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교 시인

서정교 시인

[동양일보]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여유가 생긴다고들 한다. 여유란 시간을 지배하며 기다림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교통편이 단순했던 예전에 버스는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던 이동수단이었다. 물론 지금도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 그런 버스 정류장에서 한번쯤은 누군가를 기다려 본적이 있을 것이다. 

설레고 가슴 졸이는 기다림은 행복하다. 보이지 않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낳은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 기다림이 지루함으로 변하는 순간 그 기다림은 현실이 되고, 시간으로부터 쫓기게 된다.

우리들은 모두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기다림으로 살아간다. 절기에 맞춰 사계절이 순환되는 기후로 인하여 우리의 생활습관은 환절기에 대처하는 방법에 익숙해 있다. 그 중에서 가을은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계절이다. 지루한 장마와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옹골차게 견딜 수 있게 버팀목이 되었던 아버지들의 굴곡진 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긴 겨울을 보내고 만삭의 몸을 해산하듯 대지 가득 새싹을 돋아내는 봄이 어머니라면,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자양분으로 푸른 숲을 이루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여름은 자식이라 비유하고 싶다. 아울러 이런 자식들이 결실을 맺기까지 온 몸 가득 굳은살로 디딤돌을 만들어 주는 아버지에게서 넉넉한 가을 냄새가 나는 건, 오래된 가부장적 농경사회가 만든 하나의 산물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허수아비의 그늘조차 평화로워 보이는 가을을 아버지의 계절이라 이름 부르고 싶다.

 쌀로 유명한 진천의 덕문이 들판에도 이삭 가득 황금빛 벼들이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어느새 바람에 순응하며 흔들리는 이삭들의 춤사위에서 연륜이 묻어난다. 그만큼 하늘과 땅, 물에 충실했던 지난 여름의 시간들이 알알이 박혀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덕문이 들판도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 해마다 팍팍해지는 경제 원리와 농촌의 고령화로 인하여 잠식되는 농경지가 늘어나고 있다. 탁 트였던 그 땅에는 하나 둘 비닐하우스가 들어서고, 유실수가 심어지는 것을 보면서 농경지의 왜소증으로 인하여 가슴이 저려 옴을 느낀다. 우리나라 경제가 해외 무역에 의존하는 비중이 큰 구조이기 때문에 각종 FTA의 체결은 시대의 한 조류라 하겠지만 일장일단의 양면성을 지닌다. 비록 국가에서 이를 대비한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와 시행되고 있지만 수대에 걸쳐 농업을 천직으로 알았던 농민들에게는 기반조차 흔들리는 현실과 맞물려 우리의 기본적인 먹거리 쌀조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덕문이 들판에 자리잡고 있었던 덕문이 방죽의 연꽃 향기가 늦여름 바람을 타고 사방에 진동할 때면 길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전설에는 덕문이 방죽은 조선시대 도적으로 유명했던 임꺽정의 집터를 방죽으로 조성했다는 설화와 어울려 운치가 더 했을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어쩌면 유난히 힘들고 지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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