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아영 수필가

최아영 수필가

[동양일보]인생길 가다보면 난데없는 일로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신바람 나는 일이 생겨 사람 사는 맛이 불끈 솟아나기도 한다.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사춘기를 맞아 똘똘 뭉쳐 다녔던 5총사 중 한 명이 꽤 먼 해운대라는 곳으로 이사를 간 일이 있었다. 하여 바닷가를 내 집 드나들듯이 하게 되었다. 휴일을 맞은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로마의 휴일’ 주인공 ‘비비안 리’의 볼륨 스커트가 유행했던 그 시절 어설프게 흉내를 내고 36번 버스에 올라앉았다.

그날따라 친구가 어딜 가고 집에 없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도 기다릴 겸 해변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것이 불씨가 되었다. 짧은 다리로 쏘다닌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이 내게 다가와 소속 학교와 이름을 물어왔다. 나는 K여중 누구누구라며 또박또박 공손하게 답을 하였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며 돌아섰다. 그것이 전부였다. 월요일인 다음날 아침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교무실로 호출되었고 그날 오전에는 반 아이들과 분리되어 도서관에서 반성문을 쓰고 있어야 했다. 창졸간 불량 학생이 되고 말았다.

백지를 앞에 놓고 펜 돌리기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반항은 그것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지 잘 몰라서도 선뜻 써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반성문을 쓰는 내내 호마이카 책상에 내려앉은 햇살을 나는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바보 같던 나에게 따스한 햇살을 비추어주었던 유일한 내 편이라 생각했으니까. 이후 나는 바다보다는 봄 햇살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해변에서 내게 이름을 물어왔던 사람은 당시 교외 지도반 이라고 하는 다른 학교의 어떤 선생님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당신께서는 어떤 정황으로 보아 내가 불량스럽다고 판단을 하셨을까. 혹시 내가 입었던 볼륨 스거트가 눈에 거슬렸던 것일까. 하긴 잘록한 허리에나 어울렸을 스커트를 작달막하고 펑퍼짐한 허리에 두르고 있었으니 우스꽝스러워 눈에 띄기도 했겠다.

나쁜 기억들은 가능한 빨리 잊을 수 있게 설계한 창조주의 심오한 그 뜻을 익히 알고는 있다. 하나 이토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겨두고 되뇌고 있는 걸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살이에서 불공정과 비상식이 되레 뻔뻔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도할 때마다 극심한 허탈감을 느끼곤 했다.

기어이 이순耳順을 맞이하게 되었다. 맙소사, 겨우 이 지점에 이르고자 그토록 아등바등 살아야 했었나 보다.

긴 여정에서 마침내 정박하게 된 이곳 바다는 예전과는 좀 달라 보였다. 바다가 달라진 건지 내가 변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오만한 듯 치솟아 오른 거대 빌딩 속 물결과는 달리 뭍을 향해 다소곳이 엎드린 그래서 제 속을 얼핏 설핏 보여 주기도 하는 벌 바다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있다는 사실이다. 그거면 되었다. 지향점도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화려한 요트보다는 나만의 신화 하나 쯤 숨겨두었다가 이따금씩 꺼내어 미소 지을 수 있는 갯벌이 이쯤에서는 왠지 정감이 간다.

깊다고 다 좋을까. 한량없는 바다 꿈을 꾸는 바다, 나의 바다는 바로 수필이라는 갯벌 같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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