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문학평론가 김기진… 생애와 예술(1903. 6. 29. ~ 1985. 5. 8)

팔봉 김기진 사진.
팔봉 김기진 사진.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암울한 시대, 문학으로 이상 꿈꿔

대한민국 한복판에 자리한 유일한 내륙도, 충청북도는 한국의 근·현대문학을 이끈 우뚝한 봉우리다. 우리는 충북이 낳은 불멸의 작가들이 남겨 놓은 빛나는 작품을 통해 인생의 진수를 더듬고 그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작가란 누구인가. 작가란 ‘발언을 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글을 통해 질문하고, 설명하고, 지시하고, 명령하며, 탄원하고, 설득하고, 암시하는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사회변혁과 인간의 내면을 위해 치열하게 매달린 사람들 가운데는 충북의 문학인들이 정점을 이뤘다.

△괴산의 홍명희 △진천의 조명희, 조벽암 △영동의 권구현 △옥천의 정지용 △청주의 김기진 △충주의 권태응, 정호승, 이흡, 홍구범, 박재륜 △음성의 이무영 △보은의 오장환이 펜으로 시대를 이끌었으며 조각가 김복진(청주)과 동요작곡가 정순철(옥천)이 이에 합류했다.

혼돈의 시대, 찬란한 내륙문학의 꽃을 피운 충북문인들 중 청주가 고향인 문인은 김기진(八峰 金基鎭, 1903.6.29~1985. 5.8)이 유일하다.

앞줄 왼쪽부터 박승희, 박승목, 김을한, 송재삼. 뒷줄 외쪽부터 이서구. 김복진. 이제창. 팔봉(1922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앞줄 왼쪽부터 박승희, 박승목, 김을한, 송재삼. 뒷줄 외쪽부터 이서구. 김복진. 이제창. 팔봉(1922년). / 한국학중앙연구원

 

20세기 초 한국예술사에서 김복진 김기진 형제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 문학, 미술(조각), 연극, 예술비평에서 민족의 예술혼을 드높였다. 형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동생은 <조선일보>·<매일신보> 사회부장과 <중외일보>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족적이 뚜렷하다.

이들은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산 자락 팔봉리에서 태어났다. 팔봉산은 척부리 석실리 구암리에 걸쳐있는 해발 297m의 산으로, 산봉우리 8개가 남북방향으로 병풍처럼 솟아있어서 이름이 붙여졌다. 부모산과 망월산 은적산에서 한눈에 보이는 이 산은 산세가 좋고 전망이 좋아서 산기운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이곳을 고향으로 둔 김기진(金基鎭. 1903.6.29~1985. 5.8)은 고향의 이름을 따 자신의 호를 ‘팔봉(八峯)’이라 지었다. ‘팔봉’외에도 ‘여덟뫼’, ‘팔봉산인(八峯山人)’, 팔봉생(八峯生), 구준의(具準儀), 동초(東初) 등 여러 가지 호와 이름을 사용하였다.

김기진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찍이 서울과 일본유학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돼, 우리나라 최초로 프로 문학의 이론을 내세웠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형인 김복진 등과 토월회를 만들고, 연극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파스큘라’를 만들어 ‘인생을 위한 예술’을 내세우는 문예운동도 벌였다.

여초 김응현 글씨 묘비.
여초 김응현 글씨 묘비.

 

1920~30년대 잡지사 월평과 현장비평 등을 통해 문단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진단하는 탁월한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문단에서 여러 차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박영희와 벌인 ‘내용·형식논쟁’, 임화와 벌인 ‘예술대중화논쟁’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전쟁 때 서울이 조선인민군에 점령되자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된 뒤 즉석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대한민국 육군의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참전하여,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며 대표적인 반공(反共)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경향신문> 주필을 거쳤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 등에서 고문을 지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작품을 남겨 근·현대 한국문학의 대표작가가 되었지만, 해방을 몇 년 앞두고 일제의 회유에 변절, 친일활동을 함으로써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3.1운동 참가후 일본유학



김기진은 1903년 6월 29일 아버지 김홍규와 어머니 김현수 씨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홍규는 구한말 훈련원 주부(종6품)를 시작으로, 성진군·정평군·해미군·풍천군·보은군·진천군·면천군·황간군·춘천군·영춘군 등지의 군수를 지낸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유복하게 자랐다. 5세 때부터 팔봉리의 한학자 김사과에게 한학을 배웠다. 1910년 아버지가 황간군수로 전근함에 따라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0년 8월29일 일제강점으로 아버지가 퇴직을 하게 된데다 설상가상으로 형이 학급에서 일어난 구타사건으로 폭행을 당해,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팔봉리로 돌아와 다시 한학을 공부한다. 이후 아버지가 복직이 돼 영동군수로 부임을 하자 김기진은 형과 함께 영동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해 졸업을 하고 1916년 4월 형 김복진과 함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배재고보 시절 김기진은 형을 통해 예술적 감수성을 익히며 자유와 이상을 꿈꾼다. 훗날 함께 프로문학의 문을 열게 되는 동급생 박영희와 운명적으로 만나 친교가 시작됐다. 김기진 형제는 어릴 때부터 가슴이 뜨거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독립신문>을 인쇄해 돌리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3일 만에 풀려났지만 휴교령이 내려 학교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형제는 부모님이 있는 영동에서 한동안 근신생활을 하며 일본 유학을 꿈꾸었다. 김복진이 법학을 공부하겠다고 해서 부모님의 허락을 얻었다. 김기진의 배재고보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1920년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채 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김기진의 영향으로 박영희도 일본으로 따라갔다.

일본으로 간 후 김복진은 법학대신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로 들어가고, 김기진은 다음해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하는데 이들이 전공을 결정한 것에 대해 김기진의 딸 김복희(도미.작고)는 이렇게 말했다.

“1920년 두 분이 도쿄로 떠나셨는데 큰아버지(김복진)는 도쿄미술학교에, 아버지는 릿교(立敎)대 영문학부에 입학하셨죠. 큰아버지가 조소, 아버지가 문학을 택한 이유에 대해 아버지가 남기신 글이 있어요. 그 글에 이런 표현이 나와요. ‘우리 형제의 전공 분야 선택기준이 무엇이었더냐 하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오래오래 살아남는 길을 택하는 일이다. 사람이 세상에 왔다가 떠난 다음에도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글이요, 그림이요, 조각이요, 건축물이 아닌가’ 라고 쓰셨어요.”

김기진의 선견지명처럼 그들이 떠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들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다.

 

가족 사진.
가족 사진.

 

연극연구모임 ‘토월회’창립

1921년 일본 릿쿄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했지만, 김기진은 대학에서 만난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아소 히사시(麻生久) 교수로부터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러시아 문학에 대해 배우는데 열중했다. 김기진이 도쿄에서 공부하던 1920년대 초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시기부터 일기 시작한 민권운동이 러시아 혁명의 자극을 받아 사회주의가 확산 되고 있었다. 아소 히사시 교수는 김기진에게 말했다.

“김군은 대학을 출석하는 것이 문학을 배우고 앞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는 길인 줄 아시오?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거울이라고 레닌은 말하지 않았소. 김군은 조선의 거울이 되시오. 그렇게 되려면 고국에 돌아가서 씨를 뿌리시오! 김군이 자기 생전 그 씨의 수확을 못할지라도 좋다는 결심을 하시오. 투르게네프의 ‘처녀지’와 같이 조선이라는 처녀지에 사회변혁의 씨를 뿌리고 개척할 때란 말이오.”

제국주의라는 지배형식은 식민지를 필요로 했고, 조선은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일본의 식민지였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이론으로 떠올랐다. 일제식민지 하의 많은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자가 됐고 적어도 사회주의적 경향을 지니거나 이해했다.

1922년 5월 김기진은 김복진·박승희·이서구 등 재동경조선인유학생들로 연극연구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주도적으로 결성한다. 당시 일본유학생들 가운데 연극운동은 새로운 시도로 관심을 끌었다. 충북의 선배문인인 조명희가 1920년 김우진 유춘섭 등과 함께 연극연구단체 ‘극예술협회’를 만들어, 1921년 재동경한국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 회관건립을 위한 기금만들기로 고국순회공연을 연 것이 대성공을 거두자 이들도 연극운동을 꿈꾼다. 모임을 만든지 1년 뒤인 1923년 5월 토월회는 서울에서 귀국 공연을 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경험부족으로 연극은 흥행에 실패했다. 극본을 바꾸고 새로 연습을 해서 다시 무대에 올린 2차 공연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성공하자 김기진과 김복진은 토월회를 박승희에게 넘겨주고 탈퇴한다. 그는 새로운 변혁을 꿈꾸었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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