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주완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 부소장
[동양일보]19세기말 조선의 황실은 프랑스식 요리로 연회를 치렀고 프랑스어로 쓰인 메뉴판에는 커넬 콘소메, 푸아그라 파테 등 12가지 메뉴와 고종이 즐겼다는 씁쓸한 가베(커피)도 있었다고 한다. 황실 사람들은 서양세력과 우호관계를 맺고 그들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데는 음식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고종은 서양 음식을 받아먹으며 맛이나 영양을 따지기 보다는 문화가 다른 사람들끼리 음식을 먹다보면 서로 간에 이해의 폭도 넓어져 상대에 대한 예의도 갖출 것으로 오해했던 것 같다.
김옥균(1851~1894)은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여 1872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김옥균은 다재다능하였으며 박규슈 일파를 만나면서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마침 조정에서도 개화정책에 관심을 보이자, 1881년부터 여러 차례 일본을 다녀왔고, 메이지유신을 통한 일본의 정치·사회적 변혁과정을 목격하였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등 개혁자금 조달이 어렵게 되고, 청나라를 믿고 민씨 세력이 신진세력인 개화파를 축출하기 시작하자, 김옥균 일파는 1884년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믿었던 일본의 지원은 미비했고, 청나라 군이 개입함으로써 거사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은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0년 홍종우(1854~1913)는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프랑스로 건너간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되었다. 홍종우는 몰락한 양반가로써 외국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고생 끝에 유학자금을 마련하여 프랑스로 떠났던 것이다.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큰 세상을 만났고,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으며,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만큼 조선의 문화가치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1893년 고국으로의 귀국길에 민씨 정권으로 부터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사주를 받고, 개화동지로 가장하여 일본에 있던 김옥균에게 접근하였다.
홍종우는 김옥균의 마음을 사기위해 프랑스 요리솜씨를 발휘하였다. 어쩌면 김옥균도 고종이 즐겼던 커넬 콘소메, 푸아그라 파테 등 12가지 프랑스 요리와 프랑스의 전통과 식사예절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씁쓸한 가베도 매일같이 마셨을 것이다. 맛있는 요리로 홍종우를 완전히 신임하게 된 김옥균은 그를 따라 중국으로 향했다. 1894년 2월 상해에 도착한 다음날 동화양행 호텔에서 김옥균은 요리가 아닌 홍종우의 총알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 황실은 김옥균의 시신을 넘겨받아 능지처참하여 팔도에 효시하였다.
1911년 김옥균의 양자 김영진(1876~1947)이 아산군수에 취임하면서 영인산 자락에 김옥균의 무덤을 마련하였다. 어느 시인은 “망자는 멋대로 자란 나무 밑에서의 긴 잠, 이제는 무력하여, 기우뚱 서 있는 자신의 묘비조차 바로 세울 수도 없다”고 읊은바 있지만, 눈 덮인 김옥균의 무덤가 묘비는 겨울 강풍에도 끄떡없이 곧고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