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담배공장, 문화의 불을 켜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대표이사·문화기획자·에세이스트
[동양일보]
◆청주의 산업유산, 문화가 되다
늘 궁금했다. 청주에서 초정을 오가는 버스를 타면 곳을 지나야 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 높게 쌓은 담장과 굳게 닫힌 철문이 궁금증을 더했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굴뚝은 여러 해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고 쓸쓸할 뿐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2010년 12월, 나는 10여 년 방치됐던 담배공장의 빗장을 여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공장 내부는 거칠고 야성적이었다. 높고 드넓었다. 콘크리트에 페이트칠 하나 하지 않은 생얼미인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과 공간의 압도감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담배 냄새 가득하고 비둘기 똥이 켜켜이 쌓여 있는 그곳에서 희망을 보았다.
나는 청주시청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곳, 동네의 애물단지가 된 옛 청주연초제조창이 세계적인 명물이 될 수 있다며 이곳에서 청주공예비엔날레를 개최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국제행사를 버려진 공장에서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천박스럽다며 삿대질을 했다. 오냐오냐했더니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며 구박했다. 그렇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예비엔날레와 담배공장은 찰떡궁합이라며 행정기관과 시민들을 설득했다.
2011년 가을, 이곳에서 청주공예비엔날레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이 국제행사를 폐공장에서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라고 했지만 결과는 뜨거웠다.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미술관, 화력발전소였던 데이트모던, 군수공장이었던 북경 798보다도 더 훌륭한 문화공간이라며 군침을 흘렸다.
이같은 평가는 2013년에도 이어졌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공예축제, 세계 최고 수준의 비엔날레라는 찬사와 함께 드넓은 담배공장의 매력을 세계인들에게 맘껏 뽐냈다. 공예만을 담지 않았다. 이곳에서 패션쇼, 문화캠핑, 공연이벤트, 퍼포먼스 등 수많은 실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세상 사람들은 감동 그 이상의 가치를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했다. “손때 묻은 것이 가장 아름답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이 축복이다”, “청주만의 문화 DNA를 담아라”, “삶의 흔적과 도시의 영혼을 품어라”….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은 “바다없는 충북에 문화의 바다, 예술의 바다를 만들어라. 그 출발점을 이곳 담배공장으로 하면 좋겠다”고 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시민들의 꿈과 땀방울 가득한 곳
1946년에 문을 연 14만㎡ 규모의 옛 청주연초제조창은 3천여 명의 근로자들이 매년 100억 개비 이상의 담배를 생산하고 17개국으로 수출하는 등 근현대 한국경제 부흥의 불씨를 지핀 곳이다. 담배농사를 짓는 농부들도,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일하는 노동자도, 고단한 삶을 달래던 골목길의 선술집도 희망의 끈을 놓지 살 수 있었다.
이곳에는 담배를 생산하던 ㄱ자형 본관동 건물이 있고, 본관동 건물 바로 뒤에 부속건물이 있다. 그리고 담배 원료를 보관하던 동부창고가 자리하고 있다. 동부창고는 일본과 독일의 건축기법을 함께 담은 구조로 모두 7개 건물이 있다. 벽돌을 쌓고 목재로 지붕을 마감했는데 기둥 하나 없어도 안전하고 비바람에 견딤이 강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정문 쪽에는 사무동과 후생동, 그리고 식당동과 야외 운동장 등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후생동은 이곳 근로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문화공간이었다. 목욕탕, 이발소, 종교시설, 동아리방, 담배연구실 등의 후생복리시설이 촘촘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쪽에는 목공소가 있었는데 웬만한 가구와 생활 필수품은 자체 제작해 사용했던 것이다. 운동장은 직원들의 생활체육장소로 사용되었고 주말이면 식당동에서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왜 청주에 대규모 담배공장이 들어섰을까? 충북은 세계적인 담배 주산지인 미국 조지아주와 위도 및 토지가 가장 유사한 곳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지원으로 충북 전역에서 담배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마을마다 흙벽돌을 쌓아 올린 담배건조장이 여러 개 있었고, 면 소재지와 군 단위마다 담배를 수매하는 창고가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귤밭에서 자식농사 지었다면, 충북 사람들은 담배밭에서 자식농사를 지은 셈이다. 충북이 농작물을 수출 1억 불을 최초로 달성했을 때도 담배산업의 호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8년에 선보인 ‘아리랑’이라는 담배는 국내 최초의 필터담배이자 두 번째 장수를 기록한 담배다.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수출 담배로 기록되었다. 아리랑 담배는 바로 청주에서 제조되었다. 필터담배가 공장에서 제조되기 전에는 ‘양절초’ 즉 양쪽 끝이 절단되었던 필터가 없는 담배를 만들었다. 양절초는 대부분의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기에 청주연초제조창에서 많은 여성이 일하며 삶의 터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제조창 광장에서 여성 근로자들이 모여 담배 만들기를 겨루는 궐련대회가 열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청주연초제조창과 관련한 빛바랜 추억이 얼마나 많을까? 1977년 9월 15일은 전 국민이 환호하는 축제의 날이다. 산악인 고상돈 대원이 세계에서 58번째이자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리스트 등정에 성공했기 때문인데, 고 대원은 이곳 연초제조창에서 근무하며 산악인으로 활동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축하의 거리퍼레이드를 해주었다. 당시 제조창에서는 거북선이라는 담배를 생산했는데 우연이 아니다.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목표로 했던 그는 두 번째 대상지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데날리, 6168m)에 도전했다. 에베레스트 때와 달리 대장으로 팀을 이끌었던 그는 1979년 5월 29일 오후 7시15분에 한국 최초로 등정에 성공하지만 하산 중 추락사했다.
월급날마다 제조창 앞 골목길에서는 장이 섰다. 한 달 동안 땀 흘린 대가가 노란 봉투에 담겨 있었다. 남자들은 인근의 선술집에서 삼겹살과 소주 한 잔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여인들은 골목시장에서 반찬거리와 생필품을 주섬주섬 챙겼다. 공장 앞은 장돌뱅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짐을 풀어놓고 오가는 사람들과 흥정을 나눴다. 공장 주변의 상가는 온종일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산업화·기계화가 가속화되고 담배 소비가 급감하면서 청주연초제조창은 존치와 폐쇄라는 기로에 섰을 때 정부와 관련기관은 청주연초제조창을 폐쇄키로 했다. 1999년에 원료공장의 문을 닫으면서 이곳의 기계 일부를 북한에 보내졌다. 남북경제협력사업의 일환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잎담배 경작기술을 전수하고, 이곳의 기계로 공장을 지어주는 등 북한의 자립경제에 기여토록 했다는 후문이다.
◆글로벌 문화중심으로 거듭나다
그토록 화려했던 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담배공장의 불이 꺼지자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담배공장의 이야기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담배공장이 애물단지가 되었다며, 공룡같은 공장 때문에 동네 이미지만 나빠졌다며 불만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식어가면서 어둠과 찬바람만 서늘한 건물과 공터를 지켜야 했다. 햇살과 구름조차 외면하니 어둡고 낡은 그곳에는 비둘기 똥과 먼지와 거미줄만 켜켜이 쌓여갔다. 이따금 동네 불량배들이 공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작당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2011년부터 시작된 공예비엔날레를 통해 공간의 가치를 확인하고 시민들의 참여와 열정으로 문화의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도 유치했다. 문화제조창을 조성하고 이곳에 비엔날레를 비롯한 크고 작은 전시, 공연, 체험 활동이 가능한 한국공예관이 들어섰다. 동부창고는 생활문화센터, 공연연습장, 꿈꾸는 예술터 등 시민문화 및 예술교육의 허브로 재배치됐다. 첨단문화산업단지에는 콘텐츠코리아랩과 글로벌게임센터, 그리고 70여 개의 문화산업 전문기업 등이 입주해 굴뚝없는 창조산업의 꽃을 피우고 있다.
불 꺼진 담배공장에 문화의 불을 켰다는 사실에 정부도 주목하고 있다. 1천3백여 개의 대한민국 지역발전 사업 중 최우수 사례로, 대한민국 최우수 공공건축대상으로, 전국문화재단 지식공유포럼 사례발표 1등으로 선정되었다. 창조산업과 문화융성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시민사회도 하나가 돼 이곳에서 꿈을 펼치고 미래를 담자며 합창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되고, 법정문화도시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버려진 담배공장이 맑고 향기로운 청주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가슴 떨리는 역사적인 무대의 중심에 시민이 있었다. 청주의 자랑이자 위대한 유산이다. 더 나아가 글로벌 문화중심으로 새로운 100년을 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주시민은 불 꺼진 담배공장에 문화의 불을 켠 최초의 인류로 기록될 것이다.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대표이사·문화기획자·에세이스트)
◆청주연초제조창 연혁
1946년 11월 1일 경성전매국 청주 제조연초공장 개설
1948년 11월 재무부 전매국 설치
1950년 3월 7일 서울지방 전매국 청주분공장으로 개편
1952년 4월 전매청으로 개편
1953년 7월 13일 서울지방 전매청 청주공장으로 승격
1956년 1월 연초전매법 공포
1963년 12월 17일 전매청 청주연초제조창으로 개창
1981년 11월 2일 충주원료공장, 청주연초제조창으로 편입
1987년 4월 1일 한국전매공사 청주연초제조창으로 변경
1999년 6월 청주연초제조창 담배원료공장 폐쇄
1999년 12월 청주연초제조창 원료보관건물(2동) 및 동부창고 매입(청주시)
2001년 2월 청주연초제조창 원료보관건물을 활용한 첨단문화산업단지 조성
2004년 1월 청주연초제조창 공장건물 완전 폐쇄
2010년 12월 청주연초제조창 본 건물 매입을 위한 계약체결
2011년 9~10월 2011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개최
2013년 9~10월 2013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개최
2014년~ 2022년 연초제조창의 문화재생사업 추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문화제조창 본관, 동부창고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