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시인 신동문… 생애와 예술(1927. 7. 20. ~ 1993. 9. 30.)

신동문 사진
신동문 사진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풍선기’로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

1993년 9월30일 한국문단은 신동문(辛東門·1927.7.20. ~1993.9.30) 시인을 잃었다. 66세의 일기. 지병인 담도암이 원인이었다. 그는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각막과 장기를 기증했다.

시대의 발언자이자 4.19 혁명을 불멸의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 신동문. 1975년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출판사가 펴낸 책을 판매금지 당하고, <창작과 비평>의 발행인에서 스스로 물러나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변 마을로 내려와 농부가 된 뒤엔, 자신을 ‘왕년 시인’ ‘왕년 문학가’라 자처한 진짜 시인.

언론인시절 사진.
언론인시절 사진.

 

평론가 유성호 씨는 “신동문 시인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이채로운 음역(音域)을 선보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프로필 사진.
프로필 사진.

 

1950년대 중반에 등단하여 전후(戰後)의 황폐한 사회현실을 직정(直情)의 언어로 증언하였고,불의한 현실에 맞서 저항하는 순정한 시적 자아를 창조했으며, 지나온 청춘의 삶을 통렬히 비판하거나 참회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냈고, 지식인의 책무 앞에서 고뇌하는 지성의 모습을 보였다. 서정 단시 위주의 미학주의에 빠져있었던 문학사에 일종의 반시적(反詩的) 시풍으로 우리 문학사에 뚜렷이 각인되고 있는 반(反)문학사적 시인. 신동문.



“오늘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무엇을 기다려야 하느냐? 이젠 습성처럼 풍선을 띄우며 보람을 걸어보며 내일을 꿈꾸어보나 우리에겐 아무도 내일이 없다. 그래도 그것을 기다릴 나겠지만 기다려주지 않을 것은 나의 수명이리라. 기다리다 남을 것은 하늘뿐이고 ‘푸ㅇ’하고 터져버릴 풍선의 운명을 깨친 현기증 때문에 나는 어지러이 비실댈 따름인가? 비실대며 비실대며 어떻게 나는 오늘을 견뎌야 하느냐?” -풍선기 11호



신동문은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선기’(6-20)가 당선되면서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났다. 그러나 1967년 12월 <현대문학>에 발표한 ‘내 노동으로’를 끝으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불과 10여년의 짧은 시력(詩歷)동안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 ‘제3포복’ 등 현실 추수주의에 저항하는 화제의 시들을 발표했다.

 

가족사진.
가족사진.

 

홀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교육받아

신동문은 1927년 7월20일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山德里)에서 아버지 신재한(辛在漢)과 어머니 김대련 사이의 2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재한은 조선말기 고종황실의 사무를 맡던 궁내부주사 퇴직관리였다. 그는 본래 한학과 의학을 공부한 유학자요, 한의사였다. 일제강점으로 궁의 사무가 폐지되면서 산덕리로 귀향해 지내던 중 아내를 잃었다. 신재한은 이웃마을의 김대련을 두 번째 아내로 맞게 되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신동문과 누이동생을 낳았다.

신재한은 자상한 성품으로 쉰한 살에 얻은 늦둥이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건호(建浩)’라는 이름을 지어두었고, 산모에게 직접 미역국을 끓여주었으며, 한약재를 달여서 아기에게 보약을 먹였다. 신재한은 아기를 등에 업고 지냈다. 그런데 ‘건호’가 젖을 뗄 무렵인 두 살때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신동문이 5살이 되던 해 청주시 석교동으로 이사했다. 단칸 셋방에서 궂은일을 하며 남매를 키웠는데, 이복형 신건택(辛建澤)의 도움이 컸다. 신건택은 신동문과 27살의 터울로 당시 문의면장을 지냈다. 신건택은 가끔씩 찾아와 학비와 생활비를 내놓곤 하면서 그들을 보살펴주었다. 훗날 신동문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없으나 자상한 형에 대해 아버지를 대신할만한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가정교육에 남달리 신경을 썼다. 신동문은 1963년 여성교양지 <여상(女像)>에 연재한 자서전 ‘청춘의 병든 계단’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보수적이고 온건한 시골 소도시인 청주에서, 그것도 유달리 엄한 유교적인 계율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매사에 지기를 못 펴는 소년이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작고한 뒤의 나를 기르는 어머니의 신조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애비 없는 후레아들’ 소리를 듣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지도 못하게 했다. 나는 언제나 대문 안에서만 혼자 놀아야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탐정소설류나 잡지는 읽지 못하게 했는데, 소위 세계명작소설이나 톨스토이나 위고 등의 대문호의 소설들은 허락했다. 질식할 듯한 청소년 시절, 책을 읽는 것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정월 초하룻날, 몇 푼의 여비를 들고 집을 나와 서울로 간다. 어머니에게 반기를 든 가출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해 길가에 써 붙인 광고를 보고 하숙을 정했다. 그리고 진학하고 싶은 대학교 구경 겸 일주일 정도 서울거리를 방황하던 중 하숙집에서 짐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어머니의 부탁으로 서울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사촌형이 그의 처소를 수소문해 짐을 모두 자기 집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그는 사촌형의 엄한 감시 속에서 시험공부에 몰두해 서울대학교에 합격한다.

 

충북문학상을 받고.
충북문학상을 받고.

 

수영선수로 런던행 준비하다 좌절

신동문은 어릴 때부터 수영을 잘했다. 6,7세 때 이미 개헤엄으로 고향의 강을 건널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주로 청주 명암지에서 수영을 했다. 일제말기엔 청주에서 열린 수영대회에 나가 일본 학생들을 떨어뜨리고 1등을 해서 수영선수로도 이름이 났다. 신동문은 서울대학교 입학을 한 뒤 한 학기를 다니고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데다 지병인 결핵이 도지는 바람에 2학기 등록을 하지 못했다. 대신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에 수영 특기생으로 편입학을 했다. 등록금도 면제받았다.

1947년 봄, 대한수영연맹은 이듬해 런던올림픽에 나갈 국가대표를 뽑았는데, 신동문은 후보 10여명 안에 들었다. 그는 수영을 통해 ‘음모’를 품었다. 런던 올림픽에 참가해 영국에 눌러앉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매일 10km 정도를 헤엄치며 연습에 몰입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지나친 연습과 과로로 그만 결핵성 늑막염에 걸린 것이다. 결국 청주도립병원에 입원해 기절을 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사흘 동안 그의 몸에서 1400cc의 물을 빼냈다. ‘원대하고 찬란했던’ 런던 행을 접으면서 꿈도 사라지고, 기약 없는 입원 생활에 그는 너무 억울했고, 슬퍼졌고, 우울해졌다. 병실문 앞에 ‘면회사절’을 써 붙이고 슬픈 공상을 터무니없이 확장시키며 감상에 잠겨 있곤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표정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신동문의 육필원고.
신동문의 육필원고.

 

첫사랑으로 시를 쓰기 시작

그러던 그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첫사랑에 눈뜨면서부터다. 정확히 말하면 여동생의 친구인 여학생에 대한 짝사랑이었는데, 그는 이때의 심경을 <여상>지에 연재했다. 유학의 꿈이 좌절되고 도립병원에 입원해있던 1947년 가을, 그는 병원 복도에서 잠옷을 입고 걸어오는 한 여학생을 보고 온몸이 경직된다. 거리에서 몇 번 보았는데, 그때마다 소녀의 모습이 보이면 가던 길의 방향을 바꿔가곤 했었던 소녀였다. 여동생이 서울의 K여고를 다니는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알려줘서 ‘재숙’이라는 이름을 알았다. 그의 온 신경은 ‘재숙’에게 있었다. 그는 습작이지만 생애 첫 시를 썼다.



머언 물굽이/ 너 떠나고 난 뒤의/ 머언 물굽이//

종일토록 오늘도/ 머언 물굽이 -‘강’ 전문

 

회현동 결핵협회 사무실에서 동료 문인들과 함께(1960년).
회현동 결핵협회 사무실에서 동료 문인들과 함께(1960년).

 

신동문은 매일 밤 유서를 쓰듯 그녀를 그리워하는 시를 무수히 썼다. 그리고 ‘재숙’에 대한 짝사랑과, 유학실패와 학업중단에 대한 좌절감, 결핵으로 인한 공포 등 젊은 나이의 방황으로 다량의 수면제를 입에 털어넣는다. 스물한 살의 치기어린 방황이었다. 이 일을 두고 신동문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발육부진, 만숙(晩熟)의 증표’하고 말했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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