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석 미술평론가

집적: 삶은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캔버스 천. 나무오브제. 실. 전구. 가변설치. 2021
[동양일보] ‘돌이켜 보면 서른 살을 넘기고 결혼하던 때를 전후로, 밖으로 향했던 시선이 더 나에게로 돌아왔어요. 서른 전에는 온전히 저를 들여다보기보다는 내가 잘살기 위해서 어딘가에 적을 둬야 될 것 같고 누군가와 관계를 잘 맺어야 할 것 같아 외부로 향한 시선이 강했어요. 시선이 나에게로 돌아오면서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더 온전해질 수 있을까를 더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전환의 시기에 이선희(38) 작가는 대전시립미술관이 기획했던 ‘프로젝트대전 2014, 더 브레인’에 참여하면서 만났던 카이스트 대학 뇌과학자들로부터 시냅스와 기억의 관계를 공부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창작 물음을 명료하게 ‘기억을 직조할 수 있을까?’로 가다듬었다. 이 물음은 그간 다양한 주제와 은유로 시각화되고 변주되었지만 현재도 그 물음의 핵심은 변함없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만의 삶과 그 켜켜이 쌓인 기억 속에 좋은 것과 아픈 것을 함께 갖고 있다. 현재를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늘 한다. 작가의 경우, ‘제 성향은 가급적 좋았던 기억을 더 뒤져내 엮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길을 내려 노력하는 편’이라고 한다.
자립의 시간, 털실. 천. 밧줄. 목재구조물 가변설치. 2018
자립의 시간, 털실. 천. 밧줄. 목재구조물 가변설치. 2018

작가는 구입한 뜨개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누군가 한때 입었던 뜨개옷을 풀어서, 또는 누군가의 헌 옷을 수집하여 가늘게 썰고 다시 엮는다. 그녀의 손뜨개질 행위는 작가 자신 또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수 백 수 천 겹 쌓여 집적된 기억층을 한 겹 한 겹 발굴하는 기억의 추적이다. 기억의 고고인류학자로서 작가는 그 추적 과정에서 좋은 기억, 아픈 기억을 마주한다. 뜨개실(천조각)뿐만 아니라 돌, 엽서, 명함, 청첩장, 액자 등 기억이 묻은 모든 일상의 오브제는 그녀의 직조(풀어내 다시-엮기의) 대상이다.

작가는 여러 양태의 기억을, 풀어 헤치는 발굴의 과정에서도 만나지만, 그 풀어낸 긍정의 기억과 부정의 기억을 다시 엮는 과정에서도 또다시 수차례 마주하고 또 마주한다. 마주하는 것은 또 있다. ‘저에게 직조, 다시-엮기는 지나간 한켠에 묻힌 기억을 마주하는 과정이예요. 좋은 것이든 아픈 것이든 일단 꺼내 놓으면, 한 번 털어내고 나면 내 마음이 한결 나아져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요. 그 길고 긴 직조 과정에서 방향을 바꾸는 나, 새로운 길을 내는 나를 마주하게 되요. 이것 더 중요해요.’

이선희 작가는 경제적으로 생활의 방편이 크게 되지 못하는 작업을 왜 계속하는가 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그 작업의 과정이 길면 길수록, 힘들면 힘들수록, 마주하는 시간이 긴 만큼 제가 더 단단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온에 이르러요. 그래서 계속 작업하는 것 같아요.’

2015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일반 시민(어린이와 함께)을 대상으로 작가가 이름지은 워크숍 제목 ‘꼼지락 꼼지락 뜨개질’이 눈에서 떠나질 않는다. 작가는 홀로 앉아 꼼지락 꼼지락 손뜨개질로 길고 긴 시간 자신 속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는다. 마치 득도에 이르려는, 궁극적 평온에 이르려는 수행자처럼. 기억을 다시 엮는 매 순간 그녀는, 자신의 현재를 선택하는 나를 만난다.

이선희 작가
이선희 작가

▷이선희 작가는...

충남대 조소과(2007) 졸업. 국민대 일반대학원 미술학과(입체미술전공 석사 2011, 박사 2014) 졸업 및 수료, 개인전 8회, 미술프로젝트 기획 및 전시 5회, 단체전 50여회. 음성 영무예다음(3차), 천안 와촌 동아라이덴 등 작품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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