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시로 중고등 교사들 길러내
1961년 9월 ‘초등교원은 2년제 교육대학에서 양성하도록 한다’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제정되면서 사범학교가 사라지게 됐다. 청주사범학교는 1941년 일제강점기에 생긴 학교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교육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학제상으로는 중등교육기관에 해당되었다. 1962년 3월 청주교육대학이 국립으로 설치되자, 사범학교 교사들의 신분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학교수 임용 자격을 갖춘 이들은 교수가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일반 고등학교로 전출을 해야 했다. 이상덕은 음대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교수가 될 수 없었다. 이때 학교 교사들과 지역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나서서 지역 음악 발전을 위해선 이상덕이 반드시 음악교수가 돼야 한다고 연명을 해 문교부로 보냈다. 그 결과 이상덕은 청주교육대학의 교수로 정식 임용이 되었다.
이상덕은 보은을 하는 길은 충북의 음악발전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63년 충북음협지부장이었던 그는 충북에서 최초로 초·중·고 학생음악경연대회를 만든다. 그 대회는 지금까지 65회를 기록하면서 음악영재들의 등용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지역에 음대가 없던 시절, 사범학교를 졸업한 제자들에게 음악이론과 실기를 지도, ‘중등교사자격검정고시(문교부)’를 통해 홍준표, 윤무웅, 전해달, 조화자, 왕혁수 등 수많은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들을 길러냈다.
이상덕에겐 오랜 꿈이 있었다. 그것은 충북에 관현악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고 또 교사로 학교 밴드부 지도를 하면서 그는 각각의 악기들이 내는 소리가 모아져 만드는 합주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관현악이야말로 음악의 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충북 도내에 퍼져 있는 제자들과 음악 교사들에게 틈만 나면 합주부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딸이 다니는 유치원의 원장에게도 합주부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이상덕의 사범학교 제자였던 시립유치원 원장 이영순은 아기들을 데리고 합주부를 만들어 인기를 모았다. 전해달은 청주교대부속초(교대부설초)에서 합주부를 만들었고, 손원영은 충북여중에서 합주부를 만들고, 오승근은 운호중에서, 이종명은 청주상고에 밴드부를 만들었다. 이근하는 대성중에서, 이진호는 대성여상에서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영동초에도 합주부가 생겼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충북도내 학교 여기저기서 밴드부 또는 합주부 창설의 붐이 일었다. 1980년대에 청주교대를 다니고 청주 대성초 교장을 역임한 이현호(청주음협 수석부지부장)는 “학교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교수님의 지도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클래식곡을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며 “청주대성초등학교에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아이들 지도가 역부족이어서 교수님께 연락드렸더니 즉각 달려와 가르쳐 주셨다”고 회상했다.
충북 최초 민간 관현악단 창단
1972년 이상덕은 예총충북지부장이 되었다. 그는 틈만 나면 관현악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침내 1973년 7월 지역유지와 음악관계자들이 청주문화원 회의실에서 모여 관현악단 창단에 관한 논의를 했다. 이상덕 제안에 동의한 김하경 청주대 사대 음악학과장이 운영위원장을 맡아 산파역할을 했다. 그렇게 해서 충북에서 첫 민간 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 단장은 이상덕, 부단장은 이상두 채완병이 맡았다.
재정은 당시 예총부지부장이었던 김은수 한국도자기사장과 신범식 서울신문사장, 권혜영(피아노전공, 주부)이 약간의 자금을 지원했으나 맨주먹으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상덕은 관현악단을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충북 도내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모두 모았다. 관악기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사들을 불러 모았고, 특수악기는 엑스트라로 충당했다. 현악기 전공자가 부족해서 딸들도 모두 무대에 세웠다. 큰딸 선희(숙명여대 음악과)는 첼로를, 셋째딸 대희(청주대 음악과)는 바이올린을, 피아노를 전공한 둘째딸 정희(청주대 음악과)에겐 급조해서 비올라를 연습토록 했다. 피아노를 치던 제자 전해달에겐 타악기 팀파니를 치도록 하고 대성여상 교사인 이진호에겐 콘트라베이스를 맡겼다. 서울시향 수석 임만규는 명예악장으로 참여해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40여 명의 단원을 모아 4개월간 연습을 한 끝에, 마침내 1973년 11월26일 오후 7시 청주시민관에서 창단 공연의 막을 올렸다. 이상덕은 꿈에 그리던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창단 연주를 한 청주시민관은 중앙공원에 있던 건물로 900석이 넘는 규모였지만, 강연을 위해 만든 공간으로 음악을 연주하기엔 열악하기 짝이 없던 곳이었다. 이 건물은 1980년대 철거되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속에 막을 올린 첫 공연은 시중의 화제가 되었고 지역의 음악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많은 악기들이 한 무대에서 동시에 연주하는 모습도 신선했지만,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도 생겼다. 일단 관현악단이 출범하자 정기적으로 음악회가 열렸다. 1974년 3월1일엔 3.1 경축 음악회를 오전 11시와 오후 7시 두 차례나 열었고, 그해 10월11일에는 8월15일 피살된 육영수 여사 추모음악회를 열었다. 그리고 매년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장소는 모두 청주시민관이었다.
남문로 집에서도 관현악단 연습해
관현악단을 운영하는데 따른 에피소드도 많았다. 연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이상덕의 이층집에서 모여 연습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단원들이 집으로 오면 현관에 30~40 켤레의 신발이 쌓였어요. 엄마는 태동관에 짜장면을 시키시곤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셨어요. 돈이 너무 없었거든요. 어느 날은 국수를 삶고, 어느 날을 달걀을 삶고...지금도 그때 모습이 눈에 선해요.” 바이올린 주자로 참여했던 이대희의 증언이다.
이상덕은 1960년 청주시 남문로1가에 이층집을 지었다. 청주시내에 초가집이 있던 당시로서는 신식 가옥이라서 신혼여행 가는 사람들이 그 집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갈 정도로 눈에 띄는 집이었다. 이상덕은 무리하게 돈을 들여 이층을 올렸는데, 이층은 사실 살림집이 아니라 음악실이었다. 작은 방 2개와 넓은 거실로 나누어 바닥은 아스타일을 깔고 벽은 초록색으로 음악연주실처럼 꾸몄다. 그리고 실제 그곳에서 레슨과 연주가 쉼 없이 이루어졌다. 항상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집안에선 음악소리가 그친 적이 없었다.
이대희는 “집안에 피아노가 4대가 있었어요”라고 기억하고, 이강희는 “집이라기보다 음악원 같은 곳이었어요. 아버지도 레슨을 하시고, 큰 누나는 첼로, 대희누나는 바이올린, 정희누나는 피아노 레슨을 해서 방마다 음악소리가 들렸지요”라고 말한다. 초등학생이었던 막내 문희는 이 모습을 일기로 남겼다.
“아 죽고 싶다. 정말 시끄럽다. 시끄러워. 아버지도 레순, 큰 누나도 레순, 정희 누나도 레순, 대희 누나도 레순, 지겹다. 시끄럽다. 죽고 싶다.”
15년간 무보수 지휘자 상임화 앞두고 내려놔
민간조직으로 출범한 청주관현악단은 1979년 충북문화예술회관(현 청주아트홀 자리) 개관에 맞춰 청주시립교향악단으로 재창단한다. 황낙연 청주시장을 단장으로 이상덕이 상임지휘자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다른 시·도에 비해 일찍 시립화는 되었지만 이름만 시립일뿐 재정지원이 빈약해 운영난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시립교향악단의 연주는 매우 활발했다. 1979년 5월28일 충북문화예술회관 개관기념 공연을 시작으로 가곡의밤, 정기연주회, 수시연주회, 충북예술제경축음악회, 시민의날 경축음악회, 송년음악회, 신춘음악회 등 여러 이름으로 연주회가 이어졌으며, 제천 등 지방 공연도 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타·시도에서 시(도)립 예술단들이 상임화로 속속 출범했다. 청주에서도 시립 예술단의 상임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상임화 결정을 앞두고 이상덕은 1988년 6월 17일 오후 7시30분 청주문화예술회관에서 고별연주회를 연다. 그리고 자신은 명예지휘자로 남았다. 청주시는 이상덕에게 감사패를 주었다. 1995년 청주시립교향악단은 상임화를 도입했다.
1973년 민간 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지휘봉을 잡기 시작한지 15년, 그는 보수를 받은 적이 없었다. 청주교대부속초, 석교초 등 학교 교가를 작곡하고 많은 학교에 합주부가 생기도록 독려하고, 음악교사들을 배출하며 음악을 사랑한 이상덕을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충북 음악의 대부’ ‘음악 전도사’ ‘오케스트라의 아버지’ ‘음악교사 제조기’.
이제 그는 떠났지만, 그의 후손들이 음악의 대를 잇는다. 아들 이강희는 한국교통대 교수로 충주시오케스트라와 충청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및 지휘자이고, 이문희는 충청대 실용음악과 학과장이다. 큰며느리 강미정은 피아니스트, 둘째며느리 최진아는 바이올리니스트, 외손녀 최나경(이대희 딸)은 줄리어드 대학원을 나와 세계 10대 플루티스트로 꼽히는 세계적인 음악가이고, 박혜나(이선희 딸)는 전 충북도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이며 손녀 이채영(이강희 딸)은 한예종 대학원에 재학중인 소프라노이다.
“빠른 음악일수록 여유있게 천천히 연주하라”던 그의 음악 교육 철학은 여전히 모두에게 살아있다.
<이상덕 약력>
1924.1.19. 충남 논산시 강경읍 출생
1931. 공립강경보통학교 입학
1937.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 입학
신흥대(경희대) 법정학부 졸업
1945. 공군 군악대
대전공고 교사
청주사범학교 교사
1949. 문교부 주최 전국 남녀고교 음악발표대회 청주사범관악대 참가
1954. 문화인동호회연합회 음악위원장
1957. 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음악분과 초대 위원장
1958. 청주음악인협회 초대 회장
1960. 한국음악협회 초대 충북지부장
1962. 청주교육대학 교수
1963. 음협주최 초중고학생음악경연대회 신설
1972. 제 7대 한국예총 충북지부장
1973. 청주관현악단 창단
1973. 11.26. 창립연주(청주 시민관)
1974. 고 육영수여사 추모음악회(청주 시민관)
1976. 충북예술상(충북예총)
1979. 청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79.5.28. 충북문화예술회관개관기념 공연
1988. 청주시립교향악단 고별 연주회
중등 교과서 저술
충청북도문화상
문교부장관상
국민훈장 모란장
논문 「박연의 음악에 관한 연구」외 15편
2004.1.15. 별세

