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조각가 김복진… 생애와 예술(1901. 9. 23 ~ 1940. 8. 18)

김복진 수형카드.
김복진 수형카드.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토월회’ 조직, 경성에서 연극공연

동경 유학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했다. 특히 새롭게 만난 서양미술과 인권을 위한 사회주의 사상은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1922년 김복진과 김기진은 박승희 연학년 이서구 박승목 임노월 이제창 등 재동경조선인유학생들과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만든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 7월 경성에서 귀국공연을 한다. 그는 이 공연에서 무대장치을 맡았다. 그러나 연극은 의욕만 앞섰지, 아마추어티를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실패를 한다.

그 사이 김복진은 이승만 윤상열 원우전 이제창과 함께 정측미술강습원과 토월미술연구회를 열어 미술을 가르쳤다. 토월미술연구회는 연극단체인 토월회의 멤버 중에서 무대미술을 담당했던 김복진, 안석주 등이 별도로 차린 미술교육기관이었다. 토월회는 재정비를 해서 2차 연극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김복진 형제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토월회에서 탈퇴하고 박영희 안석주 이익상 김형원 이상화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한다.

10월 하순, 김복진은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포전투영소 근처로 하숙집을 옮기고 튀김 장사를 하면서, 투영소에서 영화에 심취한다.

당시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작품제작이었다. 1924년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약칭 제전) 출품을 위해 작품에 매달리다가 각기병에 걸린다. 그러나 끝까지 작품을 완성해 출품을 마친 뒤 귀국을 하면서 도중에 혼절하는 등 간신히 부모 곁으로 돌아와 6개월 동안 요양생활을 한다. 어렵게 제전에 출품했던 <여인입상(나부상)>이 한국인 최초로 조각부문에 입선하여 조선 사회에 화제가 되었다.

김복진은 각기병이 완치되자 1925년 2월부터 모교인 배재고보와 경성여자상업학교·고려미술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또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효자동에 있는 야학에도 출강했다. 그는 교육 틈틈이 졸업 작품과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공모전 응모작품 제작에도 매달려 첫 도전한 선전에서 <3년전>과 <나체 습작> 두 작품이 3등상과 입선을 차지했다. 이때 작품을 전시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체 습작>의 팔이 부러져 언론에 보도가 되었는데, 조선인 작품에 질투를 느낀 일본인의 의도적인 수작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당시 미전은 호외가 나올 정도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행사로, 왼팔이 떨어져 나간 김복진의 <나체 습작> 앞에는 사람들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제전과 선전에서 잇달아 수상을 하고 화제의 주인공이 되면서 김복진은 일약 유명 미술가가 되었다.
 

김복진  신문 기사.
김복진 신문 기사.

 

본격 미술 비평활동 시작...카프 창설

문학청년이었던 김복진은 작품 제작 외에 글쓰기를 즐겼다. 배재고보 1학년 때 이미 기성세대들이 보는 잡지에 수필을 투고할 정도로 문재를 보인 그였다. 5년제 고보 1학년이라면 요즘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이다. 그는 서화협회전람회를 보고 생애 첫 미술 비평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25년 3월 30일이었다. 6월엔 <조선일보>에 ‘제4회 미전 인상기’를 발표했는데 전봉래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본격적인 비평을 가함으로써 20세기 첫 조각비평을 선보였다. 그의 이름은 한국의 첫 조각가에 이어 첫 미술비평가로 떠올랐다. 그는 만화에도 관심을 가져 당시 신문 삽화와 풍자화를 활발하게 발표하던 안석주를 비롯한 당대 만화가들과 함께 ‘조선만화가구락부’를 조직했다.

7월, 김복진에게 김기진과 박영희가 새로운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창립은 했지만 활동이 미미했던 문학단체 ‘파스큘라’와 무산계급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하여 모인 ‘염군사’를 통합·해체해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 예술활동을 펼치자는 제안이었다. 동생 김기진의 의견에 김복진은 언제나 동조하고 힘을 보탰다.

“집안 어른들 말씀을 들으면, 어릴 때부터 정관 할아버님은 열정적이고 성격이 분명하셨대요. 반면 팔봉 할아버님은 조용하고 침착하고 논리적이셨대요. 팔봉 할아버님이 어떤 의견을 내면 정관 할아버님은 두말없이 팔봉 할아버님을 밀어주면서 친구처럼 지내셨대요.”

김복진의 조카손부(김기진의 손부)인 노현숙 씨의 증언이다.

그들은 종로구 관철동 변호사 이인의 집에서 염군사 회원들을 불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직을 논의했고 박영희와 김기진이 강령과 규약을 초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8월 24일, 한국 예술계의 한 역사의 축이 되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약칭 카프. KAPF)’을 창립한다. 김복진은 김기진, 박영희와 함께 서열 1위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다.

 

 

미술연구소설치로 조각계 후진 양성

김복진은 카프의 미술가들과 함께 진보성향의 문예운동을 이끌었다. 파스큘라때부터 함께 했던 안석주와 충북 영동출신의 권구현이 참여했다. 이어 YMCA에 미술연구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조각 교육을 시작했다. 당시는 미술계는 개인 화숙이나 연구소를 열어 미술지도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연구소에서 조각을 지도하자 김복진은 독보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조각 경향은 한국 조각계에서 선구적인 사실적인 재현이었다. YMCA미술연구소 설치에 대해 김복진은 이렇게 술회했다.

“청전 이상범 씨와 묵로 이용우 씨 등의 同硯社나 춘곡 고희동 씨가 주재하는 서화협회나 이당 김은호 씨 외 諸氏의 고려미술원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폐를 끼쳐 드리고 사람 대가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제작하면서도 잠시나마 분위기를 만들어 보았고 그 분위기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드라도 율동이나마 감촉하여서 자위하다가 청년학관과 공영으로 미술연구소를 가장 근대적인 시설로서 시작하였드랍니다. 서양화의 책임자는 김창섭 형이었고, 조각부는 내가 담당하여서 연구생이 시세 좋을 때는 30여 명이었지요. 그중에 선전의 성격으로 본다면 특선급으로 구본웅 형이 있었고, 다음으로 본다면 장기남, 양희문 등이랍니다.”

일본에서 귀국한 3,4년 동안 김복진은 낮밤이 없이 바쁘게 뛰었다. 글도 열심히 썼다. 조선 미술사를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살펴 본 기념비적인 글 ‘조선역사 그대로의 반영인 조선미술의 윤곽’을 쓴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글은 잡지 <개벽>(1926.1)에 발표되었다.

경제활동도 열심히 하여 운니동 45-3에 저택을 마련해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도 함께 입주한다. 5회 선전에 ‘여인 전신 나체상’을 응모해 특선을 하고, 7회 제전에서 <입녀상>이 입선을 한다. 함께 응모한 제자 양화문과 장기남 안규응도 입선을 해 바야흐로 조각의 시대가 열리는 듯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끝이 없었다. 변화하는 시각문화 환경에 관심을 기울여 경성 시내의 여러 간판들에 대한 품평을 하는 좌담 ‘경성 각 상점 간판 품평회’를 잡지 <별건곤>에 발표하고, <조선지광>에 프롤레타리아미술운동의 강령적 내용을 담은 ‘나형 선언 초안’을 발표했다. 연극에 대한 꿈도 내려놓지 않아서 27년 1월 김기진 조명희 안석주와 함께 ‘불개미극단’을 만든다. ‘불개미극단’은 연극을 통한 민중교육을 목표로 만들어졌는데, 최초의 희곡작가이자 소설가인 조명희가 28년 러시아로 망명하고 김복진이 구속이 되면서 실제 연극은 무대에 올려보지 못하고 해체됐다.

 

로들러 흉판.
로들러 흉판.

 

5년6개월 옥중생활동안 목조불상 제작

예술인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점점 강화되자 김복진은 작품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다. 그는 몇년동안 ‘선전’과 ‘제전’에 작품을 응모하지 않고 대신 사회운동에 매달린다. 27년 8월엔 김은호 김창섭 안석주 이승만 임학선 신용우 유경목 등과 함께 ‘조선미술의 창조’를 내걸고 ‘창광회’를 조직했고, 1928년 3월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및 선전부원으로 선출돼 청년운동의 책임자로서 학생운동 및 노동청년운동을 지도한다.

그의 행동이 외부로 드러나면서 일제의 감시가 강화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YMCA미술연구소도 그가 나가지 못하자 시나브로 폐쇄가 됐다.

1928년 8월25일. 마침내 김복진은 이승만의 집에서 일경에 체포돼 악명 높은 서대문서로 끌려간다. 공산당에서 청년운동 및 문예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는 취조 때 진술을 거부하여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한 팔을 거의 못쓸지경이었으며 신경쇠약 후유증을 앓았다. 만 5년6개월이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1928년 8월 25일부터 1934년 2월 21일까지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했다.

토월회.
토월회.

 

김복진의 수감생활은 놀라웠다. 입소하자마자 냉수마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출소할 때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솟구칠 때면 간수 몰래 밥을 남겨두었다가 밥알을 뭉쳐 조각을 만들며 답답함을 풀었다. 그러다 그가 만든 밥알 조각이 간수들 눈에 띄어 감옥 내 목공소에 출입하는 기회를 얻었다. 김복진에게 목공소는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불상목조에 매달렸다. 어쩌면

그에게 불상제작은 조선의 전통을 재창조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자신의 고뇌를 해결해 주는 실마리였던 지도 모른다. 유학시절 느꼈던 전통에 대한 인식문제는 식민지 조선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의 사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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