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로 통하는 중요 길목....기적소리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곳
유영선 동화작가·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기차의 기적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기억된 것은 언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실제 기적소리가 아니라 소설 속의 기적소리를 떠올린다. 이청준의 소설 ‘조율사’의 기적소리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기적소리였다.

신촌역이 내려다 보이는 다방 ‘기적’. 그곳은 소설가나 시인을 꿈꾸는 문학도들이 약속도 없이 모여 결론이 없는 문학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죽이는 곳이었는데, 음악이 없는 그 다방에 역을 드나드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썰렁한 홀안을 가득 채우다 물러갔다는 표현에서 나는 음악보다 멋진 기적소리를 상상했었다. 특히 대화거리가 떨어져 모두 침묵하고 있을 때 다방으로 가득 밀려오는 기적소리를 상상하면 ‘소리’가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기적소리는 유년시절 기억의 저편에 숨어 있다.

 

옛 청주역
옛 청주역

 

송영객들로 북적이던 광장의 추억

초등학교 입학 무렵 서울에서 청주로 이사온 뒤 영동에 살았다. 주성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학교 교문에서 직선으로 500미터 남짓 거리에 청주역이 있었다. 역 광장은 어린 우리들이 뛰어놀 수 있는 가장 넓은 곳이었다.

역 앞에 파출소가 있고, 중국집이 있고 광장 끝자락에 다방이 있었다. 다방집 딸이 우리반 친구였다. 우리는 학교가 파하면 몰려가 책가방을 다방 안에 던져놓고 광장에서 놀았다. 숨바꼭질도 했고 고무줄 놀이도 했다. 광장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마루보시(丸星. 대한통운의 전신)’의 하역노동자들과 리어커꾼 지게꾼들이 짐을 기다리느라 한 옆에 대기하고 있었고, 역사(驛舍) 앞은 지인을 보내고 맞는 송영객들로 북적였다. 우리들은 그 사이를 다람쥐처럼 종종종 뛰어다녔다.

가끔씩 역을 드나드는 기차가 ‘빠아앙~’ 기적소리를 냈지만,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 속에 특별히 기적소리가 남지 않았던 것은 그 소리가 일상처럼 너무 자주 들은 익숙한 소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좀더 자라면서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이 놀이터가 됐다. 사내아이들은 철로 위에 못을 놓고 기차바퀴가 그 못을 납작하게 만들면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

 

어른들에게도 기차역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철로 앞쪽 동네인 북문로와 영동, 기차역 뒤쪽 동네인 수동과 우암동에 사는 사람들에게 역은 겨울 땔감을 얻는 고마운 곳이었다. 철길 옆 야적장에는 화물열차가 검은 석탄을 산처럼 쏟아놓았는데, 그 석탄이 옮겨져 거의 사라질 때쯤 되면 어른들이 대야를 들고 와 바닥에 남은 석탄과 석탄가루들을 주워갔다. 할머니도 틈만 나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석탄덩이나 석탄가루를 가져오셨다. 그렇게 가져온 석탄은 잘게 부수어 두었다가 물에 개어 겨우내 아궁이 땔감으로 썼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철도문화 변방으로 밀려난 아픈 기억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1899년 9월18일 제물포–노량진 간 33km의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 호남선(1914년)이 개통되었고, 1921년 11월1일 조치원과 청주 사이에 철로가 놓이면서 충북선이 개통되었다. 원래 경인선은 인천항에서 서울로 들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경부선과 경의선은 러-일 전쟁 중 군사적 목적을 위해 개설하는 등 철도는 일제의 대륙침탈과 식민지 경영을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착취와 수탈을 위한 수단이었음에도, 철도의 개설은 교통의 발달과 물류의 이동 등 새로운 문명 세계로의 진입이라는 점에서 양면성을 갖고 있다.

철도와 관련해 청주의 토박이들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다. 경부선이 놓여질 때 토호들은 ‘빽빽’ 소리를 내는 쇳덩이 기차가 조용한 양반고을 청주를 지나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 결과 경부선은 조치원과 대전을 경유하는 우회 코스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조치원과 대전은 신흥 교통도시로 떠오른데 비해 청주는 철도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난 도시가 됐다. 최근 청주시민들이 KTX 오송역을 사수하고, 청주시 광역철도 건설에 매달리는 것은 다시는 철도 인프라에서 밀려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기도 하다.

청주역은 1921년 조치원-청주의 충북선의 개통에 맞춰 청주시 북문로 현 ‘청주역사기념관’ 자리에 준공됐다. 그후 열차이용객이 늘어나면서 충북선은 1923년 5월1일 청주에서 증평, 1928년 증평에서 충주까지 연장 운행되면서 거리를 늘렸고, 도청소재지인 청주를 중심으로 경제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주역 활성화...주위환경도 변화

충북선이 개통되면서 청주역은 외지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 되었다. 비록 조치원역을 거쳐야 했지만 청주역을 통해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어디든 쉽게 다녀올 수 있었고, 청주시내 중·고등학교로 진학한 인근 지역 학생들은 자취나 하숙 대신 기차통학을 할 수 있었다.

청주역은 늘 활기찼다. 아침마다 기차에서 내린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광장을 가득 채웠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저녁이면 다시 기차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광장을 가득 채웠다. 기차통학생들 사이에 에피소드도 많았다. 같은 얼굴들을 자주 보니 소문도 무성했다. 어느 학교 다니는 누가 제일 예쁘다더라,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어느 학교 누구와 누구가 연애를 한다더라 등.

광장은 소통의 장소였다. 각종 정보가 이곳에서 알려졌고, 소문과 소식들이 이곳에서 전해졌다. 광장은 또한 만남의 장소였다. 만남과 헤어짐이 이뤄졌고, 각종 행사들이 이곳 광장에서 열렸다.

청주역이 활성화되면서 주위환경도 변했다. 역 주위로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졌고 운송회사, 농업창고, 상가들이 들어섰다. 1896년 북문로1가 청주관아 부속건물(옛 청원군청 자리)에서 청주공립소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던 주성초등학교도 청주역이 생긴지 1년 뒤인 1922년 상당구 영동 현재의 자리에 새 교사를 신축했다. 1923년엔 지역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이 학교 강당을 신축했다. 이 강당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으로 주성교육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심과밀화로 두 번이나 역 이전

1960년대 들어 청주시의 인구가 20만을 넘으면서 도심에 과밀현상이 생겼다. 당시 철도는 청주시내 도심 한복판을 지났다. 현재의 무심천 대교가 철교였고, 청주상공회의소에서 우암초등학교까지 가는 큰 도로가 철길이었다. 도심 여기저기 만들어진 건널목은 수시로 지나가는 기차때문에 하루에도 몇번 씩 차단기가 땡땡거리며 내려져 도심 보행을 차단시켰다. 자연스럽게 기차역의 이전문제가 떠올랐다. 결국 신도시 건설계획에 따라 1968년 11월 철도의 직선화 사업이 이뤄졌고, 청주역은 우암동(옛 MBC자리)으로 옮겨진다. 47년만에 새 건물을 짓고 이전한 것이다. 역의 이전으로 시내중심지에 놓여있던 철로를 걷어내고 석교동 육거리에서 내덕동 칠거리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간선도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청주역은 1980년 다시 이전을 한다. 충북선의 복선화 공사 완공으로 정봉역과 오근장역이 직선에 가깝게 이어짐에 따라 우암동 청주역을 정봉역과 통합하여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정봉역은 시민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탓도 있지만 자동차의 보급, 도로신설, 고속버스의 출현 등 자동차 문화가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이용객이 급격히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충북선은 여객운송보다는 화물운송에 중점을 둔 산업철도로 발전하였고, 청주역은 중부물류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때(1930년대)는 경성(서울)에서 기차를 타면 중국 하얼빈이나 목단강까지 갈 수 있고, 이곳에서 북만철도로 환승하면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도시까지 갈 수 있었다. 실제로 서울에서 모스크바와 파리로 가는 기차표를 판매했고,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만주 봉천(심양)까지 오가던 열차가 있었다. 만주 봉천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국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봉천을 그리워 하며 툭하면 기차를 탔던 얘기를 하셨었다. 이제 남북이 막혀 유라시아 꿈은 접었지만, 청주역-. 어릴 적 꿈을 주던 그곳에 다시 와보니 그리운 기적소리와 함께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유영선 동화작가·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화작가·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화작가·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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