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이충호
이충호

 

[동양일보]● 조선총련의 교육 방침

조선총련의 창립은 조선인학교를 다시 부흥하는 조직적이고, 운동적인 토대가 되었다. 조선총련의 지도하에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일본의 패전 후(1945)에 조선인학교 창설 운동의 고양기에 이어 제2의 고양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전쟁 이전의 동화교육 체제의 상흔(傷痕)에다 1948년 이래의 동화교육에 대한 공격을 받은 상흔이 중첩되어 깊이 아로새겨졌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침투는 더욱 심화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악조건을 물리치고 민족교육을 모든 조선인 자녀에게 확대해 간 것은 조국에서의 따뜻한 원조라고 하는 유리한 조건이 새롭게 가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제1차 고양기에 비해서 보다 복잡한 과제로 된 것처럼 보인다.

분명 조선총련의 창립은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일본의 혁명운동에 대해서도 조선 공민으로서의 주체를 내세움으로써 그 한 획을 그었다. 특히 일본 정부의 조선인 교육정책과 관계에서는 ‘강화’ 이래 재일조선인을 외국인으로서 간주함으로써 자녀의 취학 의무가 없어짐과 동시에 조선인학교를 건설하고 이 학교에 취학하는 것을 법적으로 방해할 조건이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총련의 창립은 이러한 새로운 정책 환경에 따라 이 조건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또 이러한 주체를 확립함으로써 재일조선인 교육의 존재 양상은 흔들림이 없이 조리를 갖추게 되었고, 교육의 주체가 확실하게 정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육의 일환으로 일관되었다는 자각이 이전보다 더 심화하고, 그 뒷받침을 받으며, 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정확한 권리의 하나인 ‘교육권’이라는 파악이 확립되고 이에 조응한 교육의 목적· 방법· 운동이 탐구되었다.

그러나 조국과는 환경이 다른 일본에서 전전․전후에 재일조선인에게 강제로 침투된 동화교육의 현실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탈피하여 조선 공민으로서 우뚝 설 수 있는 민족적․민주적인 인간으로 변혁시키는 과정이 바로 교육의 중심에 놓여야 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조국과 같다 하더라도 거기에 따른 인간 형성의 과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선총련의 교육 방침은 이와 같은 일본의 실정에 맞추어서 구상되어야 했다.

조선총련 ‘綱領’ 제4항에는 “우리는 제일 조선 동포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우회해서 총결집시킨다”고 하는 제1항에 의해서 민족교육의 과제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제일 조선 동포의 자녀에 대해서 모국어로 민주 민족교육을 하고, 일반 성인 중에 남아 있는 식민지 노예 사상과 봉건적 유습을 타파하고, 문맹을 퇴치하여 민족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고 되어 있다.

즉 민주주의적으로 민족 주체성을 가진 조선 공민의 육성이야말로 민족교육의 과제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인 조국의 교육 목적과 같지 않다.

이와 같이 ‘강령’에 있어서조차 해방 후 10년을 지나간 시기에 다시 재일조선인에게 보인 ‘일본인화’란 노예 사상의 극복을 민족교육의 중심 과제로 해서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동화교육 강제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두 진술해 왔지만, 그 결과 재일조선인 사이에 비 조선인 화의 현실이 널리 확산하였다.

한덕수(韓德銖) 조선총련 의장은 그 상황의 특질을 3가지로 지적하고 있다.(韓德銖, <재일조선인 운동의 전환에 대해서> 1955년 3월)

첫째 “제일 조선 동포의 대다수가 광복 후 10년이 지난 오늘에서도 일제 통치의 해독인 문맹 상태와 봉건적 유습과 노예 사상이 암흑 속에 갇혀 있다”고 하는 식민지 지배의 유산이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두 번째로 “미제국주의자는 조선 인민을 계속 문맹 상태에 두고자 일본의 지배층을 꾀어서 동포 자녀에 대한 민주적 민족교육을 파괴하고,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다시 빼앗고 있다”고 하는 지금의 지배자적 공격이 있다. 따라서 셋째는 “민주적 민족교육에 대한 파괴는 …… (중략)…… 내부의 노예 사상에 의해서도 파괴되고 있다”는 민족 주체의 약함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상태가 발생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다수의 재일조선인은 전전(戰前)의 식민지 시대뿐만이 아니고, 전후 독립의 시대에도 실질적으로는 ‘동화교육’의 피해를 받고 있다고 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민족교육은 이 현실을 피해 지나갈 수는 없다. 따라서 ‘식민지인’적인 인식의 극복과 일본인화에서의 탈피를 통해 조선 공민을 육성하는 코스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기본 방침은 조선총련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활동방침’에 구체화 되어 있다.

그것은 “민주․민족교육을 강화 발전시키자”고 하는 1항을 두고, 비조선인 화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재일청소년 모두를 공화국의 충실한 자녀로서 교육 교양”해서 변혁한다고 하는 민족교육의 목적을 수렴되는 5개의 활동방침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인학교 재건과 정비에 활기가 넘쳐나고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이 항목의 제1절에 2개의 기본적 태도를 명기하고 있다. 하나는 “공화국 헌법과 교육 관계의 제 법규를 준수하고, 전반적인 민주 민족교육을 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이고”라고 하는 교육의 내실과 관계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일본 정부의 동화교육 정책과 “이승만 도당의 교육권 탈취 음모”에 대결해서 민족교육의 권리를 “일본 인민의 지지 하에(일본 사람과의 투쟁하는 관계는 아니다―인용자 보충)” 지켜내고자 하는 교육 운동과 관련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인학교에 대한 내정간섭도 조선인학교를 지키기 위해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도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는 자주적인 자세의 표명이었다.

이와 같이 민족교육의 진로를 제시한 후, ‘생활 방침’의 구체적인 수단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첫째는 “교육의 질을 높이자”고 하는 제안인데, 그것이야말로 “재일조선인의 교육 운동을 발전시킨 결정적인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다.

교육의 질 향상이란, 모국어의 학습· 사용을 축으로 하고, 공화국의 교육 성과를 섭취하면서 학생들을 “사상적으로 고상한 국제주의적 애국 사상을 바탕으로 무장시키고, 생활면에서는 조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학생 규칙’에 기초한 자각적인 규율과 민주적인 도덕을 확립하고, 학식 면에서는 읽기․쓰기․산수를 중심으로 한 기초학력을 향상”하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서 한편으로는 ‘종래의 잘못된 정치 편향을 시정’해 나감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학부모가 우리 학교에 대해 갖는 형식적인 이해(학교의 외관만을 보고 일본의 학교가 우수하다고 하는 생각)를 시정”하여 새로운 ‘양적인 발전’을 창출해 내자고 정한 것이다.

두 번째는 “학교 교육을 강화하자”는 방침이다.

일본 정부에 의해 탄압과 폐쇄된 조선인학교를 다시 자력으로 신설하고, 민족교육의 기회를 확충․정비해 가는 것이 여기에서 중심 과제였다. 이 움직임은 ‘강화’ 후의 민전(民戰) 제7차 중앙위(52년 10월)에서 “일본의 권력기관에 대한 교육비의 획득 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편향을 시정한 후 서서히 구체화해 갔지만, 여기서부터는 그것의 전 조직을 들어서 과제로 삼은 것이다. 또한, 이들 조선인학교의 사회적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자주학교의 법인화와 각종 학교 인가 수속의 추진”도 버금가는 과제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조선인학교 건설의 확대와 동시에 일본인 학교에 재학한 조선인 학생의 조선인학교로 전·입학을 권하고, 가정의 빈곤 등으로 학교에 올 수 없는 청소년에 대해서 취학 보장을 하는 것도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 이상의 일이 민족교육의 기회를 확충하기 위한 본류의 형성이라고 한다면, 그 밖에도 가능한 한 민족교육의 기회를 넓혀 가기 위해,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공립학교와 민족학급에서 우리의 교육 내용이 간섭을 받지 않는 한 현상을 유지한다”는 방향 제시도 필요했다.

나아가 “오사카, 교토, 도쿄 등에 있는 소수의 민단 계통의 학생, 교원, 학부모 모두 공통의 민족교육권을 지키기 위해 상호 협의할 것”도 필요한 민족적 자세였다. 재일조선인 자녀에게 민족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능한 한 보장해 주고 싶은 것이 최대의 주안점이 되었다.

세 번째는 10만의 청년과 30만의 여성에 대한 교육 교양 사업의 강화이다. 지금까지 청년교육에서는 “조국의 혁명을 수행하는 관점”은 약하고, “청년들에게 일본 언어와 문자로 일본의 정세와 혁명론을 학습하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다.

이에 대해 “앞으로 우리는 이런 실수를 시정하여 청년학원을 각지에 건설하고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조국의 혁명노선을 확실히 하여, 김일성 원수의 모든 노작을 깊이 연구하고, 공화국의 수호 발전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마음으로부터 생명을 다 바쳐 투쟁하는 애국적인 인재를 대량으로 양성하는 것에 주력하자”라고 정하였다. 그와 동시에 “각지에 초급․중급․생활학교를 더욱 많이 세워, 뒤떨어진 여성의 교양 사업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 사업의 시행에는 그 초점을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봉건적 유습 및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노예 사상의 낡은 잔재를 없애고, 공화국 정부와 경애하는 수령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충실한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라서 생활할 줄 아는 공화국(북한) 공민의 도덕적 품성을 높인다”는 데 두었다.

어른들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며, 동시에 어른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교육력에 한계가 있고, 그것이 뿌리내릴 수 없는 것이다.

넷째로 한국전쟁 시대의 학교 파괴는 또 조직의 교육행정 체계의 해체를 초래했는데, 그것을 재건하여 “조선총련 중앙과 지방에 교육 전문부서를 설치” 교육행정의 체계 확립을 계획했다. 이것이 확립되지 않고서는 민족교육의 통일성을 달성할 수 없다.

다섯째로 “육영사업과 진학 대책의 강화”를 들어, 고등교육 문제 해결에 노력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일반 유지에 의한 장학기관을 설치”하여 육영사업을 강화함과 동시에 일본의 여러 대학에 재일조선인 학생이 유학생 대우로 공부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아울러 “조국에 진학하는 학생을 보내는 운동”의 전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고등교육 기관을 창설할 방침을 분명히 세웠고, “현존의 조선 사범전문학교는 장래 대학 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육성 강화할 것”이라고 명기했다. 과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자세가 그 중심에 놓인 것이다.

조선총련의 창립과 그에 기초한 이상과 같은 교육과정의 설정은 민족교육 재건의 새로운 노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10년간의 교육 축적을 살려 가면서 재일조선인은 그 토대 아래에 다시 교육 재건에 진력했다. 그로부터 한일조약 체결까지의 10년간, 일본 정부에서 방해정책은 계속되었으나, 직접적인 탄압정책은 받지 않는 상황에서 재건의 발걸음을 계속했다.



●민족교육의 발전<1>

다시 제1차 고양기를 방불시키는 듯한 학교 만들기의 운동이 전개되고, 일본 각지에 조선인 소․중․고교가 창설 혹은 개설하게 되었다. 학교 만들기 운동은 재일조선인이 살면서 학교가 설치되지 않은 공백 지대가 있는 한 학교를 만들었고, 그 결과는 현재까지 계속되었던 운동이다.

그것은 또 기본적으로는 재일조선인 대중에게 직접 의존하는 수밖에는 없는 운동이다. 그 모금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상공인들이 큰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그것도 가난한 대중의 참여가 높을 때야말로 그렇게 될 수가 있었다.

기둥 하나 기부하는 운동(東北 초중급학교), 건축 기간 중 술, 담배를 끊고, 그 몫으로 모금하도록 시도(히뢰마 초중급학교), 교실 하나를 기부하기 시도(히가시고베 초중급학교, 상공인의 경우) 등 가능한 힘을 다해 학교를 세워 간 것이다. 센다이에서는 돈이 없으므로 대신에 걸레 300장을 만들어서 기부한 할머니도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든 학교이므로 거기에 관계된 재일조선인은 누구라도 학교를 자신의 집같이 소중히 하고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즉 자기들이 모든 힘을 모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관청의 학교’라고 하는 일본에 전통화된 학교 관과는 이질적인 ‘자기들의 학교’라고 하는 인민적인 학교 관을 갖고 있었다.

제2차로 학교 만들기 운동이 패전 직후의 제1차 학교 만들기 운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조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원조가 더해진 점이며, 그와 같은 성과의 한 표현으로서 19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물적인 측면만 보아도 목조 건물이던 학교가 멋진 철조로 바뀌었다. 과거 ‘조선학교는 걸레 학교!”라고 불리는 상황이 없어졌다. 이렇게 된 것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조국에서의 교육 원조비라는 격려도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공화국의 해외 공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학교를 건설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