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동양일보]필자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는 ‘포석조명희문학기념실’을 이미 다녀간 사람들이 찍은 사진과 자료로만 봤을 뿐 이번에 처음 방문한 것이다. 설레는 마음은 다른 탐사단 일행과 같은 기분이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걸어서 층계를 올라 드디어 4층에 도착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더 좁고 누추했다. 30명이 넘는 탐사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가 둘러보기 어려운 공간 구조였기 때문에 출입문 양쪽을 활짝 열어 공간을 확보했다. 들어서자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이 포석의 ‘흉상’이었다. 포석과 닮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형형한 눈과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그가 걸어간 선구자의 결의에 찬 삶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아 옷깃을 여미게 했다.

출국하기 전 ‘동양일보사’에서 현지 가이드에게 부탁해 기념실 내부의 오래된 커튼과 양탄자를 새로 교체하거나 세탁을 한 상태라서 실내 환경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조악하지 않았다. 단지 필자가 누추했다고 말한 것은 전시된 자료의 상태와 배치 구조가 중구난방으로 중첩돼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진천에 있는 포석조명희문학관은 일반 관람객과 연구자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곳이지만 이곳 기념실은 연구자 중에서도 포석과 관계된 전문 연구자만이 주로 찾는 소외된 공간으로 전락한 게 사실이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여행 온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 포석조명희문학기념실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이국 향기에만 취해 돌아가는 게 또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역만리로 여행 온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와 기념실을 둘러보고 간다면 그들이 느끼는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가 얼마나 클까를 생각할 때 부족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오로라’ 하나만을 보기 위해 북유럽의 핀란드나 아이슬란드를 찾는다. 기념실의 존재가 보편적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사람들이 오로라 하나만을 보기 위해 북유럽을 찾는 것처럼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를 찾을 것이다. 아시아의 신흥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도약은 기념실의 활성화에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우즈베키스탄은 대한민국의 ‘문화 영토’의 마지막 거점이자 원심으로 팽창하는 구심 즉 ‘문화전진기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아쉬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한국인 각자지만 결국 구체적으로는 포석의 고향인 진천군이 적극적인 행정 행위를 통해 이를 구현해야 한다. 전시실의 경우에도 큰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적은 경비로도 얼마든지 쾌적한 기념실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그 공간이 주는 역사적 현실적 의미가 매우 커 기념실의 협소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실만 기할 수 있다면 기념실 존재 자체가 주는 파급력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다.

포석 조명희는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충북사람이며 궁극적으로는 ‘진천’ 사람이다. 이번 탐사단 일행 중 진천 출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필자도 진천은 제2의 고향이지 태어나 성장한 생지(生地)는 아니기에 정확히 말한다면 진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셈이다. 기념실을 방문한 탐사단도 포석으로 인해 진천이 새롭게 인식이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을 했지만 ‘나보이’란 인물은 우즈베키스탄의 국민 영웅으로 나보이주(州)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보이와 포석의 이러한 인연을 고리로 나보이주와 자매결연 등 양 자치 단체가 상호 공동관심사에 대해 소통하고 교류한다면 역사적인 인물로 인해 두 지역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더욱 긴밀하게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이런 구체적인 말을 지면으로 언급한 이유는 ‘벡째미르’ 거리에 있던 조명희거리가 지금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련 연방이 해체된 후 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자민족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인의 이름이 들어간 지명 등을 자국의 위인으로 교체한 탓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 논리요 명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와 명분도 우리가 지속적 그들과 소통하고 교류했다면 존치는 물론 더욱 바람직하게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조명희거리는 그들 공동체에 헌신하고 기여한 고려인들의 노력을 공적으로 인정하며 지속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먼저 제안을 한 것이다. 이후 고려인들이 그 제안에 응답하면서 명명된 행정적 역사적 법적 구속력을 갖는 약속이었다. 삭제하거나 부정한다고 해서 없던 일로 지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초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한 진천군이 보이는 진정성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원상회복이 가능하리라 본다. 조명희기념실도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조명희거리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 늦기 전에 서두를 일이다.

탐사단이 다음으로 찾은 곳이 ‘김병화농장’이다. 김병화(1905~1974)는 고려인으로 소련 전역에 한국인의 근면성을 떨친 ‘콜호스(집단농장)’ 지도자다. 김병화는 소련의 영웅 칭호 중에서 두 번째로 급이 높은 ‘사회주의노력영웅’을 무려 두 번이나 받았는데 두 번 받은 사람이 소련 역사를 통틀어 205명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으로 세 번 이상 받은 사람을 합쳐도 300명이 안 된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 훈장을 세 번 받은 사람은 2명 두 번 받은 사람은 3명뿐이다. 사회주의노력영웅 말고도 다른 훈장도 많이 받았다. 김병화는 죽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 받았다.

김병화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니었지만 강제 이주된 곳에 와 그들과 함께 그가 지도하는 ‘북극성 콜호즈(집단농장)’의 농산물 생산량을 초과 달성하곤 했다. 북극성 콜호스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스였는데 이들은 잘 짜인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작물을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 재배한 ‘목화’에서도 결과는 놀라웠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지시가 내려와도 김병화를 비롯한 고려인들의 근면성과 성실성은 이를 능히 극복 현지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으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기념관이 내부 수리 중이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마당에 세워진 흉상 왼편에 주렁주렁 달린 훈장이 김병화가 왜 영웅인가를 단박에 보여주었다. 현관 주변에 여러 그루의 조선 소나무와 아름답게 핀 쑥부쟁이 꽃이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지 못하는 일행의 아쉬움을 위로해주었다. 소나무와 쑥부쟁이 꽃은 아마도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던 김병화와 고려인들의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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