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윤형근의 생애와 예술 (1928.4.12.~2007. 12.28.)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방탄소년단 RM도 영감받은 그림


“평생 진리에 살다 가야한다 이거야. 플라톤의 인문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인데... 진선미, 진실하다는 ‘진(眞)’자 하고, 착할 ‘선(善)’자하고, 아름다울 ‘미(美)’하고인데, 내 생각에는 진 하나만 가지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아.”

1960년대. ‘무제’ 캔버스에유화
1960년대. ‘무제’ 캔버스에유화

 

방탄소년단(BTS) 리더 RM(본명 김남준)의 첫 솔로 앨범 ‘인디고(Indigo)’는 윤형근(1928.4.12.~2007. 12.28.)의 육성으로 시작한다. RM이 곡 ‘윤(Yun)’을 만들면서 윤형근의 육성을 곡의 시작과 끝에 넣은 것이다. 앨범커버는 윤형근의 작품 ‘청색’ 앞에 RM이 앉아있는 사진이다. 윤형근의 무엇이 20대 K팝 아이돌에게도 특별한 영감을 주는 것일까.


윤형근의 그림은 단순하고 간결하다. 색채를 ‘청다색’ 혹은 ‘엄버-블루(Umber-Blue)’로 불리는 한두 가지로 절제하고 마치 붓글씨를 쓰듯 서예적인 획을 그어 정신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모노크롬-단색화로 불린다. 그의 그림에는 감각적 쾌감이나 재미가 없다. 어려운 그림이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슬픔과 고독이 느껴진다. 아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먼저 말문이 ‘탁’ 막힌다. 그리고 무거운 침묵 속에 삶의 성찰과 자연의 순리가 전해진다.

1970년대 ‘드로잉’종이에 유채, 35.5x25㎝
1970년대 ‘드로잉’종이에 유채, 35.5x25㎝

 

이런 느낌때문일까. 절제된 미학을 추구한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작가 도널드 저드(1928~1994)는 오로지 작품만 보고 윤형근에게 반해 함께 전시하자고 청했다. 둘이 만난 뒤 저드가 “미술이 뭘까?”라고 묻자 윤형근은 “심심한 거요”라고 대답했다. 윤형근은 “심심하다”는 그 한마디를 저드에게 이해시키고자 제사음식의 ‘심심한 맛’부터 목가구의 간결한 미학 등 오감을 총동원해 통역하는 데만 몇 십분 걸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저드는 미 뉴욕과 텍사스주 마파의 자신이 소유한 공간에서 윤형근의 개인전을 열어줬다.


윤형근의 단색화는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첫 전시에 참여하며 국제적인 입지를 세웠고 우리나라에 ‘단색화’ 열풍을 이끌었다. 오프닝 날 800여 명 세계 미술계 인사가 몰렸고, 전시 한 달 만에 160여 명 외신기자가 다녀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처음부터 색이 없지는 않았다. 1966년 서울 신문회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당시엔 ‘섬 풍경’ ‘호수’ ‘매화와 달’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적 회화에 푸른색, 보라색, 연두색 등 고운 색감이 선보였다. 윤형근은 40대 중반부터 색이 사라진 ‘엄버-블루’ 작업을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1973년부터 내 그림이 확 달라진 것은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였지. 그 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지.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지.” -윤형근의 일기

1977. Umber-Blue
1977. Umber-Blue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윤형근은 1950년 6·25전쟁 초기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총살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탈출했고, 1956년에는 전쟁 중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등 정치적인 이유로 4번이나 곤욕을 치렀다. 마지막 사건이 그의 작품세계를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숙명여고 미술교사이던 1973년 한 학생의 부정입학 사실을 항의했다가 황당하게 반공법으로 투옥됐다. 그 학생이 중앙정보부장 자금을 대는 재벌집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은 초기에 보였던 다양한 색채가 사라지고 청색과 암갈색이 섞인 어둡고 무거운 검은색으로 변했다.

​미국 작가 도널드 로드와 함께​장인 김환기 화백의 출국을 기념하며 윤형근 작가(오른쪽에서 2번째)​1977. Umber-Blue​1970년대 ‘드로잉’종이에 유채, 35.5x25㎝​1960년대. ‘무제’ 캔버스에유화       윤형근
​미국 작가 도널드 로드와 함께​장인 김환기 화백의 출국을 기념하며 윤형근 작가(오른쪽에서 2번째)​1977. Umber-Blue​1970년대 ‘드로잉’종이에 유채, 35.5x25㎝​1960년대. ‘무제’ 캔버스에유화       윤형근

청주상고 미술부거쳐 1회 서울대미대 합격


윤형근은 1928년 4월 12일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어암리(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에서 6남 2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윤태현(尹台鉉)은 경성의전 출신으로 성리학의 대가인 호산 박문호의 제자이자 손자사위였다. 아버지 윤용한(尹瑢漢)은 경성고보 출신의 지식인이자 해강 김규진으로부터 한국화를 배운 문인화가였다. 집안에서 서예와 한국화를 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윤형근의 아버지는 독자였다. 그래서 아들을 많이 낳아야 한다는 집안의 종용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元)근, 형(亨)근, 천(天)근, 도(道)근, 인(仁)근, 의(義)근’ 등으로 미리 손자들의 이름을 지어 놓았다. 주역의 ‘원형’과 ‘천도’, 공자의 ‘인의’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실제로 6형제가 태어나서 이 이름을 받았다.


적송으로 지은 한옥에서 17명의 대가족과 함께 정신적으로 충만한 유년시절을 보낸 윤형근은 미원 제2공립심상소학교를 거쳐 청주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한다. 당시 청주상고에는 동경유학을 하고 온 미술교사 안승각 선생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인 그는 미술부로 뽑혔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안승각 선생은 청주사범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그해 3월 청주상고를 졸업한 윤형근은 청주사범학교 6개월 과정의 단기 강습과를 다시 들어가면서 안승각 선생과 인연을 이어간다. 윤형근의 자질을 일찌감치 알아본 안승각 선생은 일본유학을 권유하지만, 유교적 분위기가 강한 가문에서 그림 유학은 부모의 반대로 좌절된다. 같은 해 9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원금융조합에 서기로 입사하지만 금융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시골생활의 염증과 미술에 대한 열망으로 사표를 내고, 아버지와 형이 그의 장래를 이야기하는 사이 집을 나와 서울에 살고 있는 누나 집으로 갔다. 아버지에게 처음 든 반기였다. 

장인 김환기 화백의 출국을 기념하며 윤형근 작가(오른쪽에서 2번째)
장인 김환기 화백의 출국을 기념하며 윤형근 작가(오른쪽에서 2번째)

 

1947년 그는 1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입학시험에 합격을 한다. 청주사범학교를 나온 정창섭(서울대 명예교수. 1927~2011)을 비롯해 안승각 선생에게 배운 11명이 동시에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해 화제가 되었다.


윤형근은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날을 잊지 못한다. 입시 날, 그는 평소와 달리 늦잠을 잤다. 게다가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 시험장에 도착하니 옷깃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러고 어찌 시험을 보겠나?”고 따뜻하게 물어주었던 시험감독이 바로 훗날 장인이 된 수화 김환기(1913~1974)였다. 그는 자신있게 “괜찮다”며 실기시험을 본 후 당당히 합격했다. 

‘국대안’으로 제적, 전쟁후 학살위기


합격은 했지만, 학교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군정이 주도하는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윤형근은 동맹휴학에 가담했다가 1949년 제적을 당한다.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한 교수들도 직을 잃었다. 교수 사직서를 내고 길진섭(1907~?)은 북으로, 김용준(1904~1967) 동국대로, 김환기는 낭인이 되었다가 홍익대로 옮긴다.

미국 작가 도널드 로드와 함께
미국 작가 도널드 로드와 함께

 

윤형근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남았다가 ‘보도연맹’에 이끌려 부역을 하고 이 사건으로 연행되었으나 탈출하여 학살을 면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대에 복학하려 했지만 허용되지 않았다. 전쟁을 거치면서 가세도 기울었다. 전쟁 중 큰 형이 행방불명이 되면서 그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었다. 다행히 수입이 괜찮아서 동생들의 학비도 벌고 부모님에게 소와 땅을 사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김환기는 윤형근이 홍익대로 편입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홍익대에 들어가자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도 같은 과 학생이라서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순탄치는 않았다. 전쟁 때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죄로 1956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생활도 했다. 그 일로 1957년 간신히 홍익대를 졸업했다. 그는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청주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냈지만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정부 발언으로 부당한 발령을 받고 사직한 뒤 서울로 올라와 1960년 김영숙과 결혼했다. 신접살림을 꾸린 후 다음 해부터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 당대 최고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원으로 부정입학한 재벌가 딸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고 해직되었다. 반공법의 명목이 즐겨 쓰는 ‘베레모’가 레닌의 것과 닮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윤형근은 뉴욕에서 보내온 사진 속의 김환기가 쓴 모자가 좋아 보여서 안 입는 청바지를 뜯어 프랑스 농부의 모자처럼 만들어 썼었다. 모자가 마음에 들어 외아들(윤성렬)에게도 똑같이 만들어 씌운 그 모자가 ‘반공법 위반’이라는 억지죄가 된 것이다. 이 일은 ‘Y교사의 억울한 사건’으로 동아일보 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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