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1966년 6월에 제출 보고된 ‘일본의 안전보장에 관한 중간보고’에서는 이러한 재일조선인=북한 스파이=간접 침략의 담당자=안보체계의 장해라는 도식 안에 조선인 학교도 정확히 들어 있었다.

즉 위의 보고서는 ‘간접 침략에 의한 위험은 현상적으로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언급한 후, 그 담당자로서 ‘엄중한 경계를 필요가 있는 것은 북한 정권에서의 파괴적·혁명적인 공작이다. 특히 일본에 다수 존재하고 있는 북한계 학교는 일본에서 반일교육·혁명교육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본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서 정부·야당의 조선인 학교 관의 원형 및 안보체제 확립을 위해 조선인 학교 억압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를 이루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안보조사회, 나아가 문교부 회의 우파그룹인 사토(佐藤)내각 하에서 자민당의 주류파를 형성하여 한일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그 구체화로써 조선인 학교 억압에 착수하여 문부 차관 통달을 거쳐 ‘외국인 학교제도’ 창설의 법안을 만들어 간 것이다.



●한일조약과 재일조선인 교육(1)

-동화=기민정책의 승인

안보체제 강화는 조선인 학교에 대한 통제의 강화를 요구했다. 재일조선인 청소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향에서 분리한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도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를 더욱 유효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대로 동화교육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최상의 수단이었다.

이 점에서도 한일 양국 정부는 합의에 도달했다. 한일조약은 이를 국제적으로 합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일회담은 일본과 한국의 국교 수립을 주안점으로 하여 1951년 10월 예비회담을 거쳐 1952년 2월의 제1차 회담을 처음으로 이후 14년간 종종 중단해 가면서 7차에 걸쳐 회담을 거듭하여 1965년 6월에 정식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교섭의 내용은 (1)한일의 기본 관계의 「정상화」 (2)식민지 통치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대일 재산청구권 (3)재일조선인의 처우·법적 지위 (4)문화재 반환·어업(특히 이승만라인 문제) 등이고, 논리적으로는 식민지 통치 문제를 청산하고, 국교회복 및 그에 동반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한반도 민중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생각하면, 고립된 한국 정부만을 상대로 이 문제를 형식적으로 청산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나 일방적이고, 문제의 진정한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한일회담 타결의 정치적 의도는 ‘이 나라(한국)에 경제적 식민지주의의 질곡을 억누르고’(고려대학생 ‘선언문’ 1964년 3월), ‘남한을 미·일 제국주의의 이중적인 식민지로 전락시키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성명’ 1965년 4월) 그렇게 함으로써 허약한 박정희 정권에 개입해서 ‘전쟁과 침략과 민족분열’의 체제를 보다 강화하는 데 있었다.

교섭에서 일본 정부는 그 요구를 한국 정부에 강요한 입장에 섰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한일조약에서는 식민지 통치의 청산 문제를 유보한 채, 아니 유보했다기보다는 일본은 구래(舊來)의 식민지 통치의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 시각에서 한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하고, 국교회복을 비롯하여 기타의 제 문제를 결정했다.

그것은 한반도 전 민중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식민지 통치 문제를 청산하는 길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한일조약 전체의 성질은 재산청구권 문제를 경제협력 문제로 살짝 바꾸어 버린 듯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 책임을 불문에 부치고, 그 상흔(傷痕)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심화시킴과 동시에 일본이 한국을 재침략의 길을 열어 주는 불평등조약임이 틀림없었다.

재일조선인 교육에 관한 결정은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협정에서 이루어졌다. 식민지 통치의 역사 그 자체가 만들어 낸 이 문제에서도 식민지 통치를 매듭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눈앞의 정치적 이익에 따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재일조선인 교육에 있어서 한일조약이란 양국 정부가 동화교육 정책을 상호 인정하여, 이를 합법적인 것으로 서로 확인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한국 정부는 동화교육을 인정함으로써 재일조선인 청소년을 일본에 방치하는 자세를 나타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재일조선인 교육의 역사에서 새로운 정책 현상이다.

한일조약 가운데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협정에는 재일조선인을 대한민국 국민과 국적이 없는 조선인으로 정치적으로 선별하고, 전자에게는 영주권을 인정하고, 후자는 무권리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전자의 자녀들에 관해서는 일본인 학교에 취학 촉진의 방향이 명기되었다.

즉 그 제 4조에서 ‘일본에 영주할 것을 허락받은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일본에서의 교육·생활 보호 및 국민건강보험에 관한 사항’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적당히 고려하기로 한다”고 규정하고 이어 ‘합의’ 사항으로서 이들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의 공공의 소학교, 또는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처를 하고, 또 일본의 중학교를 졸업한 경우에는 일본의 상급학교 입학 자격을 인정한다’는 것을 회의록에 남기는 데 그쳤다. 이것은 즉 한국 정부가 재일조선인 청소년을 조선인으로서 교육할 권리와 그것을 보장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태도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 재일조선인 청소년에 대한 교육은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라서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고 추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토의 기록’에는 일본 측 대표의 발언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합의된 회의록’ 가운데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라는 문부성의 현행 법령에 따라서 행하는 지도, 조언 및 권고를 말한다’는 것을 기록에 남기고, 한국 측 대표도 이를 승인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시행해 온 동화교육 정책의 기정사실을 추인하고, 또한 그것을 방침으로 삼을 것을 명확히 인정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재일조선인 교육에 있어서 동화교육의 체제(침략·피침략의 관계)가 공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일본 정부도 이 조약이 조인된 직후인 6월, 문부성 초중등 교육국장 담화를 내어서 ’문부성으로서는 종래부터도 한국인 자녀들의 일본 소·중학교에 입학을 인정하고, 중학교를 졸업한 자에 대해서는 다시금 상급학교 입학 자격을 인정해 왔는데, 이번의 협정을 그러한 방침을 확인한 것이다‘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동화교육 정책에 대해서 한층 더 자신감을 내보였다.

이처럼 ‘법적 지위’ 협정은 이 조문을 통해 동화교육의 합법화를 선언했고, 한국 정부는 민족교육의 권리를 포기했다. 그렇게 되도록 주도한 것은 일본 정부일 것이다. 그것은 ‘토의 기록’ 등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다분히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배경으로 한 법무성 담당관의 발언을 통해서 보다 명확해진다.

‘이것(재일조선인 청소년의 일본인 학교 취학)을 인정치 않으면, 오히려 민족교육이 강화되어(일본에) 동화는 생각할 수 없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태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법무성 참사관 이케가미(池上 努), ‘외국인 등록’ 제71호)



이는 재일조선인 교육에서 당연시해야 할 식민지 통치의 책임 문제가 망각된 재일조선인 청소년의 민족적·인간적인 이익이 아니라, 일본 통치자의 정치적 권익만을 중심에 두는 발상에서 나왔다. 한일 간의 정치적인 힘의 차이를 배경으로 이와 같은 발상에서 버젓이 조약이 통과된 것이다.

결국 한일조약은 오히려 일본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고 재일조선인 교육을 마음대로 처우하는 권한을 일본 정부에 부여한 것이 되었다. 문부성 담당관은 이러한 입장에서 일본 사회와의 조화를 우선으로 해서 동화교육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이미 말한 것같이 이번 협정 때문에 앞으로 100년 이상에 걸친 한국인의 일본 영주가 약속되었다. 이들 한국인이 일본 사회에 잘 적응하여 조화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일본 사회의 안정과 진보를 위해서도 문제가 되지만, 한국인 자신에게도 안정되고, 충실한 생활을 영위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지의 갈림길이 될 것이다. 그들이 일본 사회에서 조화를 이룬 존재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가름하는 토대는 교육에 의해 배양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진해서 일본학교에 들어오게 하고, 일본 측은 그들을 일본학교에서 기쁘게 받아들여 유아 시절부터 양국 자녀가 생활이나 학습을 함께하여 자연스럽게 친화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시카와(石川二郞) ‘일한협정과 교육’, ‘문서 시보’ 1965년 8월호)



영주권을 취득한 재일조선인 자녀는 동화교육을 통해서 일본 사회에 조화된 존재로서 그 민족성을 상실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고 설교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그 전에 이들의 귀화를 예상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법무성 담당관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든가 외국인이 되든가 어느 쪽인가 결정하고, 그 결정된 쪽으로 철저히 교육할 것’을 권장하고, 외국인으로 결정한 자에게는 귀국을 ‘일본 사회에 정착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귀화할 것’을 권장하였다.’(이케가미(池上努) ‘법적지위 200의 질문’, 1965년 12쪽).

동화→귀화를 통해서 재일 조선인 그 자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재일조선인 문제를 해결해 가려고 하는 방법론이 엿보인다.

이것은 내각조사실의 논문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났다.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출되고 있다.



‘일본에 영주하는 이민족이 언제까지나 이민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일종의 소수민족 문제로서 앞으로 곤란하고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피차 쌍방의 장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 이들에 대한 동화정책이 강조된 까닭이다. 즉 대거 귀화하게 하자는 것이다. 귀화인 자신은 예컨대 반쪽 일본인으로서 한일 양 국민에게 백안시된 적도 있어서 크게 고민이 될 것이다. 그러나 2, 3세 그 이상 세대로 흘러감에 따라 문제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또 치안 문제로 봐서도 귀화를 대대적으로 인정하든가 그들의 민생안정을 위한 과감한 조처하던가, 대승적 견지에 입각한 정책이 필요하다.여기에서 남북한 어느 쪽도 상관없이, 재일조선인이 그 자녀들에게 시행하는 민족교육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확립해야 할 것이다.’(내각조사실 ‘조사 월보’ 1965년 7월)



‘동화→귀화 절차는 현재의 재일조선인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며,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일본 사회에 남아 있는 조선인 차별문제는 계속 온존될 것이다. 그것은 귀화 조선인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강위당(姜魏堂) ‘어떤 귀화 조선인의 기록’ 1973년)

그러나 그러한 방식을 통해 재일조선인으로부터 정치적·사상적 혼을 박탈하고 비정치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즉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치안 문제로서의 재일조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비조선인화·일본화야말로 그 비정치화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한일조약은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전망을 포함하여 일면 동화교육 체제를 합법화시켜, 말하자면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침략체제를 용인한 것이었다.



●한일조약과 재일조선인 교육(2)

-조선인 학교 탄압정책의 전개

그런데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침략(동화교육) 체제는 조선인 학교를 통제·폐쇄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전후(戰後)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의 기본 구조는 조선인 학교를 억압하고 동화교육 체제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 전통에 따라 일본 정부는 다시 전면적인 조선인 학교 억압 정책을 구상하였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정책은 이 방면에 주력하면서 준비하였고, 동시에 병행하여 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이 조선인 학교의 애국주의 교육을 항일무장 투쟁의 준비 활동이라고 왜곡 선전하는 등 ‘반일교육’ 선전을 활발히 행했고, 일본 국민과 재일조선인을 이간하는데 열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65년 정책과 선전, 이것을 비판한 운동은 법적 지위 협정을 통한 동화교육의 문제성을 논의하기보다는 문제의 중심을 조선인 학교 옹호를 둘러싼 공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실 1965년에 응축된 조선인 학교를 둘러싼 급속한 상황의 변화는 한일조약이 비준되는 제 단계를 조응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서 말하면, 먼저 2월의 가 조인 단계에서는 ‘재일 외국인 교육연락회’의 설치에 의한 억압 기관을 정비하고(4월), 이어 6월의 본 조인 단계에 따라서 조선인 학교에 대한 중상 선전, 마지막으로 12월에 비준 단계에 이르러서 억압 정책으로 등장(12월 28일의 문부 차관 통달)하는 식으로 그 단계가 진척되어 갔다.

다른 한편, 이렇게 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 박탈의 움직임에 대해 일본 국민 측의 반격은 처음에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5월 말, 조일(朝日)협회 제10회 전국 대회의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의 옹호’라는 특별 결의를 도화선으로 하여, 비준 저지 투쟁이 대중적 규모로 전개된 9월 이후 단계에서 비로소 부현(府縣) 수준에서의 집회가 몇 차례 열렸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일 민족교육 문제 협의회’로써 결실(12월 18일)을 보아 국민 측에서도 대중 조직의 결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운동론적으로는 한일조약을 둘러싼 정치 투쟁이 교육 분야에서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권리를 둘러싼 교육 투쟁으로 발족한 것이 큰 특징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일조약의 가 조인을 끝내자, 공공연하게 조선인 학교에 대한 억압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그 중심기관이 4월에 각 성(各省)의 관계자를 모아 문부성 내에 설치한 ‘재일 외국인 교육연락회’였다.

거기에서는 (1)일부 외국인 학교에서 ‘반일교육’이 실시되고 있는데, 방치해도 되는가? (2)(반일교육을 하는) 외국인 학교를 각종 학교로서 인가하는 것은 타당한가? (3)오히려 각 국별로 하지 않고 총합적·국제적 학원으로 해서 인터내셔날 스쿨을 건설한다면 어떨까? (4)이러한 상황을 외국의 사례를 조사해서 4가지 점에 걸쳐서 검토되었다.(‘아사히(朝日)신문’ 1965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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