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동양일보]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고, 6월 1일은 13회 의병의 날이다. ‘의병의 날’은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제정한 법정기념일로, 2008년 8월 의령군수 등 1만 5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 201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임진왜란 당시 망우당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선정했다. 이후 2011년 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경남 의령에서 개최됐다.
의병(義兵)이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자위군으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됐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됐다.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백암 박은식 선생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요 국성이다”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병자 양란의 의병과 한말의 의병이었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고 명성을 떨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평안도의 조호익·양덕록·휴정, 함경도의 정문부, 경기도의 김천일·심대·홍계남, 충청도의 조헌, 경상도의 곽재우·김면·정인홍·권응수, 전라도의 고경명, 황해도의 이정암, 강원도의 유정 등이다.
우리 고장 충청도에서 봉기한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제천의 의암 류인석·의당 박세화, 청주의 청암 한봉수, 괴산의 일완 홍범식, 옥천의 중봉 조헌, 홍성의 지산 김복한·퇴초자 민종식, 청양의 면암 최익현, 예산의 수당 이남규 등을 들 수가 있다. 충청도 의병 중에서 가장 주목하는 의병은 조헌 의병장이다.
중봉 조헌은 1544년 경기도 김포 출신의 사림으로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는 율곡 이이․우계 성혼․토정 이지함의 문인이 돼 명종 22년인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해 온성도호부 훈도․파주․홍주목 교수․전라도사․보은 현감․예조정랑 등을 역임했지만, 주로 교육직에 종사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린 개혁론자로서 성리학적인 사림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성균관 재학 시절 왕실의 불교 신봉 관행을 비판하다가 사직 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고, 시무의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고, 일본과의 통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1574년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당시의 문견을 바탕으로 ‘동환봉사’를 지어 조선의 제도 개혁을 위한 근거로 삼고자 했다.
중봉 조헌이 활약하던 16세기의 명종과 선조 집권 시기에는 사림 간에 훈척정치의 척결과 구현방법을 둘러싸고 동․서 붕당이 발생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동인은 서애 류성룡이, 서인은 율곡 이이가 주축이 돼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반목하며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중봉 조헌은 율곡의 문인으로 정치개혁안을 제시하여 동인을 비판하고 민생안정의 양민론에 입각한 사림정치의 구현을 주장했다.
그때 불행히도 스승인 율곡 이이가 1584년에 타계하여 중봉 조헌은 스승과 후원자를 동시에 잃고 말았다. 게다가 동인의 공세가 강화되는 바람에 입지가 흔들려 중봉 조헌은 보은현감을 그만두고 충북 옥천으로 낙향했다. 그는 옥천에서 인생의 마지막 8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서당인 후율정사와 이지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며 율원구곡을 설정하고 율원구곡시를 창작해 교육자로, 문인으로 활약했다.
중봉 조헌은 선견지명이 있어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과 1592년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대비책을 강구해 상소했지만, 선조는 통신부사 김성일의 왜국침입이 없을 것이라는 보고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중봉 조헌은 옥천에서 문인 이우·김경백·전승업 등과 의병 1600여 의병을 모집해 승병장 영규와 함께 차령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청주성을 탈환하는가 하면, 금산공격을 강행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끝내는 700의병과 함께 49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국함으로써 의병장으로도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책록되고, 이후 영조 30년인 1754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20년(1883)에는 문묘에 배향됐다. 표충사, 우저서원 등에 제향됐으며, 문집으로는<중봉집>이 있다.
13회 의병의 날 국가 기념행사는 행정안전부 주최와 예산군 주관으로 6월 1일 윤봉길 의사 사적지인 충의사 도중도 일원에서 ‘그날, 이후’라는 타이틀로 진행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