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화가 윤형근… 생애와 예술(1928. 4. 12. ~ 2007. 12. 28.)

김환기 타계후, 윤형근이 자신의 신촌 아뜰리에에서 김환기 작품과 자신의 작품 사이에서 찍은 사진.
김환기 타계후, 윤형근이 자신의 신촌 아뜰리에에서 김환기 작품과 자신의 작품 사이에서 찍은 사진.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동양일보]장인 김환기 영향받아...청출어람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고 숙명여고까지 그만둔 후 그는 요시찰의 대상으로 10년간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인생의 중심에 있던 스승이자 아버지인 장인 김환기마저 떠나보냈다. 그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윤형근은 오로지 작품에만 매달렸다. 김환기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인만의 예술 세계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는 현실 세계로 눈을 돌렸다.

절친한 친구였던 조각가 최종태는 매일 술을 마시며 윤형근이 울분을 토로했던 것을 이렇게 기억한다.

“맨날 같이 만나면서도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습니다. 맨날 같이 그 얘기가 그 얘기였지만 헤어지려면 아직 할 얘기가 안 끝난 것 같았습니다”, “윤선생은 평소에도 ‘가차없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가차없이 단칼에 자른다는 뜻입니다. 양지에서 노는 놈들, 이권에 타협하고 권력에 기대는 놈들! 하고 화가 날라치면 내가 한참 말대꾸를 하지 못했습니다. 큰 나무 둥치가 반쯤 썩은 채로 쓰러져 있는 것에서 감동을 느꼈다든지, 화가 났을 때는 한층 그림이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것 같다라든지, 돈이 많지 않으면서 멋있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다 한 말이라든지, 늘 하는 그런 이야기가 모두 혹독한 삶의 체험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윤형근을 추억하며, 최종태

생전에 윤형근은 장인의 그림에 대해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닌다”고 말한 적 있었다. 김환기의 점들이 하늘을 닮은 특유의 푸른 색조와 이상적인 것이 천상의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반면 윤형근의 그림은 흙에 발을 딛고 솟아오른 검은 빛이었다. 넓적한 붓에 물감을 ‘쿡 찍어서, 묵직하게 ‘푹’ 내려긋는 작품들.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빨아들이는 엄숙하고 평온한 그림. 그래서 그는 자기 그림에 대해 “잔소릴 싹 뺀 외마디 소리”이라고 일기에 썼다. 윤형근은 그렇게 청출어람을 이뤘다.

1980, ‘다색 Burnt Umber’, 마포에유채.
1980, ‘다색 Burnt Umber’, 마포에유채.

 

광주민주화운동후 ‘다색’ 제작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신군부 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집회와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4.19 세대인 윤형근은 광주의 소식을 듣고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예술은 똥이여, 사람들이 픽픽 죽어가는데 예술이 다 뭐 말라 죽은 거여.”

그는 마당에 나가 커다란 천 위에 비스듬히 쓰러지는 검은 기둥을 죽죽 내리 그었다. 덜 마른 물감이 검은 눈물처럼 핏물처럼 흘러내렸다. 작품 ‘다색(Brunt Umber)’ (1980)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의 모든 그림들에서 늘 단단하게 곧추섰던 기둥들이 이 그림에선 뽑힐 듯이 비스듬하게 그려졌다. 그는 이 그림에 대해 “땅 위에 똑 바로 서 있으려 해도 그러한 힘이 남아 있지 않은, 피 흘리며 기대어 쓰러지는 인간 군상”들이라고 표현했다. 윤형근은 그림에 ‘1980.5’ 라고 날짜를 기록했다. 그가 그림에 제작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이 그림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격동에 열린 그의 회고전에서 처음으로 두 점을 선보였다.

윤형근 인물사진.
윤형근 인물사진.

 

그해 12월, 윤형근은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던 ‘물방울의 작가’ 김창열이 아파트를 얻어 주었다. 윤형근은 2년간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프랑스 아카데미그랑쇼미에르’를 수료하고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평생 작업을 할 공간을 새로 지었다. 건축가인 동생 윤도근(작고. 홍익대 명예교수)의 도움으로 67년부터 살아온 서교동의 낡은 국민주택을 헐고 2층 양옥으로 신축했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살림집이었다.

윤형근은 새집이 마음에 들었다. 길고 좁은 정원에 화초를 심고 고무호스로 물을 주었다. 돌확에 물을 담아놓으면 아침마다 참새들이 몰려들어 날개를 파닥이며 목욕을 했다. 윤형근은 깃털을 흘리고 똥을 싸놓고는 후다닥 날아가 버리는 참새들을 기다리며 매일 아침 새 물을 갈아주는 일을 즐겼다. 그리고 종생 때까지 이 집을 떠나지 않았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 대부분 이 작업실에서 나왔다.
 

1989, 암갈색 리넨위에유화.
1989, 암갈색 리넨위에유화.

 

고목썩어 흙이 되는 과정 깊은 영감

파리를 다녀온 후 윤형근은 물오른 듯 작업을 했다. 한국현대미술의위상전(1982.3. 교토시미술관), 한국현대미술전(1983.6), 도쿄도립미술관(7.17~8.14), 토치기현립미술관(8.20-9.25) 오사카국립국제미술관(10.29~11.20, 홋카이도근대미술관(12.8~12.7, 후쿠오카시립미술관) 등 국내외에서 열리는 큰 규모의 전시에 초대되며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화가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의 그림에는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혼란스러운 70, 80년대를 지나며 현대사의 고민이 그대로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윤형근이 얼마나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 윤형근의 조수로 일을 도왔던 화가 김영헌(1964~ )이 증언한다. 당시 홍대 학생으로 1990년부터 1996년까지 1층의 작업실에서 윤형근을 도왔다는 김영헌은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작업실에 가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캔버스를 짰다고 말한다. 캔버스 천은 고급 프랑스제 마지(麻地)로 롤 하나에 대형 캔버스 몇 개가 나오지 않았는데, 하루에 100호 크기의 캔버스를 8개에서 10개 정도 짰다고 했다.

“3일정도 연속으로 작업하면 20개에서 30개 정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가보면 캔버스는 거의 그림으로 완성돼 다른 방으로 옮겨져 있는거예요. 어쩌다 아직 덜 마른 그림이 바닥에 하나 누워있을 정도였지요. 그리고 작업실은 언제나 새 작업실처럼 깨끗하게 정리정돈 돼있었어요.”

90년대 이후 윤형근의 작품은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면은 더욱 단순해지고 색채는 검은색의 변주가 아닌 ‘순수한 검정’에 가까워졌다. 그의 일기도 점점 자연에 대한 느낌의 기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연은 순리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만은 그 순리를 역행하며 살아간다. 초목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을 나는 목격한다.” -윤형근기록(1990)

“목면, 사베, 흙, 나무, 한지. 이것들은 영원히 아름다운 것이다. 현대문명이 어찌 이것들을 뛰어넘을 만한 것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나는 흙과 나무, 돌을 적당히 써서 집을 지어 보고싶다. 우리 한옥의 좋은 것들을 모두 살려서 허름한 집 한 채 지어보고 싶다...벽은 흙벽에다 내 그림을 걸고, 박수근 선생의 목판을 걸고, 누르튀튀한 한지 창으로 은은한 빛을 받아 실내 광선은 한결 은은하겠지.”(1990.7.19.)

“나는 사계 중에서 언제부터인지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다, 겨울은 엄격해서 좋고, 잎이 떨어져서, 공간이 시원해서도 좋다. 그래서 내 그림은 겨울인지도 모른다.”(1990.7.19.)

윤형근은 음악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각가 최종태는 추사의 글씨가 걸려있는 윤형근의 집 안방에는 좋은 스테레오가 있어서 술을 마실 때도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베토벤이나 차이콥스키 음악이 흘렀고 특히 차이콥스키를 좋아했다고 기억했다. 제자 김영헌도 윤형근에게 파블로 카살스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이야기하자, 윤형근은 동년배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의 연주를 좋아한다며 이미 카살스를 잘 알고 있는 듯 한데도 처음 듣는 것처럼 경청을 해줬다고 말했다.

1985, 암갈색ㅡ블루 리넨위에유화.
1985, 암갈색ㅡ블루 리넨위에유화.

 

남에게 자기의 주장을 말하기보다 귀 기울여 음악을 듣듯,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윤형근은 정이 많았다. 김환기와 김향안에 대한 존경과 사랑, 제자들에 대한 애정은 물론 아내 김영숙과 외아들 성렬에게도 남다른 사랑을 주었다. 아버지를 이어 화가의 길을 걷는 아들 윤성열(렬)은 “어릴 적부터 유난히도 아버지와는 가까웠다”며 “밖에서 친구들과 놀고도 집에 오면 아버지라고 하는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늘 작업실에 계셨지만, 작업보다, 제가, 가족이 우선이었죠”라고 아들이 기억해주는 최고의 아버지. 그가 윤형근이었다.

1973, 청다색.
1973, 청다색.

 

오대산에서 우연히 고목이 썩어 흙이 되는 과정을 보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깊은 영감을 받았다는 윤형근은 우정을 나눴던 지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자 쓸쓸해 하며,

“다들 죽었다. 이일도 죽고, 한창기도 죽고, 조셉 러브도 죽고, 황현욱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있고나.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다 죽었구나” (2004.5.8.)

라고 글을 남겼다. 그리고 그도 2007년 12월28일 눈을 감았다.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의 불꽃같은 그림을 남겨두고.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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