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시인 신동문… 생애와 예술(1927. 7. 20. ~ 1993. 9. 30.)

작고 1년후 동양일보가 단양읍에 세운 신동문 시비.
작고 1년후 동양일보가 단양읍에 세운 신동문 시비.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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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4.19로 서울 이주 출판인의 삶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면서 시대상황이 급변했다. 4월초부터 전국적으로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르더니, 급기야 대학생들과 시민들도 가세했다.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신동문은 청주에서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 그는 경부선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쳤다.

신동문이 서울에 와서 본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서울 중심부인 종로와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다. 그는 경무대로 돌진하는 현장에 뛰어 들어갔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총질에 쓰러졌고, 피를 흘리면서 외치는 절규를 똑똑히 들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들’은 바로 그 현장의 아우성을 노래한 격정의 시였다. 그는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시를 썼다.



“......아! 다비데여 다비데들이여/ 승리하는 다비데여/ 싸우는 다비데여/ 쓰러진 다비데여/ 누가 우는가/ 너희들을 너희들을/ 누가 우는가/ 눈물아닌 핏방울로/ 누가 우는가/ 역사가 우는가/ 신(神)이 우는가/ 우리도/ 아! 신화같이/ 우리도/ 운다”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들’ 중 일부



신동문은 4.19 이후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첫 직장으로 잡지사 <새벽>의 편집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일을 벌인다. 전쟁과 좌우 이념대립이 남긴 후유증을 정면으로 다룬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직권으로 세상에 내보낸 것이다. 최인훈은 당시 무명의 신인으로 200자 원고지 600여장이 되는 소설을 가지고 왔는데, 신동문은 이 글이 분단시대의 새로운 지평을 열 만한 작품이라는 직감으로 게재계획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가 11월호에 한꺼번에 원고를 실어버린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광장’은 큰 파문을 일으키면서 최인훈을 스타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새벽>은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신동문은 출판에 대해 놀라운 감각을 갖고 있었다. ‘광장’ 사건 외에 놀라운 일의 또 한가지는 부산 국제신보의 주필을 지낸 이병주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키운 것이다. 신동문은 이병주가 필화사건으로 더 이상 논설을 쓸 수 없게 되자 소설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가 탈고한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지에 게재해 이병주를 소설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새벽>이 폐간을 하자 신동문은 신구문화사로 직장을 옮긴다. 마침 한국 출판계는 혁신을 요구하던 시기였다. 신동문은 그런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세계전후문학전집>을 기획했다. 이 책은 전집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을 원하던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향 문의에 세운 시비.
고향 문의에 세운 시비.

‘창비’의 발행인과 세차례 필화

문학전집 완간 직후인 1963년 1월, 신동문은 <경향신문> 특집부장 겸 기획위원으로 특채되었으나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이듬해 퇴사를 하고 신구문화사 주간으로 돌아갔다. 신구문화사와 신동문은 한 몸이었다. 그는 신들린 듯 <현대한국문학전집> <현대세계문학전집> <세계의 인간상> <한국의 인간상> 등의 전집을 펴냈다. 신동문의 기획에 의해 출판된 이 책들은 국내에서 전례가 없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신구문화사는 전집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그 사이 그는 늦결혼을 한다. 그를 괴롭히던 폐결핵이 완치된 후인 36세의 나이에 자신보다 열세 살이 어린 남기정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어린 신부를 맞기 위해 남기정의 아버지에게 원고지 50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 승낙을 얻었다.

출판계에서 신동문은 ‘미다스의 손’이었다. 충북 보은출신의 박맹호 씨가 <민음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자 신동문은 이곳에서 직접 번역한 <요가>책을 냈는데, 이것이 대박이었다. 출간 1년여 만에 2만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명가는 점점 높아졌다.

1969년 그가 마흔두 살이 되던 해 가을, 신동문은 백낙청이 창간한 계간지 <창작과비평>(창비)의 발행인을 맡게 된다. 당시 <창작과비평>은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신동문은 신구문화사의 사무실을 임대해 재정난을 줄이면서 현실참여적인 성향을 보이는 신진 문인들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는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창비의 발행인을 맡았는데, 그동안 두 번의 필화를 겪는다. 경향신문시절까지 치면 그는 일생동안 세 차례의 필화를 당했다.

첫 필화는 경향신문 특집부장으로 재직하던 시기, “남한에는 쌀이 모자라 쌀값이 폭등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데, 쌀이 남아도는 북한에서 쌀을 들여오면 어떻겠느냐”는 독자의 건의를 기사화한 것 때문이었다. 독자가 가공의 인물이고, 북한의 선전에 놀아났다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판단이었다. 7명의 특집부 기자들은 조사를 받고 구속이 되었다. 경향신문은 잘못을 시인하는 사고를 싣고, 그는 “다시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고 풀려났다. 그 일로 신동문은 경향신문을 떠났다.

두 번째 필화는 1975년 여름 언론인 리영희의 논문 ‘베트남의 전쟁Ⅲ: 35년 전쟁이 총평가’라는 논문을 잡지 <창작과비평>에 실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사흘간 모진 고초를 겪었다.

세 번째 필화는 출판사 창작과비평사가 그해 6월 <신동엽전집>을 유고집으로 냈는데, 거기 실린 시 ‘진달래 산천’이 북한을 찬양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조사받은 지 세 시간 만에 풀려났지만, 시집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판매금지를 당했다. 그리고 그해 그는 <창작과비평> 가을호(통권37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인에서 물러났다.
 

단양 수양개 농장의 집
단양 수양개 농장의 집

단양으로 귀촌한 ‘신바이처’

서울 생활을 정리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975년 9월 신동문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홀로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 마을 부근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생을 마칠 때까지 문단이나 출판 언론계로 돌아가지 않고 농부로 살았다.

신동문이 농촌에서 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단양에 땅을 마련한 것은 결혼하기 전 해인 1962년으로, 아직 필화 등을 사건을 겪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35세에 단양 수양개 마을 뒤편의 임야 12만9000여㎡(약 4만평)을 매입했다. 그리고 시와 산문 들을 통해 가끔씩 농촌생활과 노동에 대한 꿈을 내비치곤 하였다. 1967년 12월 <현대문학>에 발표한 그의 마지막 시 ‘내 노동으로’를 보면 그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고, 노동을 하고 싶어하는 의지가 절절히 느껴진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중략)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중략)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에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이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중략)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한 것이 언제인데.”


신동문의 귀촌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한 결심’을 실천에 옮긴 일이었다. 그는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양잠을 치고 과수원을 꾸리면서 마을공동체의 경제적 자립을 꿈꾸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데도 그의 ‘본업’은 농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는 그곳에 침술원을 열고 ‘침쟁이’로서 살았다. 그가 침술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자신의 허약한 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직접 침을 놔 가면서 오로지 독학으로 침술을 익혔다. 중국의 마오쩌둥이 대장정 당시에 여러 병사들의 병을 낫게 한 경험을 되살려 펴냈다는 침술서적도 어렵게 구해 읽었다.

그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료로 침을 놔주었다. 침을 놔주되 사례비 대신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의 집 문 앞에는 ‘침방, 노래방’이란 간판을 붙여 놓았다. 그는 매일 침술일지를 썼다. 일종의 진료기록부였다. 환자들은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하루에 100명 정도씩 다녀가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아예 집에 돌아가지 않는 환자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바이처’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드는 바람에 수차례 경찰조사도 받았다.

단양의 궁벽진 농장에서 시를 버리고 침을 선택한 그는 죽음이 임박하자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시구문인 동문(東門)으로 들어갔다.



1927. 7.20. 영산 신씨 집성촌인 충북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에서 출생, 2남3녀중 차남이며 본명은 건호(建浩)

1929. 아버지 신재한 별세

1932. 어머니 김대련과 청주시 석교동 52번지로 이사

1935. 청주시 영정공립학교(현 주성초)입학, 병약하여 결석이 잦음.

1942. 영정공립학교(중등과정) 입학. 결핵으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

1946. 영정공립학교 졸업, 서울대 문리대 합격.

가난과 결핵으로 2학기 등록을 하지 않고 중퇴.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에 수영 특기생으로 입학.

1947. 런던올림픽 후보선수로 선발됨. 훈련중 늑막염 발병으로 올림픽참가 포기.

1951. 국민방위군에 입대했다가 탈출, 공군에 자원입대해 제주비행장에서 근무.

군복무 증 장편연작시 ‘풍선기’를 씀

1952. 경남 사천비행장으로 이동. 결핵으로 마산 공군요양소에서 투병생활.

1954. 군대제대, 청주 도립병원에 입원.

1955. 한국일보에 ‘봄 강물’로 가작 입선. 동아일보에 연작시 '풍선기'중 1편이 가작 입상.

제1회 충북문학상 수상(28세)

1956. 연작시 ‘풍선기’(6~20호)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첫 시집 <풍선과 제3포복>(충북문화사) 출간.

1957. 충북문화인총연합회(현 예총)창립위원. ‘수정화병에 꽂힌 현대시’발표

1959. 충북도문화상(예술부문)수상

1960. 서울로 도피. 시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사상 6) 발표.

월간종합지 <새벽> 편집장. <새벽>에 민병산 에세이, 최인훈의 중편 ‘광장’ 전재.

1962. <사상계>의 편집장, <창작과 비평>의 발행인

단양 적성면 애곡리 임야 매입

1963. 경향신문사 특집부장 겸 기획위원. 남기정과 결혼(12.2).

1964. ‘북한에서 쌀을 수입하자’는 독자투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 사흘만에 적부심으로 석방. 이 사건으로 경향신문사 퇴사.

1965. 도서출판 <신구문화사>의 편집, 기획위원 및 주간.

1967. ‘내 노동으로’(현대문학 12)

1969. <창작과 비평>대표. <창작과 비평>에 리영희 교수의 ‘베트남 전쟁의 비평적 논설’게재로 남산정보부 연행. 그후 ‘바둑과 홍경래’를 끝으로 절필.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서 농장경영. 독학으로 익힌 침술로 하루30여명에게 인술 펼침. 단양의 '신바이처' 별명얻음.

1975. 신동엽 시집 출판으로 <창작과 비평>사 필화 사건, 한 달 만에 다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음. 창작과 비평사 퇴사. 수양개로 이주.

1993. 담도암으로 운명. 서약에 따라 장기기증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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