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안승각의 생애와 예술(1908.12.26.~1995)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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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6일. 충북문화관 숲속갤러리에서는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거장의 귀환”(RETURN OF THE MASTERS)전이었다. 충북문화재단이 주최·주관한 이 전시에서 ‘거장’이라 불린 이는 누구일까.

‘거장’이란 이름으로 초대된 화가는 충북미술교육의 선구자인 안승각(安承珏).12.26.~1995. 전 청주교육대 교수)과 천재화가로 이름난 그의 아들 안영일(1934~2020) 부자(父子)였다.

그렇다. 그들 부자는 거장으로 불릴만 하다. 특히 안승각은 한국에서 서양미술을 처음 접한 1세대 구상화가이면서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수많은 화가들을 길러낸 한국 미술교육의 거장이다.

그가 길러낸 제자는 이름만 들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화가들로, 윤형근(청주상고), 정창섭(청주사범학교), 박노수(청주상고), 이석우(청주사범학교), 엄재원(청주사범학교), 이건옥(청주사범학교), 민병각(청주사범학교), 안영일(아들), 김영길, 류재화, 노재현, 장부남, 김홍주, 김경화, 신영식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윤형근은 김환기의 사위로 ‘하늘과 땅’을 단순화한 추상화의 거목이고, 서울대교수를 지낸 정창섭은 색을 뺀 한지작업으로 두 사람 모두 단색화의 1세대들이고, 박노수는 쪽빛을 감각적으로 입힌 한국화의 대표화가이며, 이석우는 부산지역의 한국화를 이끌며 ‘부산의 예술혼’이라 불리던 화가였다.

안승각. 그의 열정과 교육으로 한국화단이 한결 풍성해졌다.

안승각에 이어 충북미술을 한 단계 올려놓은 교육자로 김종현이 있다. 김종현은 청주상고1회졸업생으로 동경보통미술학교를 중퇴하고 1948년 청주상고에 부임해 김봉구, 이석구, 정해일, 박영대, 한기수, 이상중, 이봉원 등을 길러내 충북미술의 기틀을 다졌다.

교사 사표내고 도쿄로 미술유학

안승각은 1908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연백군은 연안군과 백천군이 합쳐진 군으로 그는 온천지로 알려진 백천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해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해주사범은 관비로 학생들에게 교복과 구두를 지급해주고 매월 7원(당시 일급 하숙비 월10원)씩을 생활비로 지워해 주는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1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다. 안승각은 기숙사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다. 취침시간인 밤 10시가 지나면 벽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책을 보았다.

사범학교에서는 교직과목 외에 음악과 미술을 배웠는데 2학년 때부터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안승각은 미술을 선택했다. 이때 만난 이시구로 미술교사는 안승각의 그림을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적극적으로 지도를 해주었다. 해주사범을 졸업한 뒤 남천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미술에 미련이 많아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화가들이 펴낸 강의록으로 이론 공부를 하고, 통신을 통해 도쿄의 유명화가로 부터 그림에 대한 강평도 받았다. 또 학교 교사들이나 인근 지역의 철도원 가운데 미술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동호회를 만들어 주말마다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조선미술대전(鮮展)에도 출품해 보았지만, 입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승낙을 받지않고 과감히 사표를 내고 일본유학을 떠난다. 당시 유학생의 나이로는 다소 많은 26세였다. 그가 남천을 떠날 때 전교생들이 기차역에 나와 환송을 해주었다.

당시의 심경을 안승각은 1978년 충청일보에 연재한 “나의 인생 청풍에서-나의 그림 나의 인생”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천역을 떠나 열차로 항도 부산에 도착하여 다시 배편으로 현해탄을 지나면서, 온갖 감회와 새로운 각오로 착잡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내가 미술에만 열중할 수 있는 고장은 일본이 아니면 프랑스이다’라고 수없이 다짐하면서 졸업장과 교원자격증을 불태워 파도치는 물결 속에 날리면서 영원히 고국을 떠나는 듯한 생각 속에 잠겨있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도쿄에 도착한 것은 1934년 3월7일 오후6시였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역사가 깊은 동경태평양미술학교를 선택한다. 처음해보는 누드모델 데생에도 불구하고 실기시험을 통과하여 당당히 합격한다.

‘선전’입선으로 작가입지 다져

도쿄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당시 도쿄에는 극장간판그리기, 인형얼굴 그리기, 만화, 삽화, 그림연극의 각본화 등 미술과 관련된 직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순수미술공부를 하는데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어서 그림과 관계가 없는 신문배달을 택한다. 석간신문 배달은 조간신문보다 월급은 적었지만, 저녁에 1회만 돌리므로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매석신문을 택했다. 더구나 배달원들은 신문사 지국에서 합숙을 하였으므로 자연히 숙식문제도 해결되었다.

4월5일 입학식을 했다. 한 학급이 3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한국인은 혼자였다.

미술학교는 매우 엄격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유학이라서 안승각은 고민하지 않고 성실하게 기초를 익히는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 일본으로 간지 2년째인 1935년 일본 제1미술협회전에서 작품 ‘꽃’을 출품해 특선을 했고, 학교 재학 중에도 동경 태평양미술전에서 여러 차례 입선해 실력을 드러냈다. 1937년 동경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제작 콩쿠르에서 입상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화가등용문인 제17회 조선미술대전(선전)에 도전을 해서 당당히 입선을 하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첫 입선을 한 작품은 실내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음악감상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성을 그린 60호 크기의 ‘청음(聽音)’이었다. 2주일 만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이후 안승각은 18회(1939년), 19회(1940년), 21회(1942년) 선전에서 연이어 입선을 한다.

그의 그림은 풍경화를 비롯하여 인물화와 정물화에 이르기까지 소재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구도는 소재에 상관없이 주로 삼각형 구도를 취해 심리적으로 안정된 면모를 보였다.

한국인 차별 속에 그림팔아 생활

안승각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남천보통학교 교사시절에 개성이 고향인 이점덕과 약혼을 했다. 이점덕이 개성에서 태어난 장남 영일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오자 안승각 1935년 결혼식을 올리고 살림을 차렸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서 셋집을 얻기가 어려웠는데 안승각은 일본어가 능통하고 화가라는 직업으로 신뢰를 얻어 자신의 집은 물론 교민들의 집도 많이 얻어주었다. 안승각은 직장을 잡는 대신 회사나 기업체에 그림을 팔아서 생활을 했다.

그림을 팔다가 겪은 일중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안중근의사 사건이 일어난 뒤였다. 한 기업체에 들러 사장에게 그림을 보였더니 즉각 사겠다고 계약을 했다. 회계과에서 돈만 받으면 되는데 사장이 불쑥 고향과 이름을 물었다. 이때 일어난 일에 대해 안승각은 다음과 같이 회고록에 기록했다.

“‘고향은 한국이고 이름은 안승각이요.’ ‘그럼 안중근을 아시오?’ ‘우리와 같은 안씨요’ 이말은 듣고난 사장은 안색이 달라지더니 내 그림을 사기로 했던 것을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사장에게 ‘당신같은 사람이 사장이냐?’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큰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당신에겐 그림을 안팔겠다’고 하고 그림을 들고 나와버렸다.”

그는 일본에 살면서 동네 반장을 맡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느라 거의 집에 머물자 주민들이 반장을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반장일을 하는 동안 큰딸을 잃은 아픔도 있었다. 2차대전 말기 공습경보로 등화관제를 하고 집집마다 확인을 하고 온 사이 3살짜리 큰 딸 춘자가 동네 앞 개울에 빠져 숨진 것이다. 그 슬픔을 잊기까지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는 다시 일탈을 꿈꾸었다. 프랑스로 건너가 다시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는 중 뜻밖의 일이 생겼다. 동경태평양미술학교의 동기생이 프랑스로 떠난 지 한 달도 채 못돼 짐을 싸들고 일본으로 돌아 온 것이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해 유학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로부터 약 4년 동안 일본 외무성은 프랑스 유학을 금지시켰다.

안승각의 도불(渡佛)계획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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