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타슈켄트 알리세르 나워이 박물관에 있는 조명희기념실에서 함게 방문한 동양일보 취재진과 기념촬영을 했다.
타슈켄트 알리세르 나워이 박물관에 있는 조명희기념실에서 함게 방문한 동양일보 취재진과 기념촬영을 했다.

[동양일보]현지 도착 3일째인 9월 6일 탐사단 일행은 18시 32분 카자흐스탄에서 열차에 탑승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로 출발했다. 열차는 국경을 통과해 우즈베키스탄의 영내로 진입했다. 이동 시간이 무력 16시간 50분이 소요되는 장거리였다. 탐사단이 열차를 이용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동하는 코스를 선택한 것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길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제 이주당한 17만여 고려인들은 이주 실행 3~7일 전에 일방적으로 통고를 받아 제대로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재산도 처분하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으로 버려졌다. 객실이 아니라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떨어져 죽고 굶주려 죽거나 시달리다 설령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정착했다고 해도 열악한 환경 때문에 죽음의 행렬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탐사단 일행이 타고 이동한 열차는 지금은 화물열차가 아니라 4인실 침대가 있는 국제열차로 변모한 상황이라 그때 선조들이 겪었던 고통을 직접 느끼기에는 근원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보면 기차가 쉬지 않고 달리는 탓에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추위를 견뎌야 하는 일 그리고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일 등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과 사투를 벌이는 가슴 아픈 장면이 나온다. 더 비극적인 장면은 어린아이와 노약자가 죽었을 때 땅을 파 매장할 연장이 없고 나무가 도구가 된다고 해도 언 땅은 오히려 나무가 튕겨 나갈 정도로 견고해 무용지물 속수무책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정차 시간까지 짧아 눈으로 ‘봉분’을 만들어놓고 떠나야 하는 애절함을 작가는 ‘눈 장례식’이라 불렀다.

고려인들이 이주한 로드를 따라 탑승한 열차에서 바라본 중앙아시아의 너른 벌판.
고려인들이 이주한 로드를 따라 탑승한 열차에서 바라본 중앙아시아의 너른 벌판.

필자가 이동하며 차창 밖으로 본 저 드넓은 평원 어느 지점에서 85년 전 이러한 비인간적 반인륜적 만행이 서슴없이 자행됐던 것이다. 비극적 현장을 지나며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유로스타’와 비정한 폭력의 역사를 잊은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낭만적 서정과 우수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낱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포석의 처자(3남매)도 이 무리 속에 포함되어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로 이주했다. 포석은 이주 전에 고려인 사회의 대표적 지식인 숙청의 피바람에 희생됐다. 그 숫자가 무려 2500여 명에 달했고 포석은 핵심 주요 인물로 맨 앞줄에 있었다. 곧 돌아온다며 놀란 가족을 안심시킨 후 집을 나섰던 가장(家長)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생이별을 한 그들이 정착한 땅이 우즈베키스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석의 처자와 고려인들은 한민족 특유의 근성으로 죽음의 땅을 옥토로 만들며 현지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 나갔다.

1988년 타슈켄트에 문을 연 ‘조명희문학기념실’과 1992년에 명명된 ‘조명희거리’도 고려인들의 이 같은 희생과 헌신에 대한 현지의 신뢰가 전폭적으로 반영된 결과다.

조명희문학기념실은 우즈베키스탄의 국민시인이고 정치가며 미술가인 영웅 ‘알리세르 나보이(1441~1501)’를 기리는 박물관 4층에 마련돼 있으며 조명희거리는 ‘빽쩨미르’ 거리에 있다. 사실 포석 개인적으로는 생전에 우즈베키스탄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 포석의 동선은 하바롭스크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생전 발을 딛지 않았던 땅에 자신을 기리는 공간이 있을까. 그건 바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목숨을 걸고 그 사회에 헌신한 대가로 얻은 ‘면류관’인 까닭이다. 당신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사람이 바로 포석 조명희였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기념실’과 ‘거리’는 이렇게 해 만들어지게 된 것이며 이는 포석의 연해주에서의 위상을 명징하게 반증하는 돌올한 역사이기도 하다. 내 나라 내 땅 안에서도 특정인을 기리는 공간 설치는 법적 행정적 그리고 지역적 이해관계 때문에 첨예한 난항을 겪는 게 일반적인데 하물며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 낯선 외국인의 기념물 설치 공간을 허락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역지사지로 우리 땅에 외국인의 기념 공간 설치를 생각한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더구나 조명희문학기념실은 우즈베키스탄을 넘어 중앙아시아 전체의 영웅인 알리세르 나보이를 기리는 규모가 매우 큰 박물관에 있다. 우리의 국민 영웅인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박물관에 외국인을 기리는 공간을 배려할 수 있을까. 나보이가 그들에게 얼마나 존경 받는 인물인가는 곳곳에서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박물관은 기본이며 나보이주(州)가 있고 나보이 ‘극장’이 있고 나보이 ‘대학’이 있고 나보이 ‘공원’이 있다. 나보이는 우즈베키스탄어(語)의 문법을 체계화시키며 그 언어로 시를 쓴 최초의 민족시인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16만2000단어로 괴테의 5만2000단어와 푸시킨의 6만4000단어보다 월등하다. 그러니까 나보이는 왕은 아니었지만, 우즈베키스탄인들이 추앙하는 티무르 왕과 필적할만한 위상을 가진 인물로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이나 일제 강점기 민족어를 갈고 닦은 만해와 육사 그리고 포석과 같은 민족시인이었다. 그런 인물을 온전히 기리는 박물관에 포석이 있다. 대한민국이 있다. <계속>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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