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비판적 주체의 성장(2)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일본의 국회 비준을 예견한 1965년 가을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와중에 이 운동의 일환으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억압에 관심을 두는,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운동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정부가 재일 외국인 교육연락회를 설치하고, 일찍이 조선인 학교를 억압하겠다는 태도를 명확히 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각별한 경계심이 조선총련은 물론, 일본의 조일협회(朝日協會)나 일교조(日敎組) 등의 관계자에게도 생겨났다. 조선인 학교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정세 판단이 되었다.

이토록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한일회담 그 자체의 비판 사상과 운동이 선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의 예민함이 교육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그 최초의 움직임이 1965년 5월 조선인 학교와 관계 깊은 조·일 우호 운동 및 교육 운동 등 여러 가지 중에서 각기 별개로 행해졌다. 조·일협회 제10회 전국대회는 동 대회에서 처음으로 교육 관계자 경험 교류회를 갖고, 이 문제를 토의함과 동시에 여기에서 제기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옹호에 관한 특별 결의’를 채택하고, 중점적으로 이 문제에 몰두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일교조(日敎組)도 그 정기대회에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존중하고, 자주 학교 공인 운동을 추진하는 것을 활동 방침으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의·결정에는 그 후의 외국인 학교 법안 반대 운동에서도 계속 흐르고 있는 교육 사상의 논리가 배태되어 있었다. 조일(朝日)협회 대회 「특별 결의」를 예로 들어 이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거기에서는 먼저 입론(立論)의 전제로서 다음과 같이 민족교육의 원리를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국민 교육이 일본인의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듯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이 조선인으로 형성하기를 소망하는 것은 민족 본래의 염원이고, 이 교육 없이는 민족의 형성 발전을 기할 수 없다’



한일 조약의 체결은 이 원리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한국인 측의 논조를 헤아리고, 민족·교육의 권리에 대한 사상으로 정리·발전되어 운동을 지탱하는 기초 원리론이 되었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한일 조약이 노리는 교육에 대한 억압 성을 2가지로 지적해 보았다.

첫째는 조선인 학교 규제를 공식화하고, 그 ‘목표는 재일조선인 청소년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동화교육은 전후에도 계속 이어져 온 식민지교육이고, 조선인 학교가 그 대상이었으므로, 따라서 교육 분야의 운동은 한일회담 반대 운동의 총체로 비중을 가지고, 식민지 (교육) 문제에 더욱 깊은 관심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 이것을 일본교육 문제로 받아들이고 보다 널리 확산해 가기 위해서도, 둘째는 소위 ‘예고’론이 지적되었다.

즉 ‘전후 20년의 교육 역사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탄압이 일본 국민 교육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붕괴시키려는 공격의 예고편임을 가르쳐 준다’라는 판단이다.

이것으로써 재일조선인 교육을 지켜 주려고 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일본국민 자신들의 교육을 지킨다는 입장을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3가지 점의 논지(민족교육의 원리·동화교육의 강제·민주교육에 대한 공격)를 근거로 조선인 학교의 수호가 일본국민에게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총괄하였다.



즉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옹호하는 것은 민족과 민주주의의 관점에 적합한 것일 뿐만 아니라, 조·일의 우호와 연대를 추진하는 무엇보다도 구체적 실천이고, 일본의 민주교육을 지키는 길’이다.



재일조선인의 입장과는 다른 일본인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몰두해야 하는 의의가 강조되고 있었다. 일본인의 입장이라는 관점을 중시하는 태도 안에는 조선인 학교의 규제와 동화교육 강제를 ‘교육 침략’의 재현으로서 개관하고 다시 교육 침략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일본인 측에 고유한 결의가 가로 놓여 있었다.

이상과 같은 사고에 의해서 재일조선인 교육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학습과 운동의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7월 말 일조협회, 일교조 등이 공동으로 열렸던 ‘재일조선인의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에 관한 심포지엄’은 그 신호탄이었다.

11월에 공간(公刊)된 이 심포지엄의 기록 ‘민족교육 그 발자취와 전망’은 일본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첫 번의 재일조선인 교육의 연구서이자 실천 보고서로 그 문제를 활동가나 교사 사이에 널리 알리는데 그 역할을 다했다.

심포지엄은 계속 이어져서 12월 18일에도 개최되어 그 자리에서 심포지엄을 ‘일조(日朝) 민족교육의 문제 협의회’의 창립총회로 전환하자고 제안되었고,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옹호를 주안점으로 하는 노동조합, 민주 단체, 학자, 문화인 등 유지들에 의한 연락협의체가 결성되었다. (후에 재일조선인 민족교육 문제 간담회 개칭(민교간(民敎懇)으로 약칭), 여기에는 일교조, 일본모친대회연락회, 출판노협(勞協), 일조협회 등 20개 단체 및 다니가와테츠조(谷川徹三), 무타이 리사쿠(務台理作) 등의 학자, 문화인이 참가했다(대표위원으로 앞의 2명 외에 수에가와히로시(末川博)․ 관노하라(官之原貞光)․ 가와사키나즈(河崎なつ)․ 후루야(古屋貞雄) 등 11명)

‘협의회’의 결성은 이 문제에 관계된 일본인 측의 움직임이 학습에서 운동으로 향한는 전기(轉機)를 보여 준 것이었다.

그 창립총회 결의에서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의 자립적인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고, 조선인에 대한 ‘동화교육’을 강제하는 동향을 보이고 있음을 우리는 좌시할 수 없다’고 하였듯이, 조선인 학교 규제의 위기에 처해 있는 그것에 관한 관심이 한일 조약에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에 대한 일본인 측의 최초의 통일전선적 조직의 결정을 촉구하였다. 물론 ‘협의회’는 그 성격상 운동의 지도부는 아니고, 오히려 연구·계몽 선전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고, 사실 거기에 중점을 두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하더라도 협의회의 결성이 이 시점에서 정부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에 대결하는 독자적인 운동을 일으킬 주체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1965년 12월 말에 문부차관 통달이 나오자, 조선총련은 즉각 동화교육의 강요에 반대하고, 민족교육의 권리보장을 대치시키는 입장을 표명했다.(‘재일조선인 공민의 민족교육을 탄압하려고 하는 일본 정부의 통달과 관련해서’12월 29일.)

‘협의회’도 재차 동화교육 반대, 민족교육 권리 옹호의 성명을 발표하고, 특히 이 통달 내용을 철회시키기 위한 일본국민운동의 발족을 호소하였다.(1966년 1월 24일)

문부성의 통달에 대해서 일본국민 측이 이와 같이 신속히 반대·철회의 공적인 대응을 보인 것은 지금까지 없었다.

다음 해 정부의 외국인 학교 창설의 법안화가 거의 기정사실로 되자, ‘협의회’는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을 지키는 전국 대표자 집회’를 소집하고(3월 9일 개최), ‘재일조선인의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을 억압하기 위해 지금 국회에 상정하려고 하는 법안을 폐기하자’고 결의하고 집회의 이름으로 정부에 항의하였다.

동시에 ‘전국의 여러분이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권리 옹호를 위해 의지와 행동을 결집할 것’을 ‘갈망’했다. 이 시기 협의회는 정부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의 움직임에 대한 일본국민의 촉수 역할을 다하고, 경종을 울리는 임무를 짊어졌다.

또 이 집회를 계기로 ‘협의회’는 활동 사실에 입각한다는 의미에서 재일조선인 민족교육 문제 간담회라고 개칭했다.

대략 이렇게 해서 일본 국민운동 측은 1965년 말부터 1966년 초에 걸쳐서 ‘한일회담’ 비준 저지의 대중운동을 성숙시켜 가는 가운데서, 또 독자적으로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의 옹호를 중요한 과제로 하는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민족교육의 권리 옹호라는 것은 당사자인 조선총련이 일찍부터 일본국민의 협력을 계속 요망해 온 것이고, 또 일본의 운동 측에서도 조일우호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재외 공민과의 우호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조선인 학교 옹호를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반일 교육」을 이유로 들어 한일 조약이 발효되면 조선인 학교를 규제(외국인 학교 제도를 창설)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하였다.

따라서 1966년 이후의 ‘한일 체제’에서 조선인 학교를 둘러싼 공방이 커다란 정치적·교육적인 쟁점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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