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식 시인

이명식 시인
이명식 시인

[동양일보 엄재천 기자]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따스한 바람이 들창을 두들겨 부스스 눈을 뜬다. 긴 겨울에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그러기를 몇 날 며칠 산책길에는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니 정령 봄이다.

지금은 봄의 한복판, 봄의 꽃들이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기온으로 수은주는 봄과 여름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야트막한 산을 접한 들녘에서는 농부들이 밭갈이와 비닐 씌우기에 여념이 없다. 나의 산책도 뜨거운 한낮을 피해 이른 아침이나 다 늦은 저녁나절에 나서고 그 대신 한낮에는 달콤한 낮잠을 즐기기도 하니 비로소 천하태평이다.

마음먹고 가까운 산사를 찾아갔다. 주변의 산들은 뭉게뭉게 연두를 물고 피어나고 있었다. 좀 더 늦으면 갈맷빛으로 산행이 귀찮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산중으로 들어가는 길의 봄은 더디다. 계곡에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버들강아지가 살살 꼬리를 흔든다.

나는 짙은 초록보다 지금 막 피어오르는 연두에 설렌다. 그것은 초록보다는 연두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에 위치한 천년고찰 영국사에 오르는 길은 듬직한 바위들로 그 멋을 더하고 얼마 전에 내린 비로 개울물 소리도 즐겁다. 봄비가 흠뻑 적시고 간 뒤라 나들이하기에는 그만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층 가볍고 산뜻하였다.

20여 년 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을 정리하기 위하여 채록을 왔던 길이다. 삼단폭포를 지나 산사로 이르는 길은 매트와 데크가 설치되어 옛 보다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는 그리 멀지 않아 그간 자주 들렸었다. 산사에 오르는 계곡의 맑은 물과 웅장한 바위들이 내 마음을 앗아가 너럭바위에 누워 잠들기도 하고 가다가 쉬다가 하며 심신을 달랜 적이 많았다.

산사를 둘러본 뒤 해우소로 향하니 어디서 온 듯 나이 지긋한 두 할머니가 젊은 아낙과 함께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어르신들은 자매세요? 보기에 참 좋네요.” 하고 말을 건네며 어디서 오셨냐고 물었더니 옥천 안남에서 왔다고 하시며 두 분은 동세지간이라고 한다. 동서를 동세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무척 정감이 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어르신들도 동서라는 말보다 동세라는 말을 자주 썼으니 말이다. 안남면 도농리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 선생이 떠올랐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중봉 조헌 선생의 묘소와 충렬사, 신도비 등 선생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 구경 잘하고 가시라고 헤어짐의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잠시 쉬어가자고 동행한 아내가 말하기에 사찰경내의 작은 쉼터로 향했다.

작은 경내지만 길옆에는 꽃잔디를 심어놓아 눈 호강을 할 수 있었다. 텃밭인 듯 반대편으로는 이런저런 봄나물을 가꾸고 있었다. 언제 보았는지 아내가 저건 열무 같은데, 벌레 먹고 억세서 못 먹겠다고 한마디 하였다. 내가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니 열무잎은 찢어져 있었고 다 쇠어 색조차 짙푸르렀다. 열무를 갉아 먹는 것은 벌레지만 무엇보다 생명을 존중하는 도량인지라 농약을 치지 않는다는 말에 문득 짧은 시 한 편이 생각났다.



어느 절에 갔었네/ 자그마한 텃밭에/ 열무 한 줄/ 다 쇠어있었네/ 벌레에 물어뜯긴 이파리/ 오랫동안 절을 지킨 노스님/ 그것이면 된다고/ 애써 한 말씀 하시네//



근력이 딸려 더 이상의 산행은 접었다. 천태산의 정상을 뒤로하고 하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니 한껏 길어진 해가 서산에 닿으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손바닥 크기의 나의 텃밭과 마당을 둘러보며 꽃나무를 손질하고 지난번에 따먹은 두릅나무에서 새로 돋은 순을 한 움큼 따다가 저녁상에 올렸으면 했다.

돌아오는 오일장엔 소일거리로 즐길 고추, 토마토, 오이, 가지, 호박 묘를 몇 포기씩 사다가 심으면 이미 자리를 잡은 상추, 옥수수, 강낭콩과 함께 푸르러져 가는 멋을 한껏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어느 봄날의 외출은 나름 즐거웠다. 만물이 소생하여 제 본래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요즘, 삶의 가치와 나의 역할을 되새겨본다. 때가 되면 돌아오는 계절처럼 이 봄과 더불어 모든 생명이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

더구나 그간 코로나19로 인하여 자유롭지 못했던 일상이 점점 회복되는 단계에 있으니, 쑥쑥 커가는 봄처럼 묵혔던 서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길 빈다.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 이 푸릇한 봄을 만끽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영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매달린 연등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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