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종 수필가

유성종 수필가

[동양일보]올해의 더위는 견디기 어렵다. 여간해서는 선풍기와 냉방장치를 쓰지 않는 내가 ‘성경쓰기’의 일과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날이다.

그래서 ‘만종록(萬鍾祿)을 준대도 과거공부를 할 수 없는 더위를 겪고, 조석으로 불어오는 한줄기 산들바람으로 청추(淸秋)를 느낀다.’는 선인(先人)의 말대로, 그 기다림의 사이에 부드러운 읽을거리(소설이나 시서)를 뒤적이다가,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1125- 1209)의 ‘유산서촌(遊山西村)’을 만났다.



'산 너머 서촌에 노닐다'

웃지 마라, 섣달에 빚은 농가의 탁주 흐림을 莫笑農家臘酒渾

풍년드니 과객에게 가축 잡아 공궤하기 족하네. 豊年留客足鷄豚

산 겹치고 시냇물 꼬여 길 없을 것 걱정했는데 山重水複疑無路

버들잎 짙고 산꽃이 흐드러진 곳에 또 마을 하나 있네. 柳暗花明又一村

피리와 북소리 따르니 봄 축제가 가까운가 簫鼓追隨春社近

옷차림은 간소하고 질박하나 옛 풍류가 남아 있구나. 衣冠簡朴古風存

앞으로도 만약 달빛 타는 한가로움이 허락된다면 從今若許閑乘月

무시로 지팡이 짚고 가서 문을 두드리리라. 往杖無時夜叩門

이라는 시이다.



육유는 과거에 장원(壯元)하고도 성시(省試=구술시험)에서는 재상의 간계로 급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찍힌 환로(宦路)는 순탄하지 않았다. 더구나 금(金)나라의 침공에는 철저한 주전론자였기 때문에, 애국시인으로 평가되었으나 그만큼 처세는 어려웠다. 남송 4대가의 으뜸으로 평생에 9,200 수의 시를 남겼고, 귀촌생활과 사람의 삶을 따뜻한 눈으로 읊었다.

이 시는 우연히 찾은 벽지고촌에서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桃花源)을 방불케 하는 이상향을 본 것인데, 도화원이 상상의 땅이라면 이 산마을은 실재하는 곳이라, 다시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것이 시인의 즐거움이요 희망이요 미래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하나의 공간을 그리면서도, 기승전결의 행간을 따라 가면 자기의 불행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귀촌한 선비의 말년에 새로운 활로(活路)를 찾는 소망이 담겨 있다. 세속의 군더더기를 말끔히 씻은 허심(虛心)의 꿈이 얼마나 시원한가!

옛 철인(哲人)들은 말했다.

노자(老子)는 ‘대도(大道)를 잃으면 사랑(仁)과 정의(義)의 도력(道力)이 강조되고, 거짓된 지혜가 발달하면 인위적 규제가 자꾸 만들어진다.’고—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고 있다— 경계하였다.

장자(莊子)는 ‘지인(至人)은 스스로가 없다.’고—모든 도를 체득한 사람은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연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인간적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간파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지도자가 있는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초인(超人=인간적 강자)을 꿈꾸었으나, 중년에 이미 반기독교주의자가 되었고,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을 죽여 버렸다.’고 선언했다. 말년(1983-1988)에 가서는 자기과신에 빠져,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현명한가?’,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우수한 책을 쓰는가?’ 등으로 과대망상에 이르고, 정신착란으로 쓰러졌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지도자가 없는지 살펴봐야 할 듯하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여 자기를 바치는 특출한 지도자가 없다. 어느 시대인들 전쟁이 없었나? 어느 세상인들 전염병이 없었나? 그런 재앙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소망의 이어짐이 인간살이인데, 그 전진의 방략이 없이 그저 권력과 부귀에 취하여 명예나 탐하는 지도자를 우리는 역겨워하고 따르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도(正道)를 모르고 궤도를 벗어난 사람들이 계속 국민을 속이고, 자기들의 행태를 거짓으로 꾸며간다면, 말없는 국민은 분노하고 폭발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요새 열 올리고 있는 대선(大選)주자(走者)라는 위인(爲人)들, 특히 여당사람들이 조석으로 말을 바꾸면서 정책이 아닌 흠집 내기로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꼴로,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시각각 방방곡곡에서 전 국민에게 퍼붓고 있는 그 방약무인(傍若無人)하고 염치를 모르는 꼴사나운 작태는 실망과 낙담을 넘어서 비관과 배척을 사무치게 부르고 있는나팔소리이다. 국민은 그러한 낡아빠진 반진보적 행티에 진저리치고 넌더리낸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와 겨레의 명운을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답답하다. 이 더위가 더 뜨거운 것이다.

야당도 제발 여당의 저 추태를 따라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후보자 선출에서 개인적인 흠집잡기는 안했으면 좋겠다. 언론도 보도윤리의 선진화로 어느 계파나 개인적인 이익을 초월하여 정리구성하고 발표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만 개혁하면 선진국에 손색이 없다는 수준이다. 곧 선진국에 모자라는 조건 하나는 정치의 후진성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정치한다는 이들이여, 진정 애국(愛國)하고 애족(愛族)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선진국으로 넘어가게 자신(自身)을 성찰(省察)해 다오!

우리의 더위는 코로나19 사태에다가 왜곡(歪曲)되고 곡용(曲用)되고 오용(誤用)되는 있는 시끄러운 정치 풍토가 겹치어서 더 뜨겁다. 염천(炎天) 혹서(酷暑)에 패연(沛然)히 쏟아지는 소나기가 그립다.

산 너머 남촌에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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