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폐교처분

정규 수업 및 학급담임은 일본인 교사에 한정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무리가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아라카와(荒川)의 조선인학교는 12학급에 일본인 교사가 7명밖에 없어 학급 수보다도 일본인 교사의 수가 적었다. 이는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민족교육의 현실이라는 취지에서 지금까지 어느 학교에서도 조선인 교사가 학급 담임을 맡았고, 정규 수업의 반 이상을 담당함으로써 비로소 교육다운 교육이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기계적으로 조선인 교사의 담당 시간을 과외만으로 국한시켜 온 것이므로 일본인 교사의 노동량이 점점 증가해서 부담이 많아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된 것은 물론, 일본인 교사 한 사람이 2학급을 담임하기도 하고, 정규 수업도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학교를 교육의 장에서 학생 관리의 장으로 급속히 바꾸어져 가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학급 담임을 일본인 교사로 전담한 것은 조선인 학생과의 관계를 차갑게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어를 충분히 말할 수 없는 부모와의 접촉을 단절시키고, 조선인들에게는 교육의 의미를 감소시키는 결과였다.

또 소학교에서는 1교원 2학급으로 되면서 수업조차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비교육적인 사태가 생기고, 조선인·일본인 교사도 PTA 측도 조선인 교사의 활동 영역 확대를 누차요청하였다. 그러나 도교위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세목 위반의 예증으로 간주하였다.

게다가 조선어에 의한 수업을 과외로 한정시키고, 정규수업은 물론 자치회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일본어 사용을 강제해 왔으므로 학생의 조선어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특히 소학교 저학년에는 조선어의 인사말조차 잊어버리는 듯한 상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교과서도 한 권 한 권 도교위의 검인 받은 것을 사용하고, 특히 과외수업 교재에 대한 검열은 엄격하여, 소학교 6학년생용의 조선어에는 ‘퀴리부인’이라는 단원이 삭제된 상황이었다.

중·고교에서는 정식으로 수업시간을 작성해 두지 않고 임시 시간을 짜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세목의 실시는 도립 조선인학교 현장에서 민족교육의 실질을 계속 박탈해 갔다. 뿐만 아니라 직제(職制)의 힘이 강화되어 조선인 교사와 일본인 교사의 분열이나 일본인 교사 상호간의 대립까지 만들어져, 직장의 공기는 어둡게 되었다.

폐교는 조선인 교사의 해고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었고, 일본인 교사의 해고로도 진행되었으므로 도교위는 직제 해고 조치를 이용하면서 조합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앞잡이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인 교사 사이에서는 무심코 이야기한 것이 당국에 누설된다는 불안에서 동료 사이조차 신용할 수 없는 공기가 감돌았다. 또, 도교위에 있는 것 없는 것을 모두다 일러바치는 일본인 교사도 나오기도 했다.

가능한 세목을 지키려고 한 결과 조선인 학교로서의 본질은 이처럼 붕괴되어 갔다. 이러한 희생을 치러며, 지시한 세목을 수행하고 “조선인 학교가 시작된 이래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대폭적인 실행의 전환을 기하여, 폐교를 운운하는 이유만은 없어졌다고 학교 관계자들은 겨우 숨을 돌렸다”는 것이다(<민족의 아이>).

그런데 도교위는 이와 같은 엄격하지 않는 관찰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교육청의 담당관리를 파견해서 종종 ‘현장 조사’를 하고, 그 때마다 “도의 지시를 위반한 사실은 없는가 하고 교장은 비롯하여 일본인 교원을 협박하여 사건을 조작할 자료를 수집”하였다(9월부 항의 성명).

그리고 결국 “도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일본인 교원은 모두 규탄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내외교육판’ 1954년 7월 20일).

이와 같은 보고를 받고 도교위는 도립 조선인 학교 문제에 끝장 낼 ‘최종적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고 폐교 처분이라는 구체적 작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수속이 학교 및 PTA에 대한 경고였다. 도교위는 5월 28일에 ‘학교의 운영에 대해서’ 통달을 발하고,

“<전략> 지금까지도 본 위원회가 학교장에게 내린 지시사항의 많은 부분이 완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본 위원회는 폐교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앞의 지시 사항이 즉시 완전히 실시하여 이로서 학교 운영이 정상화 되도록 귀하의 협력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취지를 통고했다.

그러나 그 통고가 있었다고 해서, 예를 들면 정원을 초과한 신입생을 탈락 시키는 일 등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세목은 위반할 수 밖에 없었다.

경고에 이어서 6월 30일에는 조선인 교사(신분상은 전임강사 또는 시간강사) 46명의 해고를 일방적으로 통지해 왔다. 당시 도립 초·중·고에 도교위에서 사령을 받은 조선인 교사는 103명이었지만, 그 반수 가까이는 정규수업을 담당할 수 없게 되었고, 또 면허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7월 1일부터 출근하지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분명 강사는 3개월 계약이므로 사무적으로는 갱신을 거부한 데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도교위는 발족이래 사실상의 전임교원으로서 계속 활동해 왔던 조선인 교사에게 이와 같은 조치를 내린 것은조선인 자녀 교육을 단절시키겠다는 의사 표시이고, 분명 폐교를 실시할 경우 예상되는 저항을 줄이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여름방학 중인 8월 6일에는 오타치(大達) 문부상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인학교를 폐교시킬 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이와 같은 조치는 “전후의 특수 사정으로 무시되어 온 일본의 교육주권을 회복하는데 불과하다”는 취지의 담화를 표명((朝日新聞 1954년 8월 6일.) 폐교가 정부의 방침임을 밝히며, 도교위를 옹호하였다.
그리고 9월에 접어들자 폐교가 내정된 것을 언론을 통해서 유포시키고, 폐교가 마치 기정사실화된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와 동시에 도교위는 치안 당국과 상담을 거듭하고 폐교 후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9월 21일자의 ‘아사히신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8일에 도교육청 측은 문부성 외에 경찰청, 경시청, 내각 조사실, 공안조사청의 각 대표와 내각 조사실에서 협의회를 열고, 폐교 후의 구체적인 대책을 협의했다. 거기에서 각종 학교에 이관하는 것과 폐교 후에도 재학생의 경비만을 부담하는 2개의 방침을 정했다. 이후의 경과를 보면 관료 차원에서 결정한 것은 그대로 도교위·도의회에서 승인되었으나, 그것이야 어쨌든간에 이 회합에서 각종 학교로 이관하고 사립학교로는 이관할 수 없는 이유가 거론되었다. 
즉 하나는 “조선인학교 교육내용은 일본의 학교 교육법을 무시하고 민족교육을 하고 있는 점이 많다”고 하므로 사립학교로 이관하더라도 교육법을 무시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재일 외국인이 일본 교육법에 의해 일본의 의무교육을 받는 것은 비정상적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인 교육을 귀찮은 혹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편의적 발상에서 각종학교로의 이관 방침이 정해진 것이었다. 사실 학교 운영에 간섭을 받지 않고, 민족교육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현행의 학교제도 중에서는 각종학교 형식이 보다 적합하였다. 그러나 그 이관 동기나 목적이 문제였다. 동기는 귀찮은 애물단지를 떨어 내버린다는 성질을 갖고 있었고, 목적은 폐교 반대를 주장한 조선인 측의 운동을 파괴한다는 노골적인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포석을 깔아 놓은 후에 10월 5일 도교위는 PTA 연합회 앞으로 “도립 조선인학교는 1955년 3월 31일을 기한으로 폐교한다”고 통고했다.
그 본문에는 도립 조선인학교 형태는 “어디까지나 점령하라는 비정상적인 사회 정세하에 서 택한 극히 특수하고 부득이한 잠정 조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 일시적 성격을 설명한 후, 폐교의 이유를 두 가지로 들었다.
첫째, 공비를 들여 외국인을 교육은 비합법이라는 것이다.
“원래 도립학교에는 외국인만을 수용하여, 외국인을 위한 특수교육을 행하는 것은 극히 변칙적이니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 이후 조속히 조선인 자녀를 위한 특수교육도 조선인의 부담과 책임으로 행하는 도립조선인학교는 폐지되어야 했다. 그런데 강화조약 발표된지 이미 2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종전의 상태를 계속하며 도민의 부담으로 과거와 변함없이 도립조선인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이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조선인 교육은 허락할 수 없다는 일반인에게 먹혀들기 쉬운 민족 이기주의 논리가 외국인 신분을 구실 삼아 역사를 사상(捨象)한 채 뻔뻔스럽게도 얼굴을 쳐든 것이다.
둘째로 조선인학교 ‘편향교육’=민족교육 실시를 허용할 수 없다는 비난이다. 
“되돌아 보건대 지난 5개년에 걸쳐 도쿄도는 잠정조치라고는 하나 도코도에 거주하는 조선인 자녀의 교육을 위해, 특히 도립조선인학교를 경영하고, 수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계속 노력을 경주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사이 조선인 측의 협력을 얻지 못해, 도립학교로서의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인 점이다”고 한다. 
여기서는 6항목과 세목협정을 위반한 데에 대한 비난도 포함되어 있지만, 도교위 측이 목표로 하는 동화교육이 좌절된 것에 대한 원망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인학교를 폐교시킨 이 두 가지 이유로는 관리자 측에서 본 이유였고, 조선인 측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상과 같은 경위를 생각해 보건대, 조선인학교를 도립학교로 지속적인 경영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도립조선인학교는 1954년도로 이를 폐지한다. 1955년 4월 1일 이후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자녀의 교육은 조선인 스스로의 손에 의한 사립학교로 실시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고 일방적으로 결말짓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도립조선인학교 폐교 처분의 방침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부언하지만, 이 때에 모토지마(本島) 도교육장은 다른 부현에 있는 공립분교 형태의 조선인학교를 폐교시킨 통달이 문부성에서 나올 것이라 했지만(‘朝日新聞’ 1954년 9월 21일), 설치 부현의 조치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 오사카의 공립 이마리중학교(今里中)의 경우는 귀국 운동이 높아져 가는 배경으로 조선인 측으로부터 자주학교의 이관 요구가 제출되어, 1961년 9월에 전환이 이루어졌고(이 사이의 경과는 坂本淸泉, ‘공립 조선인 학교의 자주 학교 이관 운동’, <생활교육운동론> 1972년에 상세함), 가나가와·아이치·효고에 있던 16교의 공립분교는 한일조약 체결 시에 나온 문부차관 통달(공립분교 폐지의 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에 기초해서 1966년 3월까지 자주학교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단 공립조선인 학교가 조선인 교육의 지배적인 형태였던 도쿄도의 경우와 부분적인 형태였던 다른 부현의 경우는 정부나 조선인 측에서 각각 그 무게의 차이가 달랐다. 따라서 이 문제가 정치화되는 범위에도 차이가 있었고, 당시로서는 도립조선인학교에 대한 각별한 비중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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