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애 숙명여대 객원교수
[동양일보]인류 문명은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발전해 왔다. 지혜로운 인간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고, 그 기록은 삶의 단서가 되고 나아갈 방향의 지표가 됐다. 공동체의 기록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이며, 후손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기고 전승할 것인가를 결정한 결과물이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기억을 남기고, 또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선진 국가들은 ‘국가적 기억(National Memory)’을 선별하여 축적하는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과 가치를 남기고 공유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 공동체가 겪는 위험은 생각보다 크다. 왜곡된 기억은 왜곡된 의사결정을 유발하고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을 훼손시키며, 불필요한 갈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류가 어떤 기억을 남기고, 공유하는가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억제하고,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일은 결국 시행착오의 경험을 함께 공유할 때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는 인간이 지배하고 쟁취하려는 욕망과 동시에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고결한 정신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갈등하는 과정이 그대로 담긴다. 문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은 남기고 불리한 기억은 삭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기록을 남기는가는 어떤 가치를 남기는가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유네스코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기록(Memory of World)을 보전하는 국제협력사업을 1992년부터 30년 넘게 추진해 오고 있다. 2년마다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을 선정하여 현재 총 496점의 기록유산으로 등재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중에 우리나라는 훈민정음, 직지심체요절, 새마을운동과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등 총 18건이 등재돼 있다. 오는 11월 1일, 청주시에 국제기록유산센터가 신축되어 다양한 학술회의 및 전시회와 함께 개관식을 한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대중에게는 다소 난해할 수 있는 기록유산의 스토리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국제기록유산센터 개관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기록유산에 대한 인식과 관점을 새롭게 가져야 할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디지털이라고 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기록은 쉽게 변조되고, 쉽게 삭제된다. 사람의 육안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디지털 기록의 취약한 구조는 ‘탈 진실의 시대’를 열어 줬다. 이제 우리는 IT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의지하여 바야흐로 AI가 열어 줄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인류의 온전하 경험과 진실의 기억을 영구적으로 남기고 보존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번에 개관하는 국제기록유산센터의 사명과 역할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그동안의 노력도 지속돼야 하지만, 더 나아가 디지털 시대에 쉽게 사라지는 기록을 어떻게 남기는가에 대한 논의와 연구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또한 앞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할 기록유산에 우리의 어떤 스토리를 담을 것인지 보다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을 통해 우리의 후손들과 세계 사람들이 삶의 단서를 찾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과 헌신을 해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