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조각가 김복진… 생애와 예술(1901. 9. 23 ~ 1940. 8. 18)

조각가 정창훈(전 주성대교수)가 그린 김복진 초상화.
조각가 정창훈(전 주성대교수)가 그린 김복진 초상화.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허하백과 결혼...금산사 본존불제작

1934. 2월 21일. 김복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5년6개월만이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건강이 좋아진 김복진은 어려워진 집안 경제를 위해 건축, 장식 청부업, 금속공장, 손수레꾼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이때 김복진은 신여성 허하백을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옥중에서 함께 생활한 최창익의 소개로 알게된 소설가 박화성이 배화여고 교사인 허하백(許河伯)을 소개해준 것이다. 허하백은 숙명여고보를 졸업후 일본유학을 하고 돌아와 교사를 하던 재원이었다. 김복진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김기진은 형님없는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처가가 있는 함경남도 이원에서 정어리공장을 차렸다가 실패하고 다시 금광업에 손을 댔는데 손해만 보고 있었다.

김복진은 김기진에게 금광업을 접고 문학 활동을 하라고 권유한다. 그해 겨울, 김복진 형제는 재기의 마음으로 출판사 ‘애지사(愛智社)를 세우고 이기영과 더불어 잡지 <청년조선>을 창간하지만 러시아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두 사람이 동시에 일경에 체포당한다. 출판사 애지사에서 숙식을 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이듬해인 1935년 2월 전주 경찰부에서 출소한다.

딸 보보와 찍은 김복진 가족 사진.
딸 보보와 찍은 김복진 가족 사진.

 

출소 뒤 김복진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유한함을 깨달은 듯 작품제작과 미술비평과 조각 교육에 매진한다. 이해 1년 동안의 활동을 보면, 3월 사직공원 근처에 한국 최초의 조각화숙인 ‘김복진미술연구소’를 열어 조각교육을 시작했고, 4월엔 <조선일보>에 <조소 스케치 백인상> 연작 8점을 발표했으며, 5월엔 <조선일보>에 ‘미전을 보고 나서’를 발표하여 자신이 ‘어젯밤 무인도에서 돌아온 로빈슨 쿠르소와 같은 처지’라고 밝히며 비평활동을 재개했다. 8월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수륙일천리’라는 장문의 기행문을 발표하고 초가을엔 수백 통의 편지와 청혼 끝에 황해도 배천온천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의 주례로 허하백과 결혼을 한다. 10월. 예술론을 밝히는 글 ‘예술관념과 윤리관념은 공간의 양단이다’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다. 12월엔 전라북도 김제 금산사에서 높이 11미터의 <미륵전 본존불>제작을 진행했다. 금산사 쪽은 미륵대불이 화재로 타버리자 계룡산 갑사의 보응, 김제 부용사의 일섭 스님 등 4~5명의 국내 불상 조각가를 비롯, 김복진을 초청하여 1미터 높이의 석고 모형을 만들도록 하고 작가를 선정하는 경연대회를 개최했는데 김복진이 당선되었던 것이다. 이 모형은 계룡산 신원사 옆 암자 소림원에 모셔져 있다.

 

안창호가 이국전, 김복진과 함께 찍은 사진.
안창호가 이국전, 김복진과 함께 찍은 사진.

 

딸 ‘보보’에 남다른 애착 행복감 만끽

김복진이 그의 삶에서 작품활동을 한 시기는 1924년부터 구속이 되던 1928년까지 그리고 출옥 이후인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출옥이후 그는 불상조각에 힘을 쏟았다.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을 완성했고 경성 영도사 (지금 개운사)에서 <석가반니불>을 제작 요청받고 완성했다. 높이 3.3m 폭 86cm의 석고 도금이었던 이 불상은 일제 때까지 영도사 말사인 보타사 대원암에 봉안되어 있었다.

김복진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시기는 동경 유학시절이다. 조각과 철학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를 조각의 세계로 이끈 사람은 동경미술학교 목조교수인 스승 다카무라고운이었다. 그는 독학으로 서양의 사생 기법을 연구하여 전통 목조에 접목시킨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이었다. 다카무라 교수는 방황하는 김복진을 불러 연장을 갈아주기도 하고, 조선 사정을 묻기도 하면서, 어떻게 조각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승려이자 교수로 ‘에도 불사’ 계보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다카무라고운을 통해 김복진은 불교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동경유학 시절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한 경력은 그런 인연때문이었다.

김복진은 불상작업 외에 잡지 <중앙>에 ‘종로상가 진열창 품평’과 ‘종로상가 간판 품평기’를 연재하는 등 글도 열심히 쓰고 작품제작에도 힘을 쏟아 출옥한 뒤 처음으로 ‘선전’에 <불상 습작>과 <노인>을 응모하여 입선했다. ‘벽초 홍명희상’과 영평금광사무소의 ‘이종만씨 상’도 이때 제작했다.

후진양성에도 뜻을 두어 사업에 성공한 박광진의 후원으로 김은호, 허백련과 함께 조선미술원을 창설해 수묵, 채색화, 조각, 미술사, 미학 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모집했으나 허하백과의 갈등으로 1936년 초겨울 미술연구소와 가정을 정리한 뒤 혼자 일본으로 떠난다.

1937년초 귀국한 뒤 부인과 화해하면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직공원 옆에 2층 양옥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하고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 자신도 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나부>를 응모하여 특선을 했지만, 제자들도 열심히 길러 이국전 홍순경 안영숙 김두일 이병삼 한재홍 장익달 이성화 김경승 현호철 좌중삼삼 윤승욱 김정수 최상환 김갑수 현성각 등 조각계 후진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37년은 기쁜 일이 많았다. 청주 용화사, 속리산 법주사와 불상 조성 계약을 맺고 무엇보다 늦여름 딸 산용이 태어났다. 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김복진은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기뻐하며 애칭으로 ‘보보’라고 불렀다. 백일도 지나지 않아서 한쪽 어깨에 보보를 앉혀 종로거리를 활보하고 다녔고, 옷도 백화점에서 사오면 손수 새로 재단하여 입히는 등 보보는 그에게 기쁨의 원천이었다.

12월에는 박화성의 장편소설 ‘백화’를 각색한 연극을 극단 인생극장에서 무대에 올렸는데 이 때 배우 한은진이 백화 역을 맡았다. 이듬해 2월. 동아일보 주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마침 배우 한은진이 연기상을 수상했고, 이 인연으로 한은진을 모델로 그의 대표작이 될 ‘백화’를 제작하게 된다. ‘백화’는 한복을 입고 족두리를 쓴 여인이 두 손을 다소곳이 잡고 서 있는 6척 크기의 목조상으로 17회 선전에서 무감사로 뽑히고 일본 제1회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도 입선을 한다. 딸이 태어나면서 가정적인 가장이 된 김복진은 매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면 부인과 보보는 물론 아우네 가족까지 이끌고 관람을 했다.

 

작품 백화.
작품 백화.

 

39세 요절...미술작품 남겨지지않아

김복진은 제자 이국전과 함께 생전의 도산 안창호와 만난 적이 있었다. 안창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 입원, 1938년 3월 10일 59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김복진은 제자 이국전과 함께 사망 직전 병실로 찾아가 데드마스크를 떴다. 그러나 데드마스크는 경찰에 빼앗기고 체포되었다가 하루만에 나왔다. 당시 일제는 안창호의 사망이 끼치는 파급 효과를 우려해 영안실에 정사복 경찰관 40여 명과 고등계 형사들을 배치해서 조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일반인의 조문을 금지했다.

그는 인물 소조 작업도 많이 했다. 경성 화산수상소학교 ‘정봉현 상’, 공주 영명학교 ‘윌리암 상’, 개성인삼조합 ‘손봉상 상’, 인천계림자선회 ‘김윤복 상’, 경성 성서공회 ‘밀러 상’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러들로 상’, 당진군 신촌수상소학교 설립자 ‘박병열 상’, 경성여자상업학교 ‘한양호’ 상 등을 제작했는데 이 동상들은 모두 사라지고 ‘러들로 흉판(청동. 65×74×2.5cm, 동은의학박물관 소장)만 남아 국가 등록문화재 제495호로 지정됐다.

1939년 3월 법주사의 재촉으로 ‘미륵 대불’ 제작에 착수한다. <조선일보>는 제작 기간 2년 비용 2만원, 연인원 8천명의 인부가 동원된다는 기사를 1월 10일 자에 게재했다.

1940년 김복진은 일본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도일하여 집과 작업실을 구해놓고 귀국했는데 귀국해보니 사랑하는 딸 보보가 장티푸스에 걸려 입원해 있었다. 사흘밤낮을 옆에서 간호했으나 보보는 끝내 세상을 떴다. 딸이 죽은 지 일주일 뒤 김복진은 중이 되겠다고 머리를 깎고 나타나 허하백에게 “부모 따라 죽으면 효자라 하고, 남편 따라 죽으면 열녀라 부르는데 부모가 자식을 따르면 뭐라 부를까”란 말민 되뇌이다가 수첩에 넣고 다니던 보보의 사진을 청주 용화사에 맡기고 49재까지 축원해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법주사 불상이라는 과제가 남았지만 일손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8월 9일. 이질에 걸려 경입원을 한다. 그리고 8월 18일. 오후11시30분에 짧은 생애를 마친다. 서대문 화장터에서 화장한 뒤 부인 허하백이 유골을 추스혔다. 이 무렵 부인 허하백이 둘째 딸 상미를 낳았으나 상미 또한 몇 살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1940년 10월 5일. 49재에 맞춰 김은호씨 외 수인의 발기로 부민관 강당에서 고인의 추도회가거행되었다. 고인과 생전에 교우를 나눈 예술인들과 친지 등 일백오십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운형, 방은모, 이광수가 조사를 읽었다. 10월 6일에는 부민관에서 그의 조각 30여 점을 모아 유작전람회를 열었다. 사후에 열었지만 조선 첫 개인 조각전이었다.

10월에는 잡지 <조광>이 김복진의 조각생활 20년을 회고하는 연재 글 가운데 끝맺음 글 ‘예술가의 고난’을 유고로 싣고, 김복진 추모 특집으로 구본웅, 안석주의 글을 함께 묶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50점 남짓한 작품이 작업실에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사라져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막판에 일제의 쇠붙이 공출로 사라졌고, 김기진의 인쇄소 창고에 보관했던 목조와 소조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6.25후 부인 허하백마저 타살로 세상을 떠나, 한국 근대조각의 기틀을 세우는 등 시대를 앞선 천재조각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1944년 봄. 김복진의 유골은 김기진에 의해 고향인 팔봉산 자락 구암 15번지에 묻힌다.



▲김복진 연보



1901.9.23.(음) 충북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김홍규와 부인 김현수의 장남으로 태어남.

호 정관(井觀)

1907. 팔봉리 한학자 김사과를 가정교사로 들임.

1910. 부친 황간군수 부임으로 황간공립보통학교 입학하나, 학급내 구타사건으로 자퇴.

1910.8.29. 부친이 관직을 내려놓자 팔봉리에서 한학을 계속함

1913. 부친이 영동군수로 복직, 영공립보통학교 편입

1914. 조혼을 하나 첫날밤에 헤어짐

1916. 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1918. 박영희,이서구,김기진과 반도구락부 조직

1919. 3.1운동에 참가, 체포되었다가 훈방

1920. 도쿄미술대학 조각과 입학

1922. 김기진, 박승희. 이서구 등과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창립.

1923. 경성에서 토월회 귀국공연. 미술교육기관 정측강습원 설립, 문예조직 파스큘라 결성.

1924. 일본제국미전에 조각 ‘나상(여인입상)’ 입선. 각기병으로 고향에서 요양.

1925. 배재고보, 경성여자상업 학교 미술교사로 출강, 조선프롤레타리아(KAPF) 발기인으로

중앙위원 활동. 조선만화구락부 조직. YMCA에 미술연구소 설치(이곳서 장기남,

양희문 구본웅 등 조각가 배출), 첫 미술비평 ‘제4회 미전 인상기’를 <조선일보>에

발표.

1926. <개벽>에 기념비적인 미술비평 ‘조선역사 그대로의 반영인 조선미술의 윤곽’, ‘신흥미

술의 표적’ 발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여(女)’ 특선. 제전에 ‘입녀상’ 입선.

1927. 김기진 조명희 안석주 등과 ‘불개미극단’ 창립, <조선지광>에 미술비평 ‘나형선언초

안’ 발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활동. 김은호, 김창섭, 이승만, 안석주 등과 ‘창광회’

조직.

1928. KAPF 활동, ‘경성학교 세포사건’으로 일경에 피검. 5년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서 옥고. 감옥에서 목조불상제작.

1934. 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출소했으나 12월13일 일경에 다시 체포됨.

1935. 2월 전북경찰부에서 출소한 뒤 김복진 미술연구소를 설립.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함. 초가을에 여운형 주례로 허하백과 결혼

1936. 김제금산사 미륵본존상 제작. ‘벽초 홍명희 초상’ 조각.

1937. 딸 산용 태어남(아명 보보). 선전에서 ‘나부’특선. 경성 화산수상소학교 ‘정봉현 상’,

공주 영명학교 ‘윌리암 상’, 개성인삼조합 ‘손봉상 상’, 인천계림자선회 ‘김윤복 상’,

경성 성서공회 ‘밀러 상’ 등을 제작.

1938. 배우 한은진을 모델로 ‘백화’제작. 제자 이국전과 안창호 데드마스크를 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러들로’, 당진 신촌수상소학교 설립자 ‘박병열 상’, 경성여자상

업학교 ‘한양호’상’ 등을 제작.

1939.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제작 착수

1940. 잡지 <조광>에 장문의 회고담 ‘조각생활 20년기’를 연재. <동아일보>에 ‘조선 조각도의 항방’과 마지막 비평 ‘제19회 조선미전 인상기-조각부’를 발표. 선전에 ‘소년’ 출품을 마지막으로 8.18 이질로 사망. 10월5일 부민관에서 추도회 겸 유작전시회.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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