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옥순 수필가

신옥순 수필가

[동양일보]분명 봄은 왔는데 아직도 춥다. 만뢰산 자락의 봄 풍경이 곱다. 봄꽃들이 다투며 피고 아직도 코로나가 숨어서 엿보고 있어도 꽃들은 피고 있다. 아무곳에서나 사진을 찍어도 배경이 아름다운 연두빛 계절. 눈 깜짝할 새 벚꽃이 떠나가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니 다시한번 사랑에 빠져 보고 싶은 봄날이다.

산길을 따라 서 있는 버들강아지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이렇듯 봄은 사람들을 갇힌 곳에서 대자연으로 불러내는 힘이 있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가로수 회양목 잎새에 푸른빛이 돌고, 여린 풀들은 땅위를 밀고 올라와 뾰족이 고개를 내미는 거리, 산 전체가 밝은 초록빛을 띠고 있다.

논둑길 따라 꽃피고 나비 날아오르니 아이는 나비 따라 가고 나도 아이 뒤를 따라 간다. 써래질 한 논에 날아든 꽃잎은 밀어주는 바람에 올챙이와 달리기 하고, 내려앉은 하늘보고 나들이 가는 봄,

만뢰산 아래 생강꽃(동백)산수유, 오리나무, 개살구꽃이 피더니 산이 한꺼번에 물들었다. 평상에 누워 파란 하늘이불 덮고 나무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봄 맞으며 사라진것에 대한 어릴적 그리움에 잠시 젖어본다. 논두렁길 오가며 삘기를 뽑아 입속에 달짝지근함 느끼고 누가 더 길게 뽑았나 내기하던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나이 들어가고 있을까.

담배밭 두둑 만들려고 비닐 어깨에 걸고 달리던 어릴적 아이들, 논 못자리 여기저기 부르던 정다운 친구들, 작은 키에 커다란 지게지고 어깨에 힘주던 아이도 엄마대신 품앗이 하던 친구들도 이제는 다들 간곳이 없다. 게으름 피우던 손길 덩달아 바빠진다. 마늘 밭 김 매주고 거름주고, 봄 배추심고 자소엽, 열무 씨뿌리고 반복되는 일상들을 그려본다.

어느새 아이가 다가와 나를 일으킨다. 하늘 향해 웃으며 정신 차려야지 하며 손털고 일어서 다시 움직인다.

꽃비내린 거리에 내려앉은 꽃잎 밟지 않으려 깡총거리다 저만치 들을 달려 간다. 머문 곳은 같은 듯한데, 같은 것이라고는 봄 앞에 서 있는 것 뿐 , 이젠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다. 오랜만에 함께 하는 아이들과 나들이 길, 너무도 눈부신 햇살에 색안경을 썼다. 그래도 새털 같은 봄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살랑 불어오는 바람엔 꽃향기가 묻어오는 날들이다. 사방천지에 엽록소가 충만한 계절, 맑은 햇빛과 엽록소는 우리의 우울함과 나태함을 치유시켜 주고 있다.

열어 놓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무척이나 상쾌한데 세상의 펼쳐진 모든 것들이 내 마

음 빛깔로 보인다. 봄기운이 훅~욱 불어온다. 향긋하게 풍겨오는 땅 냄새와 푸른빛이 더 진해진 많은 풀잎들 위로 기우는 햇살은 더 없이 아름답다. 저무는 햇살이 아름다운 것은 혼신을 다하여 품어내는 빛 때문인 것 같다. 아니 또 다시 떠오를 희망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가 봄이 오는 길 위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듯이 말이다.

삶의 여정 길에서 좋은 인연, 아름다운 인연으로 찾아왔던 곳, 햇살도 내려앉아 깨우침을 얻다 지쳐 잠이 들면 하늘엔 무수히 많은 별들의 잔치가 벌어지는 곳, 일상에 찌들고 마음 할퀴어질 때 찾아가 안식을 얻고 싶은 만뢰산 아래 산사에 내 마음 한 자락 남겨놓고 특별한 하루를 가슴속에 묻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