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국악인 박팔괘… 생애와 예술(1880~1946)

박팔괘 추모음악회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3대 독자로 7,8세때 가야금 배워

박팔괘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청원군 북이면 석성리(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석성리)에서 아버지 박영춘과 어머니 안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주지는 북이면 외평리 67번지(현 청주시 청원구 외평동)였으나 지금은 청주국제공항 활주로가 되었다. 박팔괘가 살던 외평리는 ‘쇠내’라 불리는 자연부락으로 300여 호 되는 큰 마을이었다. 쇠내에는 할림봉이라는 뒷산이 있는데, 박팔괘의 집은 쇠내마을 왼편 할림봉쪽 골목 안에 있었다. 집 대지는 200평쯤 되었고 건물은 5칸짜리 본채가 있었으며 따로 행랑채가 있었다. 박동진(국악인. 작고)이 젊었을 때 본 기억으로는 집이 길었고 뜰이 높았다고 하였다. 아들 대기(大基)의 말에 의하면 박팔괘는 청주에 내려온 뒤 외평리에 살았고, 대기가 결혼하여 청주에 살자 주로 대기 집에 기거하였으며 만년에 외평리에 머물다가 작고하였다고 했다.

박팔괘는 3대독자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그 역시 독자여서 아버지는 박팔괘의 명을 잇기 위하여 천하게 키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7,8세 때부터 글 선생과 가야금 선생을 집으로 불러 가르쳤다. 가야금 선생은 외지에서 왔는데, 선생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박영춘은 1892년(고종 29년) ‘가선대부’의 교지를 받은 선비였다. 시를 써서 노래를 불렀고 가야금 줄을 퉁겨서 연구를 했다.

박팔괘는 증평 장뜰(장동)에 살던 김해 김씨와 결혼해 동기(同奇), 동귀(同貴), 삼기(三氣), 정동(正東), 대기(大基)등 5남과 딸을 두었다.

아들 대기는 아버지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코가 오똑하고 눈이 쌍거풀진 미남이며 풍골이 좋았다고 했다. 어머니 김씨 역시 동네에서 미인으로 소문이 났고 성품이 온화하고 솜씨가 좋았으며 86세 작고할 때까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많이 전해주었다고 했다.



서울장안에 가야금산조·병창 알리다

박팔괘가 누구에게 가야금을 배웠는지는 아는 이가 없다. 손자 인규(仁圭)는 “어렸을 때 보았던 할아버지의 손은 가야금을 타서 손끝이 모두 숟가락같이 넙적했다”며,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 침쟁이가 손바닥에 침을 놓다가 안들어 가 손등에 놓았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박팔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서울에서 연주를 시작한 후부터다. 그러나 그가 언제 서울로 갔는지에 대해서도 주장이 엇갈린다. <국악개요>(장사훈)에는 박상근의 증언에 따라 24,25세에 상경한 것으로 정리돼 있으나, 손자 박인규는 16세에 상경했다고 말한다. 16세(1895년)와 25세(1905년)는 1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박팔괘가 고종임금(1853~1907)의 총애를 받아 명성황후(1851~1895)와 사진을 찍은 것이 사실이라면 16세 상경이 맞을 듯 하나 사진의 실물이 전해지지 않으니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두 기록을 참조하면 대략 1900년 전 후 쯤 상경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로 가기 전 청주에서의 음악활동이나, 그가 왜 상경하게 됐는지에 대한 동기는 알려진 바 없다. 박대기는 “아버지가 가야금을 잘 탄다고 소문이 나서 임금이 불러서 올라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상경할 무렵 서울 연예계에는 근대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명창들이 모인 연예단체 협률사(協律社)가 있었는가 하면, 대중들에게 판소리와 가기·춤과 노래 등 전통연희공연을 보여주는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社)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 당시 전국의 음악인과 무용인들이 그 무렵 상경하는 추세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활동 역시 전설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원로 국악인들이 “박팔괘가 상경하기 전에는 서울에 가야금이 없었다”, “박팔괘로 말미암아 서울에 가야금이 알려졌다”고 한 표현을 통해 그의 연주실력과 인기가 대단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서울에 가야금 연주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박팔괘처럼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을 잘하는 명인이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박팔괘의 음악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서울 장안에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이 널리 알려졌고 보편화되었다. 그는 이곳저곳 바삐 불려 다녔다. 주로 어전공연이나 민간공연이었다. <국악개요>에는 “어찌 가야금을 잘 타던지 장안명기(長安名妓)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당시 고관대작들의 소실(小室)들이 다투어 그를 만나고자 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그가 최고 음악인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미국의 빅타·콜럼비아 음반회사의 유성기음반 취입 사실이 뒷받침한다. 김창환 이동백 한인호 송만갑 같은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박팔괘와 같이 음반 취입을 했다. 그의 가야금 병창 단가(短歌) 음반은 우리나라 음반사에서 최초의 가야금병창 음반으로 꼽히고 있다.
 

박팔괘 국악대회 포스터
박팔괘 국악대회 포스터

 

낙향, 공연활동과 제자교육 활발

박팔괘가 고향인 청주로 돌아온 것은 191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1911년부터 발매되는 일본 축음기회사의 유성기음반에 심정순의 음반은 보이나 박팔괘의 음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낙향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서울에서의 거취에 문제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국악개요>에 ‘장안명기와 고관대작 소실들이 다투어 그를 유혹한 탓에 문제가 생겨 형틀에 오르게 되었는데, 모(某)인이 죄를 풀어주어 향리에서 기거하였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에서 활동할 수 없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주에서는 지동근(연기), 백점봉(장호원) 정해시(중원)같은 인근 지역 출신 음악인들과 공연활동을 계속했다. 조선일보 1927년 10월30일자 지방 소식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본보 충주지국에서는 독자위안가극회를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중략)....조선가극계 이름이 높은 박팔괘 지동근 백점봉 정해시 외 배우들의 각종신묘한 기술과 청아한 음악 등으로....”

청주극장이 문을 열면서 박팔괘는 청주극장에서도 공연을 했는데 관중이 몰려와서 큰 혼란이 일었다. 이동백, 이화중선 같은 명창들이 박팔괘의 집에 드나들었고 이들과 남쪽지방으로 가서 협률사 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박팔괘가 외지 공연차 나갈 때면 가야금을 들고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청주의 유지들이 그를 초청하여 음악을 듣기도 했고, 한때는 청주에 있던 권번(券番)에서 사범노릇을 하기도 했다. 명월관과 청월관 같은 요정의 요청으로 공연을 한 적도 있지만 결벽성을 지닌 성격 탓에 탐탁치 않아서 몇번 하곤 거절했다.

박팔괘의 제자들에 대한 전수활동은 거의 청주에서 이뤄졌다. 서울에서는 어전공연으로 제자를 가르칠 시간이 없어서 이일선 (국악인명감, 이일선) 등 몇 명에게만 가야금을 가르쳤지만 청주로 오자 여유가 생겼다. 낙향 후 그는 일생에서 중요한 제자인 박상근을 만난다. 박상근은 박팔괘의 당질인 박덕수에게 가야금을 배우다가 박팔괘를 사사하면서 대성(大成)하여 박상근 산조라는 일가를 이루게 된다. 그밖의 제자로는 부강사람인 이창수와 그의 아들 이계순이 있었으며 서울에서부터 따라온 ‘순이’라는 제자와 김복임 등 6,7명의 여성들이 민요와 판소리 춤 등을 배웠다. 아들과 손자에 의하면 박팔괘는 깔끔하고, 엄격하여 제자들을 호되게 꾸중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자식들 중에 유일하게 2남 동귀(同貴)가 이창수 이계순과 같이 3년 정도 가야금을 배웠지만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두었다.



충청제음악의 원류...쓸쓸한 말년

박팔괘의 말년은 쓸쓸했다. 젊은 날의 화려함과 영화 뒤에 느끼는 허전함으로 그는 혼자 가야금을 뜯고 적벽가를 부르면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래도 흥이 나면 가야금을 만들 오동나무를 찾아나서기도 했지만 끝내는 마약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이 일로 가산을 탕진하고 쓸쓸한 가운데 세상을 떴다. 박팔괘의 유일한 유품이었던 손수 만든 가야금은 차남 동귀가 청주동산교회에 부임했던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팔아서 지금 미국의 어느 시골 박물관에 기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말기 서울에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을 소개하면서 신선한 파문을 일으킨 박팔괘. 그의 독창적인 가야금 산조는 박상근을 거쳐 성금연 가야금산조를 낳게 하는 원류였으며, 전라남도의 김창조 산조와는 전혀 다른 충청제 산조의 뿌리였다. 박팔괘, 그는 전설이 아닌 충청제 국악의 뿌리였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통해 이 지역이 충청제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의 발상지였음을 재확인케 한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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