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서예가 이상복… 생애와 예술(1929. 4. 26. ~ 1995. 12. 13.)

국전 첫입선작(1957, 행서).
국전 첫입선작(1957, 행서).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동양일보]자녀들에 엄격, 제자들에겐 한없이 따뜻

이상복은 평생 붓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 글씨는 생활이자 도(道)를 이루는 과정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도(道)와 (德)을 강조했다. 장녀 이희숙(전 고교교사)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몇 가지는 지금도 특별하다.

“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는 분이셨어요. 다감하거나 따뜻하게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대신 참 바르셨던 분이었어요. 집안엔 늘 손님들이 드나드셨는데, 그럴 때면 우리 다섯 남매를 불러서 절을 하도록 시키셨어요. 어릴 땐 그게 싫었어요. 그리고 웬만해선 야단치는 일이 없으셨는데, 책 정리를 안하거나 글씨 쓴 종이를 함부로 버리면 그땐 혼이 났어요. 글씨에 그 사람의 혼(정신)이 배어있다는 거죠.”

청풍문화재단지편액.
청풍문화재단지편액.

 

“아버지가 집에서 글씨를 쓰실 땐 우리에게 먹을 갈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좋은 먹일수록 잘 안갈리거든요. 아버지는 먹을 가는 과정은 마음을 비우는 과정이라고 하셨는데, 두 시간씩 먹을 갈려면 힘들었어요.”

이상복은 개인 서실이 없었다. 대신 집에서나 근무하는 학교에서 글씨를 썼다. 그가 살던 청주시 모충동의 단독주택은 거실에 화선지 전지를 펴면 꽉 차던 작은 집이었다. 그 집에서 7명의 가족이 살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제자를 비롯해 서예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늘 집이 복잡했다.

1983년 청주 삼화이비인후과(청주대 앞) 원장이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30평 정도 되는 사무실을 그에게 서실로 주겠다고 했다. 그는 제자 백승면을 불러 “나는 서실이 필요 없는데, 자네가 제자들을 가르쳐 보겠는가”하고 넘겨줘서 백승면은 그해 12월 그곳에서 ‘충북서예학원“을 개원했다. 자녀들에겐 엄격했지만, 제자들에겐 한없이 따뜻한 스승이었다.

 

청정자비(소장자 김재규).
청정자비(소장자 김재규).

 

계속되는 입선에 ‘국전작가’ 별칭

1957년 이상복은 중등학교 교사가 되어 진천중학교로 부임한다. 그해 그는 6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도전한다. ‘掃石共看山色坐 枕書同聽雨聲眠:돌을 쓸고 함께 앉아 산경치를 보다가 책을 베고 함께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드네’라는 한시(漢詩)를 행서로 써서 입선을 했다. 그가 20대 때의 일이다. 국전 입선은 청주지역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서 지역사회에서 화제가 되며 이상복의 이름이 알려졌다.

9회(1960년)에는 유우석(劉禹錫)의 시를 해서로 써서 입선을 했다. 가로 50cm에 높이 200cm의 큰 작품이었다. 10회(1961년)엔 행서로, 11회(1962년)는 도연명의 시를 해서로, 12회(1963년) 13회(1964년) 역시 해서로 작품을 출품해서 내리 입선을 했다. 14회 한번을 빼곤 15회(1966년) 16회(1967년)대회에서도 입선을 했다. 모두 2m 높이의 대작들이었다. 그의 이름 뒤에서 ‘국전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충북대서도회 졸업사은전에서(1988년).
충북대서도회 졸업사은전에서(1988년).

 

1968년 17회 국전에서는 특선을 했다. 포은 정몽주가 전주 망경대에 올라 지은 시 ‘등 전주망루경대’라는 시를 해서로 썼다. 그는 그해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1982년부터 1991년까지 거의 매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는 현대미술초대전에 작품이 초대되었다. 마침내 그는 최고 권위인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심사위원이 된다. 국전 30년전, 한국서예 100인전, 국제현대서예대전 등 대한민국 최고의 서예전에는 반드시 그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1993년 이상복은 배길기 등 서예가 중진들이 만든 한국서가협회의 충북지회를 창립하고 초대지회장이 되었다. 서가협회는 한국미협이 서예를 미협 내의 한 분과로 넣기로 한 것에 반대해 독립적인 단체로 활동했다.

 

의병장 한봉수송공비(청주중앙공원).
의병장 한봉수송공비(청주중앙공원).

 

평생 글과 일대일 관계 유지

그는 평생 평교사로 지냈다. 명예나 출세는 그와는 관계가 없는 단어였다. 어느 자리에선가 학교 선배인 모 교육감이 “자네도 이제 교감 승진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는가”하고 묻자 이상복은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라며 승진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는 돈을 멀리 해야 참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금마련 행사 같은 경우는 작품을 내어주지만 자신이 돈을 받고 작품을 팔아 본 적은 없다.

“작품을 팔기 시작하면 경제적인 면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시나브로 글씨가 팔아먹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제게 글을 받은 사람이 판매를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저는 글과 일대일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2022년 묵연전을 준비한 제자들이 산소를 찾았다.
2022년 묵연전을 준비한 제자들이 산소를 찾았다.

 

-1995.3.25. 동양일보 인터뷰

그는 학생 제자가 많았다. 대학에서 서예동아리 지도를 했기 때문이다. 조건상 교수의 권유로 1972년 충북대에 서도회가 만들어지자 지도를 시작했다. 오신택 장학진 김재규 등이 충북대 서도회 제자들이다. 간호전문대에서도 서예동아리를 지도했고, 교육대에서도 지도를 했다. 청주시에서 서예를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이상복의 제자였다. 그런데 지도비는 없었다. 모두 무료 교육이었다. 이상복에게 서예를 배운 제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선생님은 ‘교육비’라는 것을 받으신 적이 없다고. 그는 그렇게 늘 무료로 지도를 했다.

제자 김재규는 스승 이상복을 잊지 못한다. 김재규는 1995년 봄 스승이 청주남궁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가 서예 연습한 것을 안가지고 왔다고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다음 날 글씨를 써서 가지고 갔더니 글씨는 놓고 가라며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했다. 그 사이 이상복은 병원에서 외출해 집으로 가서 김재규에게 줄 체본을 써갖고 와서 다음 날 찾아온 김재규에게 준 것이다. 몸이 불편한데도 주례를 서주고 미산(未山)이라는 호를 받은 맹창균도 이상복을 잊지 못한다.

딸 이희숙은 잊히지 않는 일로 이상복의 제자 중 금속활자장 오국진(1944~2008)이 집으로 찾아온 일을 기억한다. 오국진은 이상복에게 글씨를 배웠다. 1996년 오국진은 국가무형문화재 금속활자장이 되자, 무형문화재 증서를 들고 이상복의 집을 찾아왔다. 이미 고인이 된 스승이지만, 제일 먼저 기쁜 일을 알리고 싶었다며 이상복의 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소장자 오신택.
소장자 오신택.

 

말 없지만 ‘대쪽같은 성품’으로 유명

이상복은 말이 없지만 평소 대쪽같은 성품을 지녀 몇 가지 일화들이 전해진다. 그는 입을 다물었지만 주위에서 쉬쉬하면서 전해진 이야기다. 이상복의 이름이 점점 알려지자 그의 글씨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모 행정기관에 있는 고위직의 비서가 찾아와 윗분이 댁에 달 문패를 써달란다고 전하자, 이상복이 “글씨가 부족하니 연습해서 써드리겠습니다”하고 돌려보낸 뒤 써주지 않았다는 일화와, 교육계의 고위직에 있는 분이 병풍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준비가 되면 써드리겠습니다”라며 끝내 써주지 않았다가 청주시에서 단양 어상천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일화다. 확인하기 어렵지만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 이상복은 단양에서 병을 얻어 휴직을 했다.

제자 이영호는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이 음료수 몇병을 사들고 이상복에게 찾아와 “선생님 존함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왔다”며 “조상님 제사에 쓸 병풍을 얻고 싶다”고 하자 “일주일 뒤에 오시지요”하더니 돈도 받지 않고 글씨를 써주는 모습을 보았다.

이상복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이영호는 이상복이 심사를 하러 서울을 가거나 장거리 이동을 할 때 차량봉사로 동행을 할 때면 “송담, 김하고 장아찌하고 고추장 좀 챙겨 와”라고 해서 반찬을 싸들고 다녔다. 이상복은 고기는 물론 비린내 나는 멸치 한 마리도 먹지 않았다.

세상을 뜨기 며칠 전 이상복은 제자 이영호에게 전화를 했다. 먹물 좀 갈아서 현대아파트 큰 딸집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이상복은 이영호가 찾아가자 누워 있다가 일으켜달라고 했다. 부축을 해서 앉혀드리니 거실에 화선지를 펴라고 했다.

이상복은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앉아서 천천히 글씨를 써내려갔다. 초서였다. 마치 신들린듯 움직이는 붓끝이 움직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글씨는 처음 보는 듯 했다. 이상복은 한 줄을 쓰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어쓰기를 반복했다. 이영호는 스승이 글씨를 쓰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그렇게 편안해 보인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상복은 그렇게 마지막 글씨를 썼다. 그리고 사흘 뒤 영면에 들었다.

별세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몰려오자 가족들은 스승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이별할 시간을 주었다. 청주시 문의면 대청댐이 내려다 보이는 묘소까지 제자들이 상여를 멨다. 장학진은 영정을 들고 앞에 섰다. 우송 이상복이 떠난지 30년이 되었는데도 제자들은 아직도 스승이야기만 하면 눈물부터 흘린다. (끝)



이상복 약력



1929.4.29. 청주시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출생

1942. 남일초등학교 졸업

1946. 청주상업학교(5년제) 졸업

1947. 초등교사자격 검정고시 합격. 문의초 교사 부임

1956. 문교부 고등교사자격 검정고시(서예과목) 합격

1957. 진천중학교 부임이후 청주여중, 단양여중, 청주여고, 보은여고, 중앙여고, 진천상고 교사로 정년퇴임

1957.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제6회 입선이후 제9회(1960)~13회(1964), 제15회(1966), 제16회(1967)입선

1962. 청주시문화상 수상

1964. 충청북도문화상 수상

1968. 제17회 국전 특선,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1972. 충북대학교 서도회지도, 청주간호전문대, 청주교대 서예동아리 지도

1982. 1984, 1985, 1987, 1991.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1985. 1987.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1990. 국전30년전, 한국서예 100인전, 국제현대서예대전 등 출품

1992. 대한민국서예대전(한국미협) 심사위원

1993. 한국서가협회충북지회 창립 초대지회장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위원

1994.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운영위원

1994.8. 진천상고에서 정년퇴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1995. 제자들이 ‘사은서예전’ 개최

1995.12.13. 숙환으로 별세. 묘소는 문의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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