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 시조시인
[동양일보]‘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어쭙잖은 젓가락 장단에 실려 늙은 유행가가 어둠을 헤집는다. 장작을 잔뜩 지펴 달아오른 방바닥은 취기를 부추긴다. 얼큰해진 아이들은 밤새 들락이며 마시고 또 불러댄다. 채 스물도 안 된 젊디젊은 것들에게 무슨 한이라도 맺힌 걸까? 금순이를 불러내고, 두만강 푸른 물을 건너고, 미아리 고개를 넘으며 저렇게 청승을 떨다니.
반세기 전쯤 연말이면 으레 펼쳐지던 필자의 시골 풍경이다. 망년회가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구석까지도 연말연시는 왠지 설레고 어수선했다. 집배원 가방은 크리스마스카드로 불룩하고 캐럴은 연말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또래끼리 모여 화투 치고 술 마시며 세모의 아쉬움도 달랜다. 하지만 철부지들에게 새해 설계나 다짐 같은 거창한 건 없었다. 할 줄조차 몰랐다. 그런 삶에 만족했으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망년회는 새로운 얼굴로 다가온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동료들과 회포를 풀기도 하고 나름 새해 목표를 세우며 다짐도 한다. 무언가 이뤄내야겠다는 야심이다. 올해는 꼭 좋은 자리로 가야지, 승진해야지, 자동차를 사야지, 집을 마련해야지 등등. 철없던 시절의 순수함은 다 어디로 가고 때만 잔뜩 묻은 야망을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이룬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물거품이 되니 속만 끓이는 연말연시를 되풀이한다.
퇴직하고 나이 들수록 연말연시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의 대명사가 됐다. 때 이른 부음 소식이 툭하면 날아들고 병원 찾는 일이 잦아지는 것도 마뜩잖다. 백발이 야속하여 염색이라도 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지난 시절 이랬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똬리를 튼다. 흐르는 세월 딱 멈추고 싶은 미련이,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스리슬쩍 소망이 되어 버렸다.
검은 호랑이해라는 임인년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만물이 양기를 받아 힘을 펼친다는 어느 역술가의 해석에 귀를 쫑긋한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힘든 요즘이다. 예상보다 오래 창궐하는 코로나-19는 일상을 많이도 바꿔놓았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서민들의 아우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대선 정국을 비롯한 정치상황도 마찬가지다. 후보 비호감도가 세간의 화젯거리로 회자하는 해괴망측한 형국이다. 정책 비전보다는 비방전과 진실 공방만 기승하니 국민의 피로도가 점점 깊어진다. 사방에 무거운 것만 널린 탓일까, 새삼 이파리 떨군 나목에 눈길이 간다.
새해를 시작하며 뜬금없이 띠를 떠올린다. 십이간지 동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그 띠 말이다. 쥐, 소로 시작하여 개, 돼지까지 열두 동물이 출두한다. 각각 동물 이름 뒤에 ‘해’자를 붙여 토끼해, 용해, 뱀해 등으로 부르는데, 올해는 호랑이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새해를 ‘새로 시작되는 해’라고 정의한다. 만약 열두 간지에 새가 있다면 ‘새의 해’라고도 뜻풀이가 올라올 것이다. 새는 날기 위해 조금만 먹고 바로 비운다. 그래서 창자도 단장이다. 정초부터 새해가 어쩌고저쩌고하며 허튼소리로 지껄이는 건 국운이 새처럼 비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날려면 무거운 건 다 내려놓아야 한다. 코로나-19도, 정치상황도 가벼워져야 한다. 어쩌면 나는 듯이 빠르다는 비호(飛虎)도 납실 테니 올해는 확 날아오를 수 있을까? 손을 모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