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문학평론가 김기진… 생애와 예술(1903. 6. 29. ~ 1985. 5. 8)

김기진.
김기진.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파스큘라 조직 신경향 문학에 경도

김기진은 일본유학 초기인 1921년부터 1922년까지는 신낭만주의 심미주의적 작품에 관심이 있었다. 박영희의 권고로 박종화 이상화 홍사용 등이 창간한 동인지 <백조(白潮)>에 작품을 발표한다. 그러던 그가 1922년 가을부터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울어진 것은 앙리바르뷔스와 아소 히사시 교수의 영향으로 보인다. 김기진이 1923년 2차 연극 뒤 토월회를 탈퇴한 것은 새로운 경향의 문예운동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박영희를 설득하여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을 지향하는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한다. 파스큘라는 시인, 기자, 조각가, 화가, 극연출가 등이 포함된 이색적인 모임이었다. 파스큘라라는 이름은 회원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박영희(PA), 이익상(S), 김복진, 김기진, 김형원(K), 연학년(YU), 이상화(L), 안석영(A)자를 연결한 것이다.

파스큘라보다 1년 먼저 최승일 송영 윤기정 김영팔 등이 염군사(焰群社)를 발족했다. 염군사는 청년 지식층과 노동자 농민층에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보급시키며 선전활동을 도모하려는 사회주의적인 집단이었다. 염군사는 “무산 계급 해방을 위한 문화를 가지고 싸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향지 <염군>을 내려고 했지만 검열 때문에 흐지부지된다.

파스큘라와 염군사는 모두 문학의 현실적 기능에 주목하여 만들어진 단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방법론이 달랐다. 염군사가 사회 운동에 무게를 두었다면, 문인이 주 구성원인 파스큘라는 문학 지향적이었다. 김기진과 박영희는 정치활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김기진은 1923년 그의 대표작이 되는 평론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를 썼다. 클라르테 운동은 신경향파 문학운동의 초기 이론적 근거가 되는 앙리바르뷔스의 소개문이다. 김기진의 초기문학관은 바르뷔스를 통한 마르크스주의 수용으로 특징화된다. 박영희 역시 김기진과 비슷한 관점으로 무산계급문학을 지향했다.
 

1930년 9월 모인 카프맹원들.
1930년 9월 모인 카프맹원들.

 

프로문학단체 카프(KAPF) 출범

김기진은 <백조>를 빠져나와 사회주의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문학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고민했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문학이 어떻게 즐거움을 주는가”라는 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이었다. 질문은 당연하게도 조국 조선의 문제로 옮겨졌다. 앙리 파르뷔스의 클라르테 운동을 배우면서 그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문학이 사회의 모순들, 특히 계급적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25년의 국내문학은 두 파로 나뉘었다. 경향파 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이다. 경향파의 계급 문학 조직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김동인 염상섭 이광수 나도향 등 민족주의 작가들이 이에 위기를 느끼고 대응에 나섰다.

1925년 2월 <개벽>이 꾸민 특집 ‘계급 문학 시비론’에 박영희 김기진 김석송이 옹호의 글을 싣자, 반대 진영의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이광수 등이 평론을 실으면서 격렬한 계급 문학 시비론이 진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문학단체인 카프(KAPF)가 출범한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였다. 1925년 8월,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해체 통합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약칭 KAPF)이 정식으로 만들어진다. 창립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 김기진, 이호, 이상화, 김복진, 조명희, 이기영, 박팔양 등이었다. 카프 초기의 주요 논객은 김기진과 박영희였고, 작가로는 최서해 이기영 주요섭 이상화 등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한국 현대문학의 초석이 되는 중요 작품들을 남겼다.

 

붉은쥐.
붉은쥐.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 상실한 것은 예술’

카프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6년 기관지 성격의 <문예운동>을 발간하고 이듬해 9월 조직개편과 함께 체제를 정비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박영희와 김기진 사이의 계급성과 형식 논쟁이 전개됐고 1930년 무렵 일본에서 활동하던 안막, 김남천, 임화 등이 가세했다. 카프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내부적 논쟁과 김남천 임화 등 이론가의 가세로 작품활동보다 정치투쟁예술의 방법으로 조직의 임무를 강조하며 정치적 성향이 점점 짙어졌다.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조선공산당협의회 사건과 연루된 ‘카프 1차사건’을 겪으며 핵심멤버 김남천을 비롯해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돼 카프의 조직활동이 위축됐다.

이어 1933년 소위 ‘신건설사 사건’으로 이기영, 한설야, 송영 등 23명이 체포되는 ‘카프 2차사건’을 겪으면서 카프는 급격히 조직이 와해된다.

박영희는 유명한 전향문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를 쓰고 조직에서 이탈해 카프는 사실상 생명을 다했다. 박영희와 함께 카프를 기초했던 김기진은 1935년 5월 임화와 함께 경기도 경찰국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면서 계급문학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카프의 이론가로서 김기진은 계급의식의 전달을 위해 기본적인 문학적 형상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꾸준히 견지하였다.

신경향파 문학에서 볼셰비키 문학으로 넘어가면서 카프 문학은 문학의 가치보다 정치성과 대중선동을 위한 도구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이라기 보단 선동문구의 나열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김기진과 박영희의 형식·내용 논쟁

김기진과 박영희의 논쟁은 1926년 말부터 시작되어 1929년까지 지속되었다. 시작은 김기진이 먼저 했다. 1926년 12월 <조선지광> 문예월평에 박영희의 단편소설 ‘철야’와 ‘지옥순례’를 언급하며 “소설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히어 놓은 건축이 있는가?”라고 혹평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김기진은 박영희가 소설이 갖춰야 할 요소들을 무시한 채 너무 쉽게 작품을 쓴 것을 비판했다. 아무리 신경향파 문학이라도 소설이 갖춰야할 일정한 형식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박영희는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라는 글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전문화가 한 건축물이라면,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은 그 구성물 중 하나이다. 서까래도, 기둥도, 기왓장도 될 수 있는 것”이라며 “계급문학은 무산계급의 계급적 의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 작품의 가치는 구성과 묘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나타나는 계급적 의식에서 규정된다”는 원칙을 내세워 반박했다.

김기진이 ‘형식’의 중요성을 내세웠다면, 박영희는 ‘내용’ 우선의 원칙론을 강조하며 계급문학의 요건을 고수했다. 이들의 논쟁은 카프 자체의 노선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조직 내부의 압력으로 김기진이 일방적으로 철회하면서 결말이 났다. 박영희는 논쟁의 방향을 계급문학의 이념적 성격에 대한 논의로 바꿔놓았고, 투쟁기 계급문학은 형식적 완결성보다 의식과 이념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내용우위론(정치 우위론)을 통한 투쟁성 강화를 중요시했다.

‘내용 형식 논쟁’으로 박영희는 카프의 주도적 이론가가 되어 ‘목적의식론’을 제기하며 카프의 제1차 방향전환을 주도했다. 그리고 김기진은 정치적인 방향으로 전환되는 계급문학운동의 선두에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다.

가족사진(젊은 시절).
가족사진(젊은 시절).

 

제1차 방향전환(목적의식적 방향전환) 이후, 프로문학 창작이 위축되고 발표된 작품조차 독자들에게 외면 받으며, 카프에 대한 일제의 검열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1928년 김기진은 ‘대중화론’을 통해 자신의 문학론을 재론했다.

문학대중화론은 문학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게 계급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교양 정도가 낮은 이들까지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김기진은 대중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침으로,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했다. 그러나 임화, 안막, 김두용, 김남천 등이 반론을 제기하며 카프의 주도권은 카프 동경지부를 이끄는 소장파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결국 김기진은 ‘계급의식이 선명하지 않은 자’, ‘예술지상주의자’, ‘현실추수주의자’ 등의 비난을 받으면서 주도권을 잡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카프시절 김기진이 벌인 ‘문학의 형식내용 논쟁’과 ‘문학의 대중화론’ 논쟁은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논쟁으로 기록된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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