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동문의 생애와 예술(1927.7.20 ~1993.9.30)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 유영선 기자]첫사랑을 위해 목숨걸고 한강건너

1950년 신동문은 스물세 살의 청년이 되었다. 그의 병은 일진일퇴의 진도를 보여 계속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주변사람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문학수업차 상경하여 하숙방에서 뒹굴었다. 첫사랑의 소녀가 숙명여대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갔다는 정보만 얻었다. 그녀도 서울에 있고 그도 서울에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유월이 되었다. 신동문은 어머니가 약닭을 해놓았다는 연락으로 청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 6.25가 일어났다. 그는 전쟁소식에 그녀의 안부가 불안해 가슴을 움켜쥐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얻어 무작정 서울로 향한다. 조치원역을 가보니 피난 떠나오는 남행열차만 있을 뿐 북행열차는 몇 편 없었고 그나마 일반인은 탈 수가 없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군용열차에 숨어들어 서울까지 가서 한강을 헤엄쳐 건넌 뒤 모래사장을 포복으로 지나쳐 대학의 기숙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기숙사는 텅 비어있었다. 다시 낙원동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 그들 가족이 청주로 피난을 갔다는 얘기를 듣고 청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가 청주의 외곽 금천동 과수원에 와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안심을 한다. 그녀에게 아는 체도 하지 못했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그녀네 가족도 상경을 했다. 그도 백을 챙겨들고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을 서성이다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신동문과 남기정 부부
신동문과 남기정 부부

전쟁이 계속되자 국민방위군 소집통보가 나왔다. 그는 밤을 새워 “재숙 씨의 행운을 빌며 밤마다 이 대문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젊은이는 내일 싸움터로 갑니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어떤 청년으로부터”라고 편지를 쓰지만, 끝내 그녀의 집으로 던지지 못하고 호주머니에 넣은 채 소집장소로 간다. 그러나 그곳 책임자의 부패와 부당한 처사를 보고 탈출을 하여 공군에 자원 입대한다.

그는 제주공군비행장과 경남 사천 공군비행장에서 복무를 했다. 그가 하는 일은 비행장 지휘탑에서 비행기 이착륙을 유도하는 신호를 보내거나, 기상관측용 풍선을 하늘로 띄워 비행여건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신동무 전집(시집)
신동무 전집(시집)

공군에 자원입대...‘풍선기’를 쓰다

전쟁 중의 군대생활은 그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역사적 기점에 선 우리 민족의 위치와 그런 민족의 한 청년이 치러야할 시련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의 자신이 문학에 대해 가졌던 소신, 일종의 심미주의적인 예술관과 결별했다.

시작(詩作)태도가 달라졌다. 맹목적인 연애감정을 습작하던 그의 시는 주체적인 각성과 시대적인 아픔으로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전쟁의 비정함, 인간 존엄의 상실, 현실의 부조리, 현대문명의 시스템이 인간에게 폭력으로 군림하는 것들을 표현하면서 저항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선을 보인 시가 바로 ‘풍선기’ 연작이었다.

“초원처럼 넓은 비행장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비행기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풍선을 하늘로 띄웠으나 인간이라는 나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했다. 그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하여 신열을 위생하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귀처란 애초부터 알 수 없던 풍선들 대신에 머언 산령 위로 떠가는 솜덩이 같은 구름 쪽만을 지킨다.” -풍선기 1호

풍선기는 산문체 연작시로 원래는 53편에 1700행이나 되는 장시였다. 그러나 시를 썼던 시기가 등단하기 전 군복무시절인데다, 전쟁와중에 결핵과 처절하게 투병하면서 원고뭉치가 절반 이상 분실되었다. 1956년 청주에서 발간된 그의 유일한 시집 <풍선과 제3포복>에는 조선일보 등단이후 정리한 20편의 풍선기만 남았다.

그는 ‘제3포복’이란 시도 썼는데, “빨리 끝이 났으면.”이 18번이나 반복되는 이 시 역시 6.25라는 미증유의 전란 속에서, 그 전쟁의 말단 일원이 되어 “박제된 사지를 끝끝내 허우적허우적 거리며” 전쟁의 소용돌이를 감수해야 하는 인간의 고통을 표현한 시였다.

전쟁은 신동문에게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충격과 내면에 상처를 주면서 그의 시가 발원하는 진원지가 되었다. 전쟁의 참혹함은 그에게 반전(反戰)과 현실비판 의식을 갖게 했다. 그의 시에서는 자연스럽게 ‘현실참여’와 ‘행동’ ‘저항’의 시적 특성이 나타났다.

신동문은 풍선기 연작을 쓸 때를 회상하는 글에서 “오늘도 나는 전신(全身)으로서 세계를 감각하고 역사를 감각하고 나를 감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들에 반응한다. 의미(언어)로서 반응할 때 시가 되고, 현상(육체)으로서 반응할 때 행동이 된다. 이 끊임없는 감응의 진폭이 나의 존재를 보증하고, 생명을 전진시킨다”고 말했다.

도립병원서 병실문학 꽃피워

신동문은 스물일곱 살이 되던 1954년 가을, 군에서 제대를 해 청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1960년 봄까지 5년여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충북도립병원에서 보낸다. 결핵치료를 위해서였다. 긴 병원생활로 생활의 중심이 아예 병실로 옮겨졌다. 그는 병실에서 시를 쓰거나 발표했고, 청주에서 비상근의 직업도 가졌다. 충북 유일의 일간신문인 <충북신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고,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신동문 시인 문하생들 ; 청주고교 문예반생 연합동아리 〈푸른문 문학동호회〉 단체사진-1956년 7월 푸른문학동호회 창립기념 ‘시 낭송의 밤’ (청주 YMCA회관) 앞줄 맨 오른쪽 서 있는 이가 홍원길 초대 민선 청주시장, 그 옆이 신동문 시인. 맨 왼쪽에 앉은 이 민병산 철학수필가
신동문 시인 문하생들 ; 청주고교 문예반생 연합동아리 〈푸른문 문학동호회〉 단체사진-1956년 7월 푸른문학동호회 창립기념 ‘시 낭송의 밤’ (청주 YMCA회관) 앞줄 맨 오른쪽 서 있는 이가 홍원길 초대 민선 청주시장, 그 옆이 신동문 시인. 맨 왼쪽에 앉은 이 민병산 철학수필가

1955년 1월 신동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봄 강물’이 가작,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풍선기’ 한편이 가작으로 각각 입상했다. 이에 <충북문화사>가 문학상을 제정, 제1회 충북문학상을 그에게 주었다. 이 상은 6회까지 시상하고 마무리됐다.

<충북문화사>는 언론인 출신인 홍원길 씨가 설립한 출판사로 1956년 신동문의 시집을 출간한 곳이다. 홍원길 씨는 두 번에 걸쳐 민선 청주시장을 지냈으며 신동문의 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1956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선기’ 6~20호가 당선되면서 신동문은 시단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다. 1957년에는 충북예총의 전신인 충북문화인연합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충청북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신동문은 청주의 문학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었다. 1956년 청주시내 고등학생들의 문학동아리 ‘푸른문 문학동호회’가 만들어지자 그는 직접 문예창작 지도를 했다. 이 동호회는 훗날 여러 명의 문인들을 배출했다. 김문수(소설가), 홍기삼(평론가), 조상기(시인), 윤혁민(방송작가), 임찬순(희곡작가), 박영수(수필가) 등이 도립병원을 드나들며 지도를 받았던 초기 회원들이다.

도립병원에는 많은 문학지망생들이 드나들었는데, 훗날 신동문의 부인이 되는 남기정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남기정은 신동문의 열렬한 문학팬으로 당시 청주여고 2학년이었다.

푸른문 창립 10주년 기념 문학의 밤 기념 단체사진 (1966년 청주YMCA회관) - 앉은 열 왼쪽에서 세 번 째가 신동문 시인
푸른문 창립 10주년 기념 문학의 밤 기념 단체사진 (1966년 청주YMCA회관) - 앉은 열 왼쪽에서 세 번 째가 신동문 시인

필명을 ‘동문’으로 지은 이유

그는 글을 쓰면서 본명인 ‘신건호’ 대신 ‘신동문’이라는 필명을 썼는데, 이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가 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 가운데 사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죽은 후 동쪽 문으로 나갔다. 그는 매일같이 시신이 동쪽 문으로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병실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면서 죽음에 관한 상념에 빠져 들곤 했다.

죽음은 무엇인가. 죽으면 가는 곳은 어디인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지켜보면서 그때 지은 이름이 ‘동문(東門)’이었다. 동문은 ‘동쪽으로 난 문’이라는 뜻이다.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문, 그의 필명은 바로 시구문(屍口門)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가 오늘날에도 한국 현대시 전반에 대해 도전적인 성찰을 안겨주는 것은 전후(戰後)의 혼돈스러운 ‘1950년대’를 온몸으로 부딪쳐 살면서, 어쩌면 자신이 ‘시구문’으로 간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동문은 이론이나 관념대신, 돈이나 명예나 권력은 더더욱 아닌, 현실에 정직한 뿌리를 내리는 삶과 문학을 원했다. 그에 따라 생의 존엄을 위해 진보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진보를 위해 최선을 다 한 시인이었다. 비록 건강이 좋지 않아 병실에 머물었지만, 그의 시에 박수를 보내주는 고향의 문학 팬들과 후배들을 만나던 5년 여 동안의 도립병원 시절은 그의 생애에서 행복했던 추억으로 기억된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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