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음악인 이상덕… 생애와 예술(1924. 1. 19. ~ 2004. 1. 15.)

관혁악단 지휘모습.
관혁악단 지휘모습.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동양일보]충북 현대음악사에선 항상 ‘최초’

2003년 4월23일 청주예술의전당. 객석엔 관객들이 가득 찼고, 무대 위에선 악단이 연주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충청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창단 공연을 선보이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앰뷸런스 소리가 났다. 수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사람들은 관객 중 환자가 생겼는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곧 지휘자가 무대 위로 나왔고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지휘자는 창단 공연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고 관객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 한 얼굴이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환자복을 입고 객석에 앉아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앉아 지휘봉을 든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휘를 지켜보다가 1부가 끝난 뒤 조용히 빠져나와 둘째 딸(이정희)의 부축을 받아 앰뷸런스를 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충청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이강희(국립한국교통대 교수)와 청주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지휘자였던 이상덕(전 청주교대 교수) 부자의 일화다.

곡을 쓰는 이상덕.
곡을 쓰는 이상덕.

 

당시 이상덕은 요양병원에 입원중인 환자였다. 지휘봉을 잡은 아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병원에 사정을 해 환자복을 입은 채 잠시 공연장으로 외출을 한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이강희가 병원으로 달려가자,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면서 “여기는 어떻고 여기는 좋더라”라고 평을 해주며 만족해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이상덕(李相悳.1924.1.19.~2004.1.15.)은 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생 음악과 함께 살며 충북 음악을 발전시킨 이상덕. 그는 해방이후 불모지인 충북에 음악의 씨앗을 뿌린 ‘음악의 전도사’였다. 충북의 현대음악사에선 항상 그의 이름이 ‘최초’라는 별칭과 함께 따라다닌다. 1940년대 후반 청주사범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하면서 1949년 문교부 주최 전국남녀고등학교 음악발표회에 청주사범관악대를 지도해 참가한 것은 충북에서 대외음악활동의 효시로 기록된다. 1954년 청주에서 문화인동호회연합회가 결성되자 이상덕은 초대 음악위원장으로 참여해 축하음악회를 개최했다. 이어 1957년 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가 발족되자 음악분과 초대 위원장으로 제1회 문총음악회를 개최했고, 1958년 음악위원회가 청주음악인협회로 개편되자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60년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예총)가 출범하면서 한국음악협회가 발족될때도 초대 음협충북지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최초’중 가장 기억해야할 것은 오케스트라단 창단이다. 그는 청주에 변변한 연주자가 없던 시절인 1973년 민간 청주관현악단을 창단했다. 이 악단은 1979년 청주시립교향악단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그는 상임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그 후 청주시립교향악단은 1995년부터 일부 단원들의 임금을 주는 상임화로 바뀌게 된다. 상임화를 앞두고 이상덕은 1988년 고별연주회를 갖고 지휘봉을 넘긴다. 그리고 자신은 명예지휘자로 남는다. 충북에 최초로 교향악단을 탄생시켜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음악을 선사해온 15년. 그는 무보수 지휘자였다.

 

인물사진.
인물사진.

 

청주사범교사로 청주사람이 되다

이상덕은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서 이충우의 2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는 동경유학을 다녀온 신지식인이었다. 아버지 덕에 집안에 일찌감치 레코드판과 축음기 등 신문물이 있었다. 형은 시를 썼고 음악을 좋아했다. 이상덕은 형을 따라 음악듣기를 좋아했는데, 보통학교 4학년 때 들은 한 음악이 뇌리에 꽂혔다. 요한시트라우스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이었다. 멜로디가 귀에 맴돌았다. 그때부터 그냥 음악이 좋아졌다.

이상덕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냈다. 강경보통학교(초등학교) 시절 혼자 악기를 배웠는데 예술제가 열리면 이상덕의 독무대였다. 셋째딸 이대희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전한다.

“교내 예술제가 열리면 20여 가지 종목 중 아버지가 10여 가지를 혼자 하셨대요. ‘이상덕이 하모니카를 연주하겠습니다.’ ‘이상덕이 아코디언을 하겠습니다.’ ‘이상덕이 클라리넷을 하겠습니다.’ ‘이상덕이 바이올린을 하겠습니다.’ 합창, 독창 이런 것 빼놓고는 아버지가 도맡아서 다 하셨대요. 교장이 일본사람이었는데, 놀라서 ‘상덕아, 학교악기 네 마음대로 가져가 연습해라’했대요.”

이상덕 가족사진.
이상덕 가족사진.

 

이상덕은 학교 악기를 빌려가서 저녁마다 벽장으로 올라가 담요를 치고 악기를 불고 다음 날 새벽에 벽장에서 내려왔다. 마침 누나가 미국에서 온 선교사에게 기타와 피아노를 배워서 누나의 영향도 있었다. 가족이 대전으로 이사를 하면서 이상덕은 대전공고(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로 진학한다. 아버지는 대전에서 동아일보 지국장를 했다. 이상덕은 밴드부 활동을 했는데 독학으로 모든 악기를 익혔다. 타고난 음악성으로 곧 눈에 띄었다. 대전공고 교장도 일본인이었는데, 교장이 아버지를 찾아와 이상덕을 동경예대로 보내자며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딴따라’를 만들 수 없다고 거절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대를 가고 싶어서 서울대 음대 원서를 썼지만, 아버지가 원서를 찢어버려서 응시도 하지 못하고 집안사람의 추천으로 신흥대(경희대) 법문학부에 적을 두었다. 일제말기 이상덕은 학도병으로 일본으로 가서 조종사 교육을 받고 해방이 된 뒤 돌아와 잠시 공군부대 군악대로 들어간다. 군악대의 경험은 그에게 합주가 만드는 하모니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고, 그에게 평생 오케스트라의 꿈을 갖게 했다.

군에서 제대한 뒤 음악교사가 되었다. 모교인 대전공고에서 근무를 했다. 그곳서 그는 밴드부를 지도했다. 웬만한 악기를 독학으로 배워서 모두 다줄 줄 알기에 악기를 만져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악기의 특성에 맞춰 기초부터 가르쳤다. 대전공고 밴드부의 활동은 소문이 났다. 그때 청주사범학교의 손흥택 체육교사가 그를 찾아왔다. 청주사범학교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상덕은 청주사범학교 교사가 되면서 청주로 이주했다. 그리고 영원한 청주사람이 되었다.

 

청주관현악단을 창단하고.
청주관현악단을 창단하고.

 

다섯자녀에게 모두 음악 가르쳐

청주는 음악의 불모지였다. 그는 청주사범학교에 밴드부를 만들었다. 청주사범학교 학생으로 밴드부 활동을 한 채완병(성악가. 전 청주교대 교수)은 이렇게 회상한다.

“1학년 어느 날, 학교 별관 교실 쪽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서 이끌려 가보니 학생들이 각종 관악기로 합주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저를 발견한 이상덕 선생님이 ‘너 노래 잘하는 녀석 아니냐, 이리 들어와.’ 그래서 졸지에 밴드부가 됐어요. 악기를 주셨는데 생전 처음 보는 플루트였어요. 집으로 가져와 할아버지 몰래 연습을 했었지요.”

채완병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 성악과로 진학을 했는데 이상덕의 도움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 선생님은 잠두봉 아래쪽 학교 관사에 사셨는데, 퇴근 후 시내에서 일을 보신 후 집으로 가시다가 꼭 음악연습실엘 들르셨어요. 제가 노래연습을 하고 있으면 ‘완병아, 잘 되냐?’하시며 격려해주시고 제가 성악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서울의 교수를 연결해 주셨지요. 그리고 제가 청주교대 교수로 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평생 은인입니다.”

학생음악경연대회 심사.
학생음악경연대회 심사.

 

채완병 외에도 당시 이상덕으로부터 배운 많은 제자들-오건식(피아노), 김윤숙(피아노), 박은규(트럼펫), 이범호(바이올린) 등-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이상덕은 자신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사범학교 교사였지만, 정규 음대 출신이 아니라서 음악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서울대 김성태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피아노 연습을 했다. 이상덕에겐 핸디캡이 있었다. 젊을 때 달리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사고나 나서 오른 손 손가락 하나가 장애를 입은 것이다. 굽은 손가락은 피아노를 치기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이 돌아간 연습실에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밤새워 피아노 연습을 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는 1악장 주제곡과 변주곡이 6개나 나오는 까다로운 곡이다. 그는 이 곡을 자유자재로 치며 마침내 음악교사 자격증을 따냈다.

주부생활 기사.
주부생활 기사.

 

6.25 전쟁이 끝나고 안정이 되자 이상덕은 청주여고를 나온 황갑순과 결혼을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심성과 외모가 곱고 반듯한 여성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이상덕은 모두 음악을 가르쳤다. 그에게 음악은 세상을 구원하는 바로미터이자 잣대였다.

큰딸 선희(1953년생)는 첼로를, 둘째딸 정희(1955년생)는 피아노를, 셋째딸 대희(1957년생)는 바이올린을, 큰아들 강희(1959년생)는 첼로와 지휘를, 막내아들 문희(1962년생)에겐 피아노를 가르쳤다.

1969년 여성잡지 <주부생활>은 ‘내 고장 주부만세’편에 ‘외유내강의 가정주부 황갑순 여사’를 소개하면서 “한 딸이 피아노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면, 두 딸은 각기 첼로와 바이올린의 활을 당겨 스위트 홈의 멜로디가 골목으로까지 번져나간다”고 이 집안의 음악 분위기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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