 자유가 장년기에 주어지는 데 반해, 일본에서는 아기와 노인에게 그것이 허용된다. 한쪽은 자유의 허용도가 장년기를 정점으로 하는 산 모양인데 반해, 한쪽은 양쪽 끝의 노소가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장년기가 밑바닥에 내려가고 자기 억제가 요구되는 U자형을 이룬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사회의 벡터가 장년기와 노소로 거꾸로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장년기의 역동성=‘양의 기운’으로 세계를 주도하고, 일본을 포함한 세계가 나란히 미국을 추종하는 구도가 20세기 중반부터 계속되어 왔다면, 여기에 오늘날의 가로막힌 문명, 지구온난화와 격차·분단사회 출현의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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