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경 수필가
[동양일보]봄의 색들이 하나 둘 피어나며 온 산야는 알록달록 꽃들과 새싹들로 푸르름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사월에 돋아 난 새싹의 연두 빛 고운 빛깔은 갓난아기의 살결마냥 부드럽고, 물고기 떼 같은 잎새들의 춤사위는 삶에 활력을 준다. 밤하늘 지키는 달빛을 보면서 새로운 꿈을 꾸며 새봄맞이 계획을 세웠다.
내 고향 지리산자락 시골 밭에 작물을 심어볼까 하고 씨앗을 준비했다. 식구들과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차량들이 명절을 연상하게 한다. 코로나19로 한산하던 휴게소도 차량으로 넘치고 어디로 가는지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여 달리는 차들도 신이 난 듯하다. 봄기운의 연두색이 주는 기운은 강렬하다. 꽃들의 색색으로 물들인 화사한 산천을 보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다. 활짝 열린 봄 물결 사이를 달리는 마이카는 천리마처럼 기운을 낸다. 그 천리마에 얹힌 나의 기분은 한 마리 나비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아들 친구들과 함께 묵정밭을 파는데 농지 주변에 사시는 지인이 우리가 준비한 들깨 씨는 아직 심을 때가 아니라 한다. 삽 곡갱이 호미 낫을 준비해 간 우리를 보고 그걸로 어떻게 밭고랑을 만들 것이냐 한다. 기계로 잠깐이면 된다하여 다음 기회에 때맞춰 씨앗을 심기로 했다. 일은 뒤로 미루고 섬진강 화개장터로 나들이를 갔다. 은빛 물결 반짝이는 섬진강은 가뭄으로 목말랐고 모래톱만 반짝였다. 쌍계사 십리 벚꽃도 꽃잎은 떨어지고 녹색터널로 시원한 강바람을 안겨 주었다. 섬진강 줄기를 구경하면서 화개장터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맑은 산천에 녹아나는 신나는 마음은 한줄기 바람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옥종 시골집을 가는데 청학동과 토지문학관을 지나오면서 들리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이 천 평 넘는 집안의 뜰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새싹들을 뽑으면서 식물들도 이렇게 격이 있구나. 어떤 이는 잡초라 뽑아야 하고 어떤 이는 곡식이라 거름 주며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랄까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기도하고 서글퍼지기도 한다.
대충 풀 뽑기를 하고 준비해온 식자재로 저녁을 준비하여 마당에 돗자리를 깔았다. 삼겹살과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숯불로 구워 복학생인 아들친구들과 함께 운치 있는 저녁을 즐기는데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진다. 고기 냄새에 컹컹거리든 개들도 조용해진다. 엄마와 동생을 하늘나라에 보낸 고향집 마당에서 문득 쳐다 본 하늘에 초파일 지난 상현달이 먹구름 속에서 액자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순간 신기한 생각이 든다. 저 세상에 간지 47년 된 엄마와 1년 6개월 된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빗방울 떨어지는 하늘 위 먹구름 속에서 얼굴 내민 달빛을 보다니 뭔가 모를 오묘함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어두운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또 무엇이 나타날까 두리번거리는데 엄마와 동생의 무덤이 있는 하늘 위 구름 속에서 별이 반짝한다. ‘나 여기 있다’ 표시라도 하듯 화기애애한 모습이 보기 좋아 우리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는 신호를 주기라도 하는 듯하다. 엄마 얼굴이 달빛액자로, 동생 얼굴이 별빛 액자로 어두운 하늘에 빛난다.
가느다란 빗방울 한 두 방울을 맞으며 신선한 공기와 바람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들친구들도 시골 마당에서의 풍경이 감동스러운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합숙을 했다. 잠들었다 깨어보니 새벽이다. 밤새 내리는 봄비의 연주소리를 들으며 먹구름 속에서 나타났던 신비한 달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는 달빛액자 하나와 별빛액자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 코로나19의 갇힌 봄에 꽃피운 추억 한마당이다. 즐겁게 모여 있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 저 세상 사람들도 즐거운 모양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즐거운 모습은 또 다른 달빛액자와 별빛액자를 품을 수 있는 기쁨으로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